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73화 (73/150)

73화

“…….”

강준희의 물음에는 그토록 방어적으로 굴었으면서….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에 간 걸까, 허지훈은 꼬리를 내리고 나의 눈치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새삼스레 체감한다. 조현우를 향한 허지훈의 호의와 헌신은 약점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게다가 티는 또 얼마나 나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허지훈이 하는 말, 행동,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그새 익숙해진 것인지 마음이 담담했다. 호의에 이토록 빠르게 적응하다니, 교활하기도 하지. 속으로 자조했다. 동시에 허지훈의 말에 섣불리 대답해선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사고… 사고라고.’

뭔진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니겠구나. 허지훈과 조현우 사이의 비밀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침묵에 깃든 노력이 무거웠다.

이런 나의 속내를 다른 누군가가 알 턱이 없지. 단순히 대답하기 싫다는 이유로 상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유치하고 철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역시나, 허지훈이 불만스레 인상을 구겼다. 이내 시선을 돌리고 경직된 목을 양쪽으로 두어 번 기울였다가, 나무라는 말 한마디 없이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며 허지훈이 한 말을 곱씹었다.

‘그때 그건 사고나 다름없었어. 쓸데없는 죄책감은 느끼지 말란 소리야.’ 이 말은 곧 허지훈이 다쳐서 입원한 일에 조현우도 일조했다는 뜻이 되지 않나?

‘한우주가 널 다치게 한 것이 맞느냐.’는 강준희의 말에 긍정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한우주가 허지훈을 해코지한 게 맞기는 한가?

어지러이 흩어진 추측 속에서 감히 한 가지 확신하건대, 조현우는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고’에 관여했을 것이다. 허지훈의 언행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허지훈은 팔이 지나치게 안쪽으로 굽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번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한 것이다. 어정쩡한 말로 진실을 숨기고, 조현우의 죄책감을 덜어 주려 하고….

‘그래서 조현우 얘는 도대체 뭔 짓을 한 거냐고.’

허지훈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며 아는 거 전부 다 불라고 하고 싶다. 하… 가만 보면 조현우나 허지훈이나 은근히 답이 없다. 허지훈 이놈은 자기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나? 조현우만 있으면 돼? 강준희는 친구도 아니야? 자기 걱정해서 한 말인 걸 모르진 않을 거잖아. 하여간에 허지훈은 조현우에게 쏟는 정성의 3할이라도 떼어서 주변에 할애하면 사회생활하다가 문제 겪는 일은 없을 거다.

아, 이젠 강준희까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마음 단단히 상했을 텐데 괜찮으려나. 강준희에게 연락을 해 볼까? 아예 반으로 찾아가 볼까. 아니면 뒤쫓아간 오재영이 알아서 잘 달랬을 것이라 여기고 허지훈이랑 대화를 하는 게 나을까? 허지훈 얘한테 무슨 말을 해야 자연스레 정보를 캐낼 수 있지? 머리는 하나인데 생각할 게 너무 많다. 이럴 땐 케르베로스라도 되고 싶다. 머리가 세 개면 뇌도 세 개인가, 그러면 생각도 한 번에 세 개는 할 수 있지 않으려나….

끝도 없이 부풀어 가는 생각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오… 모르겠다. 앞선 허지훈의 등을 흘끔 쳐다보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장 쉬운 것부터 해결하자. 메시지 한 통 보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잖아.

「조현우:야… 강준희? 오재영아?」

「조현우:너희 뭐해? 강준희는 너는 좀 괜찮아?」

와, 얘들은 핸드폰이 몸에 내장되어 있기라도 한가 봐. 엉뚱한 생각이 불쑥 들 정도로 빠르게 답장이 왔다.

「강준희:나 왜」

「조현우:화난 거 아니야?」

「강준희:허지훈 성질 개더러운거 아니까ㄱㅊ음」

「오재영:ㅅㅂㅇ마」

「오재영:존나 나한테 화풀이 다 해놓고 멀쩡한 척하는 거 실화냐ㅅㅂ」

「강준희:뭐. 내가 언제.」

…엄청 괜찮아 보이는데? 다행이다. 둘의 투덕거림도 금방 잦아들어, 걱정 수천 가지 중 하나를 겨우 지워 낼 수 있었다. 안심하고 핸드폰에서 눈을 떼려고 했다. 그런데 딱 귀신 같은 타이밍에 오재영이 나를 불렀다.

「오재영:어 야 근데 조현우」

「조현우:왜?」

「오재영:그거 들엇냐?????」

「오재영:저번에 야구 일 크게 터졌잖음?? 감독 교체는 확정이고]

「오재영:너희 반 거 뭐냐 그거 있잖아 담임]

「오재영:하; 아니 갑자기 단어가 생각안남;]

「강준희:멍청이」

「오재영:ㅡㅡ;; 배은망덕ㅎ한 샊갸]

얘네는 싸움이 일상이네. 그나저나 그놈의 야구 이야기는 왜 또 나오냐. 강준희에게 욕하랴, 야구부 이야기하랴, 거기에 담임이 어쩌고저쩌고…. 오재영이 바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얘는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1초 단위로 대화의 주제가 달라져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야…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메시지를 적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디링-

낯설지 않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앞에 떠오른 문구는 이벤트의 갱신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이 문자의 행렬을 눈에 담자마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손안에서 핸드폰이 잘게 진동했다. 오재영이 착실히 단톡방을 도배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곧 핸드폰을 들여다볼 여유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디링-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또다시 알림음이 들려왔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들이 순식간에 부서진다. 형용 못할 감정들이 물밀듯 몰려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거기 서서 뭐 하냐?”

“…….”

“야, 조현우!”

“…어?!”

허지훈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것도 몰랐다. 한숨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뭐야? 완전히 넋을 놓곤.”

“그, 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허?”

“나, 나 가 볼게!”

시야를 가리는 시스템 문구를 짜증스레 꺼 버리며 외쳤다. 눈앞의 글자는 사라졌지만 그 내용은 뇌리에 단단히 박히고 말았다. 거의 동시에 떠오른 두 개의 이벤트는 각기 다른 이유로 나의 이성을 무너트렸다.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관계의 증명」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수학ㅗ :: 상담 요청」

…한우주를 만나야 한다. 떨어진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몸이 훌쩍 앞서 버린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발을 헛디딜 뻔했다. 휘청이는 몸을 겨우 가누며 달음박질쳤다.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오른다. ‘야, 잠깐! 조현우 너 어디 가는 데!’ 허지훈의 다급한 외침이 대상을 잃고 덧없이 흩어졌다.

***

한층, 또 한층. 모퉁이를 돌아 마지막 한층의 계단에 발을 디디려 했을 때였다.

“어?”

바로 위에서 내려오던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균형을 잃어 몸이 휘우듬했다. 그 순간 다급히 뻗어 온 손이 나의 허리를 단단히 지탱했다. 아찔한 상황에 헛숨을 들이켰다. 상대방이 아주 조금만 굼떴다면 꼼짝없이 넘어졌을 것이다. 달뜬 숨을 가라앉히며 마주한 얼굴을 확인한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적잖이 당황한 듯 휘둥그레 뜬 눈이 나를 향했다.

“…혀, 현우야?”

호흡이 완전히 안정되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한우주는… 안 보인다. 나는 서연준의 팔을 부여잡고 추궁에 가까운 물음을 던졌다.

“연준아. 한우주는?”

“으, 어, 으응?”

“한우주랑 같이 있었잖아. 아니야?”

“그, 그게… 그랬지. 응. 같이 있…었는데?”

서연준 얘 왜 이래? 아까부터 말을 더듬고, 얼굴도 붉다. 이제는 아예 고개를 쳐들어 천장이나 보고 있다. 의아함에 미간이 좁아졌다.

“이, 일단 좀 놓고… 떨어져서… 어, 나, 나부터 놔야 하는구나. 미안!”

서연준은 불에 덴 사람처럼 펄쩍 뛰며 거리를 벌렸다. 행동 하나하나 침착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한껏 가라앉은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어절 하나하나 힘을 주어 다시 물었다.

“미안한 건 내 쪽이지. 그보다 한우주랑 같이 있었다며.”

“…아, 응. 같이 점심 먹다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어.”

“어디 갔는지 알아?”

“글쎄…? 교무실에 있지 않을까? 선생님이 부르셔서 따라갔거든.”

순간 머리가 핑 돌아 이마를 짚었다. 손이 차다. 아니, 얼굴이 뜨거운 건가?

“한우주 부른 거 윤태현 새…… 선생님이야?”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찍었어.”

기가 막혔다. 윤태현 이 새끼가 한우주한테 무슨 소리를 하려고? 나한테 헛소리한 걸로는 부족했냐? 아, 미친. 다 집어치우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교무실에 가서 한우주를 데리고 나와야겠다.

곧장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중요치도 않은 궁금증이 발목을 붙잡았다. 안태원 정신 못 차리냐? 얼른 갈 길이나 가라고. 날 모질게 꾸짖어 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바닥에 시선을 둔 채로 주뼛대며 말했다.

“그, 다른 얘기지만 연준이 너 한….”

한우주랑 뭐, 그렇고 그런… 감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니…?

하… 내가 제대로 돌았구나. 어디 사는 미친놈이 갑자기 이런 걸 묻겠냐? 차마 말을 못 잇고 고개만 더욱 푹 숙이고 말았다. 서연준이 부드러운 투로 나긋하게 말했다.

“현우야, 괜찮아? 너 혹시 어디 안 좋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까 잡아 줘서 고맙다고. 그 말 하려고 했어.”

이상하다. 서연준의 상냥한 목소리가 유독 기분 나쁘게 들렸다. 윤태현 때문에 예민해져서 서연준한테 화풀이하려는 건가? 내 성격이 원래 이렇게 고약했던가?

“그럼 나중에 보자.”

중얼거림이나 다름없는 인사를 건네고 이번에야말로 발길을 돌렸다. 올라온 계단을 도로 내려가며 속으로 억지를 부렸다. 서연준은 진짜 바보에 멍청이다. 솔직히 원망스러울 정도다. 한우주가 윤태현 따라가는 걸 그냥 두고 봤다고? 그래, 그럴 수 있지. 서연준은 윤태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잖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한다.

알면서도 이토록 속이 뒤집히는 이유는 명백했다. 직전에 발생한 서연준 이벤트, 원작에 버젓이 존재하는 ‘관계의 증명’ 때문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