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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70화 (70/150)

70화

나는 괜히 왼팔을 살살 문지르며 잠기운이 미처 가시지 않은 눈으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얼결에 들어온 허지훈의 방은 작지만 안락했다. 언젠가 한 번쯤 와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흔하디흔한 구조의 공간. 그 속에 담뿍 배어 있는 일상의 흔적을 좇는다.

싱글 사이즈의 조금 단단한 매트리스의 겉을 감싼 천에선 달큼한 향이 났다. 섬유 유연제 향인가? 세탁한 지 얼마 안 됐나 봐. 모퉁이 부분 시트지가 살짝 벗겨진 서랍장, 교복과 외출복이 겹겹이 걸려 있는 스탠드형 옷걸이, 이곳저곳에 흠집이 난 책상과 의자 따위가 방 안에 참 야무지게 들어차 있다. 몇 안 되는 가구들은 색이고 모양이고 전부 통일성이 없었다. 있는 물건 가져다 쓰면 그만, 인테리어고 뭐고 실용성 외에는 그 무엇도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단순한데 어지럽고, 은근하게 친숙하다. 지극히 허지훈다운 방이네. 실없는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

“응?”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이상하다. 왜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리지? 소리가 난 곳을 흘끔 쳐다봤다.

…역시 이상한데. 허지훈이 왜 바닥에 누워 있어? 눈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다. 허지훈은 여유 공간이 넉넉지 않은 방바닥에 이불까지 펼쳐 놓고는 세상 편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도대체 언제 저기에 자리 잡은 건데? 미친, 집주인을 두고 침대를 차지하다니 이게 어느 나라 상도덕이냐? 나 지금껏 허지훈이 바닥에서 꼼지락대는 것도 모르고 남의 방이나 실컷 들여다본 거야? 이런 예의 없는 놈을 봤나. 뒤늦은 깨달음에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허지훈. 네가 침대에 누워. 왜 불편하게 바닥에서 그러고 있어?”

“뭐? 너 지금 바닥 무시하냐?”

“…그게 아니라.”

나랑 농담하는 걸까, 아니면 진심으로 발끈한 걸까. 아, 모르겠다. 지친 몸을 이끌어 겨우 침대를 벗어났다.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워 인상이나 잔뜩 구기고 있는 허지훈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조심스레 걸었다.

“침대도 좋고 바닥도 좋아. 그냥, 나 이제 집 갈 거니까 이왕이면 있는 침대 쓰라고.”

“허? 벌써 가냐?”

“가야지.”

피곤함을 못 이겨 눈이라도 붙였다간 그대로 하룻밤을 허지훈의 집에서 보낼 것이 뻔했다. 방바닥에 이불까지 편 것을 보면 허지훈 역시 염두에 둔 일일 것이다. 조현우라면 기꺼이 이곳에서 잠을 청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허지훈과 단둘이 오래 있는 것이 불편해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허지훈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집에 들어올 적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에 시선이 붙잡혔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때에 허지훈이 방에서 엉기적 걸어 나와 의아한 투로 물었다.

“거기 서서 뭐하냐?”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린다. 운동화를 마구잡이로 구겨 신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갈게. 잘 있어.”

“야, 조현우.”

황급히 박차고 나온 현관문을 도로 닫으려던 때였다. 허지훈이 한 손으로 문을 짚어 가볍게 저지한다. 문 틈새로 시선이 마주쳤다. 허지훈의 눈에 익숙한 감정이 내비쳐 보였다.

…아, 또 불안해한다. 침음하며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당혹감을 삼켜 냈다. 입꼬리를 끌어 올려 애써 미소 짓는다.

“왜? 할 말 있어?”

“……별건 아니고.”

이놈의 어색함은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찾아와 허지훈과 내 사이에 벽을 세웠다. 나는 이러한 순간이 앞으로 몇 번이고, 끝도 없이 찾아 올 것을 예감했다. 허지훈은 이 관계의 거리감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영영 모르겠지. 나는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할 테고.

애초에 평형을 이룰 수 없도록 설계된 시소에 앉아 있는 셈이다. 가진 정보, 눈높이, 바라는 것, 모든 것이 다르다. 우리가 이 간극을 줄일 수 있을까? 줄인다 한들 무엇이 나아질까? 이건 난제 같은 게 아니다. 그냥… 답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허지훈은 분명 답이 있을 것이라 믿고 풀이에 골몰했다. 문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의심은 티끌만치도 못 한 채로 말이다. 지금의 허지훈에게 있어 조현우는 결코 포기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는 문제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조금 전에 본 것을 떠올린다. 현관 옆 선반 위에 놓인 작은 액자, 그 안에 고이 간직해 둔 사진을 말이다. 찬 계절의 희끄무레한 색감, 낯선 교복, 앳된 얼굴…. 중학교 졸업식 날 찍은 사진 같았다.

사진 속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오른편에는 조현우가, 왼편에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고 허지훈은 중앙에 서서 양쪽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행복한 모습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이어 나의 시선을 완전히 묶어 버린 것은 다름 아닌 조현우였다. 조현우는 두 개의 꽃다발을 품에 한 아름 안은 채 더없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조현우는 저렇게 웃는구나.’

처음 넋을 놓고 바라본 것은 이러한 감탄의 표현에 가까웠다. 그러나 감탄은 곧 체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나는 저 모습을 흉내 낼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안 될 것이다. 제 삶의 기쁨을 한데 그러모은 얼굴,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 고작 겉모습이 같은 정도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안 되는 거다. 내가 노력한다 한들 허지훈은 매번 위화감을 느끼고 불안해 할 것이 분명했다.

“조현우?”

“어?”

허지훈이 반쯤 열려 있던 현관문을 활짝 젖히며 걱정스레 말했다.

“너 존나 피곤해 보이는데. 그냥 자고 가는 게 낫지 않겠냐?”

“아니, 별로 안 피곤해. 괜찮아. 어차피 집까지 금방인데, 뭐.”

허지훈은 멋쩍게 제 뒷머리를 매만졌다. 나를 향한 눈길이 허공으로 옮겨 갔다.

“그러냐…? 그럼 됐고.”

“진짜 갈게. 너야말로 들어가서 얼른 쉬어.”

“어. 가라.”

“…응. 학교에서 보자.”

건조한 인사를 끝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서둘렀다. 계단을 내려가 녹색 대문을 건넌 뒤에도, 나는 뒤통수에 시선이 매달린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 내게 조현우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가? 아니다.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책임은 무슨 얼어 죽을 책임이야. 내 마음 급하다고 경솔한 언행으로 허지훈에게 상처를 준 것. 미안할 일이라곤 그것뿐일 텐데….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허지훈 집에 가지 말걸 그랬어.’

허지훈이 그토록 아끼는 조현우의 흔적 하나가 뇌리에 박혀 심란했다. 뭐냐고, 진짜. 내가 허지훈을 속이고 싶어서 속이는 것도 아니고, 조현우 몸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허지훈에게서 조현우를 뺏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거냐…? 환장하겠네.

내가 무사히 엔딩을 보고 이 게임을 나가면 원래의 조현우가 돌아오려나? 허지훈이 이 사실을 알면 나만큼이나 한우주의 연애를 응원, 아니… 연애하라고 협박할지도 모르겠다. 한우주, 듣고 있냐? 네 연애에 인생이 걸린 사람들이 둘씩이나 있다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속으로 주문을 읊다시피 했다.

한우주 연애해. 한우주 연애해라. 연애하라고. 사랑하라고. 왜 안 하냐고. 제발 하라고. 마침 봄이고 중간고사도 끝났고 연애하기 딱 좋은 시기 아니냐? 연애해라, 제발.

어디선가 그랬던가, 간절할수록 멀어지기 마련이라고.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의 바람은 휴지 조각이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으니까.

한우주는 귀중한 주말을 몹시도 알차게 보냈다. 느지막이 기상해 운동하고, 간단한 식사 후에 책을 읽다가… 다시 운동하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망할, 왜 이렇게까지 건전한 건데? 그나마 독서에 취미가 있으니 연애 소설이라도 사다 줘야 하나? 그러면 사랑에 관심이 좀 생길까?

설마 이 게임 진 엔딩이 솔로 엔딩이고 그런 거 아냐? 인생에서 가장 귀한 친구는 나 자신입니다. 혼자서도 괜찮은 사람이 되세요. 연애는 그다음입니다. 뭐 이런 말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아… 차라리 그런 거면 좀 낫겠다.

나는 거실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 맞은편의 한우주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한우주는 내 시선은 상관도 하지 않고 한가롭게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든 간에 연애와는 일절 관계없을 것이 뻔했다.

“야… 한우주.”

“응.”

대답이 건성이다. 손은 쉴 틈 없이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졸려서 정신을 반쯤 놓고 있었고, 오늘 겪은 일들로 마음이 고달팠다. 그 탓인지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고 지금껏 속으로 삼켜 온 물음을 던지고 말았다.

“너는 연애 안 해?”

바삐 움직이던 한우주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든 한우주의 얼굴은 얼핏 평소와 같아 보였다. 그러나 마음먹고 관찰하면 평소보다 눈을 잦게 깜빡이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 당황했나? 묘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잠기운을 등에 업고 다시 한번 말했다.

“너는 연애 안 하냐고.”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아, 혹시 이런 주제 불편해?”

“불편한 건 아닌데… 뜬금없잖아.”

그래, 한우주 네겐 뜬금없겠지. 그러나 내겐 아니다. 한 달이 넘도록 나는 네 연애 생각만 했다는 말이다.

“문득 생각나서. 키 크지, 잘생겼지, 운동해서 몸도 좋고….”

“…….”

“분명 인기 많을 텐데.”

한우주는 표정을 굳히곤 들고 있던 핸드폰을 손에서 대충 놓아 버렸다. 툭, 방금까지 한우주의 관심을 독차지한 핸드폰이 소파 위로 처량하게 떨어졌다.

“인기… 그런 거 없어. 조현우 너도 알 거 아니야?”

“글쎄.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너한테 관심 있는 사람 꽤 될걸?”

“……뭐?”

한우주가 슬그머니 미간을 좁힌다. 하긴, 지금 한우주의 기분이 어떨지 알 것도 같았다. 나 역시 연애에는 별 관심 없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일을 제법 겪었다. 친구들이 연애 이야기로 불타오를 때마다 혼자 시큰둥하게 입을 다물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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