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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72화 (72/150)

72화

자리에 앉고 5분쯤이 지났을까, 허지훈이 교실에 들어섰다. 가방도 놓지 않고 이쪽으로 다가오기에 긴장감이 바짝 들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냐. 어쩐지 문 두드려도 반응이 없더라?”

“어… 응?”

“전화도 안 받길래 처자는 줄 알았더니….”

“아, 전화했었어?”

“그래, 인마.”

허지훈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말을 건넸다. 한우주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그저 내게 월요일 아침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나는 되레 한우주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허지훈을 향한 시선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기분 진짜 안 좋아 보인다.

저 불량스러운 시선을 허지훈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나. 한우주와 허지훈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허지훈은 한우주의 뺨을 흘깃 쳐다보곤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말았다. 결국에는 아무 말 없이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지만.

‘…방금 뭐였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음 시련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 역시 나의 예측을 벗어나고 말았다. 번개처럼 나타나 성난 하마같이 굴 줄만 알았던 담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조례는 옆 반 담임 선생님이 대신 진행했다.

오늘 내가 예상한 일 중 정말로 일어난 것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점심시간에 오재영과 강준희가 반에 찾아온 것이다. 둘과 점심을 먹기에 앞서 한우주를 떼어 놓느라 진땀을 뺐다. 혼자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친히 서연준에게 데려다주었건만. ‘밥맛 없어.’, ‘잠이나 잘래.’, ‘귀찮아.’ 하며 이제 막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처럼 툴툴거렸다. 용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점심 맛있게 먹어, 현우야.’ 하고 한우주를 끌고 가던 서연준이 조금 안 되어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한우주와 서연준을 뒤로하고, 나는 오재영, 강준희, …그리고 허지훈을 슬그머니 챙겨 교정 한편에 위치한 등나무 벤치 아래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월요일에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으름장을 놓은 것치고는 무난한 대화를 나눴다. 금요일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정신 나갔냐, 연락 한번 더럽게 안 받더라, 네 핸드폰은 비싼 벽돌이냐, 참 따뜻한 덕담이 한참을 오고 갔다.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고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에 오재영의 목소리가 섞여 든다.

“그런데 뭐야. 조현우랑 허지훈 그새 화해함?”

“…그런가 보네. 주변 사람까지 달달 볶고 난리더니. 이렇게 금방 화해할 거면서 도대체 왜 그 지랄을 한 거냐고.”

“아니, 컥.”

강준희는 도대체 허지훈에게 얼마나 시달렸길래 저럴까. 울분에 찬 말을 건네며 나와 허지훈에게 눈총을 쏘아 대는 통에 먹던 빵이 목에 걸릴 뻔했다. 허지훈이 내게 우유를 건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 아쉽냐? 너 가운데 끼고 평생 싸워 주랴?”

“……화해 축하한다. 앞으로는 절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라.”

“오냐. 고맙다.”

허지훈이 준 우유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오재영은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몸을 비틀며 대놓고 심심한 티를 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혼자서 지루함을 달래는 데 한계를 맞이한 모양이다.

“야, 허지훈아.”

“뭐.”

“너 한우주랑은 괜찮은 거냐?”

“켁.”

이번엔 우유를 마시다가 사레들렸다. 오재영과 강준희의 시선이 나란히 허지훈을 향한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기침하기에 바빴다. 허지훈이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무심한 투로 답했다.

“어. 대충.”

“대충이 뭐야, 대충이.”

“대충 괜찮다고.”

“아오! 허지훈 대답 존나 건성이야.”

반쯤 먹은 빵과 우유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오늘 점심 식사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낫겠다.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가 없다. 혹사당한 기도가 따갑다.

“허지훈.”

강준희는 허지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쪽 다리를 반대쪽 무릎에 걸치고 턱을 괴었다. 허지훈은 귀찮다는 양 표정을 구기고는 대답 대신 시선을 맞추었다.

“괜찮으면 이제 좀 말해 주지?”

허지훈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준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너 다치고 입원한 거…. 한우주가 한 짓 맞아?”

“엥. 강준희 이 새끼 새삼스러운 걸 물어? 당연한 거 아니냐?”

“오재 좀 닥쳐 봐. 허지훈 입으로 직접 좀 듣자고.”

“아니, 정황이라는 게! 한우주 아니면 누가 그러는데?”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나의 혼란은 깊어지기만 했다. 뭐야? 오재영이랑 강준희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거야? 지금껏 당연히 한우주가 한 것처럼 말해 놓고?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곁에 앉은 허지훈을 바라보았다. 허지훈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맞부딪힌 시선은 금방 엇갈리고 말았다. 허지훈은 오재영과 강준희를 보고 짜증스레 표정을 구겼다.

“새끼들 존나 뒷북쳐요. 사지 멀쩡했으면 됐지 이제 와서 난리야?”

“야. 말은 바로 하자. 누가 뒷북을 쳐?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을 물었는데.”

“아, 그러니까. 이제 됐다고. 그만 좀 물어보라고. 강준희 너 원래 이렇게 눈치가 없었냐? 말하기 싫은 거 아니야.”

“…….”

“그냥 좀 넘어가자. 어?”

“너….”

강준희의 얼굴 위로 분노가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강준희는 제 이마를 짚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제 안 물을게.”

“어.”

“…난 먼저 들어간다.”

건물을 향하는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했다. 오재영은 강준희를 한 번, 이쪽을 한 번,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내비쳤다.

“아, 미친. 이게 다 뭔…. 아, 안 되겠다. 허지훈. 조현우. 나도 먼저 가 본다? 강준희 저 새끼 저거….”

오재영은 차마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강준희를 쫓아 달려갔다.

…방금 도대체 뭐가 지나간 걸까.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넷이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나와 허지훈만 덩그러니 남아 버렸다. 부스럭, 정적 사이로 봉지 소리가 들려왔다. 허지훈은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며 빵이나 마저 먹었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미치겠다. 뭘 알아야 이해를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다들 당연히 한우주가 한 일이라고 여겼잖아? 고작해야 서연준이나 한우주가 그랬을 리 없다며 변호했지. 심지어 나조차도 인하성 때의 일 이후로는 허지훈이 입원한 게… 한우주가 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뭐야, 다 먹은 거냐?”

“어? 아, 응. …다 먹었어.”

어느새 빵을 전부 해치운 허지훈이 봉지를 접으며 말을 건넸다가, 반이 조금 넘게 남은 나의 빵을 보고는 못마땅한 티를 냈다.

“저게 다 먹은 거라고?”

“…입맛이 없어서.”

나는 혹여 허지훈이 빵을 다 먹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말라던가, 닥치고 먹으라며 입 안에 구겨 넣을까 걱정했다. 또 괜한 선입견으로 허지훈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표정이 그랬다. 허지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얕은 숨을 뱉으며 말했다.

“야.”

“응.”

“그거, 뭐냐. 말 안 할 거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라.”

“…말 안 한다고?”

“어.”

뭘 말 안 하겠다는 건데. 속 터지겠다.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피가 몰려 평소보다 뜨끈한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게 전부다. 사람들은 한우주가 허지훈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한우주와 허지훈. 그리고… 조현우까지 총 세 사람.

아, 조현우는 또 왜 껴 있는 거야. 차라리 몰랐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허지훈도 상대가 조현우라면 말해 줄지도 모르고. 질문조차 마음 편히 할 수 없는 처지가 야속했다. 짙은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허지훈은 나의 한숨을 무어라 해석한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자식아, 땅 꺼지겠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허지훈.”

“왜?”

미친 척 물어볼까? 나 사실은 그때 기억이 가물가물해. 저번에 인하성… 야구하는 애한테 밀쳐진 뒤로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아. 망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허지훈이 나의 오른팔을 당기며 움직임을 재촉했다.

“일어나라고. 교실 가기 싫냐?”

“…아니, 아니야. 일어날게.”

나는 괜스레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멍했지만 머릿속은 쉴 틈이 없었다. 어떻게든 알아내야 할까? 한우주가 연관되어 있는, 그것도 원작에는 없는 사건…. 내가 게임에 들어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의 일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한우주의 평판은 바닥을 기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이런 걸 전부 차치해도 전말을 알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조현우, 거기에 한우주까지 엮인 일을 모르고 헤매는 건 지긋지긋하다. 그리고 허지훈. 입원까지 한 녀석이 자기 입으로 말하기 싫다느니, 뭐니 하는 것이 영 신경 쓰였다.

“야, 조현우. 앞에 좀 보고 걸어.”

“앞에 보고 있는데….”

“어. 그래. 앞으로 가다 보면 개미집도 보고 두더지도 보고 화석도 있고 그렇겠네.”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운동장 외곽에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오늘따라 사람이 적었다. 적막은 머리를 비우는 데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며 심란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때였다. 허지훈이 걸음을 멈췄다. 흐린 시선이 자연스레 허지훈을 향했다.

“조현우.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괜한 생각 하지 마라.”

…괜한 생각?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허지훈은 주변을 한 번 두리번 거렸다가,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그때 그 일은 사고나 다름없었어. 주변에서 뭐라 캐물어도 신경 꺼, 그냥. 알았냐?”

“…사고라고?”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은… 적어도 쓸데없는 죄책감은 느끼지 말란 소리야. 그럴 필요 전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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