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나야 속으로 곧 출시할 게임이 뭐가 있던가, 하면서 딴생각하기에 바빴지…. 한우주의 심정은 이해하겠다만 어쩌겠는가. 이 상황이 싫거든 내가 아닌 운명… 아니, 개발자를 탓해야 할 것이다. 말에 한숨이 섞여 든다.
“한우주 넌… 가만 보면 이런 데 둔감한 것 같아.”
한우주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할 말이 없나 보다. 애초에 많은 걸 바라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저 건전한 머릿속에 ‘연애’라는 주제를 모래알만큼이라도 주입하고 싶었을 뿐이다. 흘끔, 한우주의 눈치를 살핀다. 다행히 나의 말이 불쾌한 눈치는 아니다. 조금 더 과감하게 이야기해 봐도 괜찮으려나?
“의외로 꽤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중에 있을 수도 있고…?”
한우주와 오래 알고 지낸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 당연히 서연준이지. 만약 연애에 관심이 생긴다면 웬만하면, 아니 반드시. 대상은 서연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에 대상을 명확히 겨냥하고 한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우주의 낯이 조금 어두워졌다. 왜 저러지. 혹시 내 말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겸연쩍은 마음에 머쓱히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연애 못 해서 안달 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넌 어떤가 싶어서.”
“갑자기 그런 게 알고 싶다고?”
“응. 왜? 이상한가? 꼭 연애 같은 거 아니어도… 한우주 넌 무슨 재미로 사는지 궁금한 것도 있어.”
이것만큼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질문이다. 내가 한우주의 연애관을 신경 쓰는 건 상황상 어쩔 수 없는 거고…. 얄궂기 짝이 없는 나의 처지를 애써 배제하고 보면 한우주에 대한 인간적인 호기심이 남았다. 한우주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한우주의 즐거움이란 뭘까…. 한 달을 내리 붙어 지냈는데도 짐작조차 안 간다. 사람 놀리는 걸 은근히 즐긴다는 것 말고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다.
“허구한 날 책만 읽으면서 독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먹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 비면 운동만 하잖아. 아, 운동이 좋은 건가?”
“글쎄, 별로….”
“뭐야, 이것도 안 좋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자그마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한우주는 테이블 위 물컵을 집어 들었다. 단정한 입매가 천천히 벌어지고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졸음에 자꾸만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꾸역꾸역 들어 올린다. 한우주의 연애… 좋아하는 거… 인생….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튀었다. 묵직한 뇌가 느리게 돌아가 상황에 적절한 말을 골라내기 힘들었다. 그러다 어떤 질문이 번뜩, 잉어가 뛰어오르듯 나타나 막을 새도 없이 입 밖으로 탈출해 버렸다.
“한우주. 너… 혹시 말이야. 연상이 취향이야?”
탁, 한우주가 컵을 급하게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넓디넓은 거실에 한우주의 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꿋꿋이 말을 이어 갔다. 그만큼 중요도가 높은 이야기였다.
“나이 차 많이 나는 연상에 대한 동경 같은 거 있어? 막… 7살, 8살 차이 나는 사람이라던가.”
한우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른 건 됐으니까 이것만 대답해 봐. 연상 취향이냐니까?”
“넌 어떻게 사람이 날이 갈수록 더 이상해져?”
“뭐? 나 안 이상하거든? 그래서 대답은?”
한우주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시 드러난 한우주의 얼굴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와중에 나는 한우주의 매 순간이 화보 같다는 생각이나 했다. 게다가 이제 보니 손도 예쁘다. 섬섬옥수라는 말은 이런 때에 쓰는 거구나.
어깨가 무겁다. 짊어진 책임이 크다. 나는 이 국보급, 아니… 어쩌면 세계적인 미남을 연상의 정신 나간 변태에게서 지켜 내야만 한다. 가까스로 입을 여는 한우주의 모습이 안타깝도록 처연해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그런 취향 없어.”
“진짜로?”
“없어. 없다고.”
“잘 생각하고 말해 봐. 연….”
“왜 안 자고 버텨서 엉뚱한 소리만 해 대는 거야?”
“엉뚱한 소리?”
이 중요한 이야기를 엉뚱한 말로 치부하다니. 물론 내가 졸린 건 맞는데… 헛소리를 할 정도로 정신이 없는 건 아니다. 반박하려는 순간 한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으니까 그만하고 제발 자러 가.”
나를 아예 소파에서 끌어내곤 자라고, 자라고 난리다. 아니,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안 자겠다고 하면 기절이라도 시킬 기세라 일단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나절 만에 재회한 푹신한 침대가 미치도록 반가웠다. 부드러운 매트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방금 한우주와 한 대화를 곱씹었다.
‘그래… 연상 취향은 아니라는 말이지?’
진짜인가? 그렇지만 얼마 전에 나한테 형이라고 했을 때는… 연상의 마음을 무너트리려 작정하고 오래 수련한 사람 같았는데. 아, 그건 다른가?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었으니까. 게다가 윤태현은 형이라고 하기엔 좀 나이 차가….
아오, 정신 차려라. 또 엉뚱한 곳으로 마구 돌진하려는 정신을 붙들고 ‘인물 수첩’을 열어 보았다. 윤태현은 아직도 ‘수학ㅗ’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아, 그냥 좀 삭제해 주면 안 되나? 한우주는 연상이 취향 아니라고 하지, 이름을 제대로 외우는 것도 아니야, 둘 사이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작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윤태현 루트를 삭제하고 말겠다는 의지는 점점 더 굳건해졌다. 오늘 낮에 윤태현과 만난 일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쓰레기… 꺼림칙한 인간…. 학교가 아닌 감옥에나 어울릴 녀석….
인물 수첩의 ‘수학ㅗ’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무언가 확실한 사건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한우주가 윤태현이라는 인간에게 화를 품을 만한 직접적인 사건이.
마음이 불편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이 한우주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다. 부정적인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당사자의 내면을 좀먹기 마련이다. 한우주가 인하성에게 분노했을 적엔 어떤 일이 발생했던가? …아주 난리가 났지. 한우주는 이렇듯 외부에 휘두를 힘이 있다는 점에서 감정에 대한 위험 부담이 더욱 크다. 그런 걸 생각하면 한우주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한우주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동기는 나의 불안에 있지 않던가. 윤태현 그 미친놈이 한우주를 꼬시면 어떡하지, 한우주가 거기에 넘어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 말이다.
와, 다 알면서 이러냐. 한우주를 만나고 나서 내 성격이 좀 괴상해진 것 같다. 사서 고생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내가 하는 꼴을 보면 뭔, 고생 수집가도 아니고….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나는 기꺼이 고생을 자처했다. 어떻게 해야 ‘수학ㅗ’를 없앨 수 있을까…. 피곤한데 싫은 놈 생각까지 하려니 머리가 아팠지만 아무렴 어떤가. 한우주를 떠올리면 이 정도 고생하는 것쯤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다. 한우주는 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
“나는… 윤태현이 싫어.”
월요일 아침, 한우주와 나란히 학교로 향하는 길이었다. 버릇처럼 내뱉은 말에 한우주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나도 싫어. 이젠 이름만 들어도 끔찍하다.”
질색하는 반응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왜? 윤태현이랑 무슨 일 있었어?”
“그건 아니고. 조현우 너 어제 온종일 수학 얘기만 한 거 알아? 걔 때문에 전학 가고 싶어졌어.”
“아….”
윤태현이 뭘 한 게 아니라 나 때문이구나. 일요일에 한우주 앞에서 윤태현 욕을 숨 쉬듯 하긴 했다. 멀쩡한 얼굴로 가만히 입 다물고 있길래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걸까, 솔직히 의심했다. 잘 듣고 있었구나….
내 행동을 변명하자면 그건 나름의 주입식 교육이었다. 조건 반사를 노린 것이다. 말에는 힘이 있고, 인간은 생각보다 세뇌에 약하다. 이름만 들어도 기분 나쁜 상대와 연애할 일은 없을 테니까. 또… 가능하면 윤태현과 한우주가 직접 부딪히는 일 없이 루트를 삭제하고 싶다,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나의 작은 실험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도가 심했던 걸까? 한우주의 표정, 말, 숨까지 피곤함에 절어 버렸다. 한우주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욕해서 기분 좀 풀리면 됐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아니, 아니야. 그만할게. 미안.”
“뭘 사과까지 해. 더 해도 된다니까.”
거짓말. 여기서 더 했다간 삐지겠는데…. 이제 진짜 그만해야겠다. 고개를 가로젓자 한우주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이거 봐, 안 괜찮으면서 뭘 더 해도 된대.
한우주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지나가다 본 길고양이나 화창한 날씨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금방 학교에 도착했다. 한우주는 내내 건조한 반응만 보이다가 교실 문 앞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몇 마디 건넸다.
“네가 다른 사람 얘기만 하니까 짜증 나긴 하더라.”
“……응?”
“그러다 미운 정 들겠다.”
미운 정? 누구… 설마 윤태현한테? 내가?
“그럴 일 절대 없거든?”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어.”
말문이 막혔다. 왜 저렇게 초연해진 건데? 이제 한우주 앞에서 윤태현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 몇 번 더 말했다간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게 생겼다. 연애 같은 세속적인 것과는 멀어지겠다 선언할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 등골이 오싹하다. 입단속의 필요성을 통감하며 얌전히 자리에 가 앉았다.
윤태현을 제외하더라도 오늘은 꽤 시끄러운 하루가 될 것이었다. 금요일에 멋대로 학교를 빠진 데다가 학교 연락도 제대로 받지 않았으니 담임이 면담을 요청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허지훈. 혹시라도 허지훈과 한우주가 또 한바탕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한우주도 허지훈도 서로 문제없을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괜찮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재영과 강준희.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좋은 말은 못 듣겠지. 조현우의 위장에 고된 식사를 예고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이 중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단 하나도 없다. 한꺼번에 묶어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또 못 버틸 일도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침착하게 대응하면 괜찮을 것이라며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월요일 오전은… ‘오전만은’ 불안할 정도로 평화롭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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