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냥 존재하기만 할 뿐인가? 중요도를 따져 이야기하자면 입만 아프지. 서연준 루트 진입을 목전에 두었을 때야 발생하는 이벤트니까.
‘관계의 증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한우주와 서연준, 둘 사이에 주말 약속이 잡혔을 것이다. 이 ‘주말 약속’은 ‘관계의 증명’의 연계 이벤트이자 서연준 루트의 분기점이 되시겠다. 이번 주말 이벤트만 잘 넘기면 일사천리로 서연준 루트에 진입할 수 있을 터이다.
‘…루트 진입 이벤트 발생 조건이 어떻게 되었더라.’
서연준 이벤트를 여러 차례 겪으며, 서연준과 한우주가 서로를 신뢰하고 애정을 가져야 한다. 조건이 충족되면 서연준이 한우주에게 한 가지 ‘부탁’을 청한다. 이걸 한우주가 승낙하는 것이 ‘관계의 증명’ 이벤트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서연준은 한우주에게 자신의 불안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확신을 품어야 한다. 한우주는 서연준이 제게 가치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겨야 한다.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쏟을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의 관계를… 형성해야만 죽이든 밥이든 된다는 건데….
그런 관계가… 어떻게든 된 건가? 도대체 언제? 이 모든 게 갑작스럽고 뜬금없이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꼬여서, 의심이 많아서 그런 걸까?
지금까지 서연준과 쌓은 엉터리 이벤트들이 사실은 엉터리가 아니었나 봐. 히든 루트 특별 이벤트, 뭐 그런 거였나…. 어쨌든 목표한 서연준 루트에 한 발자국 다가선 셈이니 조금은 기뻐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기쁘기는커녕, 허탈했다. 헛웃음이 다 나온다.
한우주 앞에서 너는 연애를 안 하냐, 오래 안 사람 중에 네게 관심 있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주절주절 떠들어 댄 것이 효과가 있었나? 아니면 뭐야, 둘이서만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서 이벤트 발생이 늦어지기라도 한 거냐고. 나 그동안 둘 사이를 훼방 놓은 건가? 나만 없으면 둘이 알아서 잘 될 것을 괜히 들쑤시고 다녀서….
‘…아니지. 나는 진작 빠지려고 했어. 싫다는 사람 굳이 옆에 끼고 다닌 건 한우주란 말이야.’
그러니 둘의 연애가 지체된 건 내 탓이 아니다. 치졸한 변명이 마구 솟구쳤다. 최악에서 더욱 최악, 그리고 다시 최악으로. 기분이 지옥에서 널뛰기를 하는 것만 같다. 화살은 바쁘게 돌고 돌아 다시 서연준을 향했다.
…서연준 너 한우주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윤태현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한우주가 윤태현을 거리낀다는 것 정도는 알아서 눈치챘어야지. 한우주는 윤태현 싫어한단 말이야. 이름조차 외우기 싫어한다고.
윤태현 그 작자가 한우주를 불렀을 때, 한우주가 싫은 티를 안 냈을까? 아니. 조금은 티 났을걸. 물론 평소의 한우주는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이니까 모를 수도 있다. 그래도 친한 사이라면 눈치 못 챌 정도는 아닌데. 말이 조금 늘어진다던가,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린다던가, 평소보다 숨을 깊게 내쉰다던가.
방금 마주친 서연준은 어땠더라. 한우주를 걱정하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도대체 한우주랑 뭘 한 건지, 얼굴이나 붉히고. 생각하니 열받네. 좋아 죽겠냐? 어?
좋으면 유심히 살펴 줘야지. 싫어하는 거나 위험한 것에서 지켜 줘야지. 아무리 미세한 변화라도 눈치채야지. 적어도 서연준 너는 그래야 하잖아.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속이 부글부글 끓는 바람에 교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살금살금 문을 열고, 다시 고이 닫았다. 마주치는 선생님들께 꾸벅 인사까지 했다. 그러다 윤태현과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우주를 발견했을 때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상도덕도 함께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야, 한우주!”
쩌렁쩌렁한 외침이었다. 한우주와 윤태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둘뿐만 아니라 교무실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정신이 살짝 나가서 그런 건 눈에 뵈지도 않았다. 발걸음에 분노가 실렸다. 교무실에 들어설 적에 챙긴 예의가 초 단위로 박살이 나고 있었다.
윤태현도 한우주도 썩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마침내 둘의 앞에 도달하고, 나는 손바닥으로 윤태현의 뺨을 후려치는 상상을 했다. 다행히 상상에서 그쳤다. 윤태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 현우야.”
안녕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때문에 안녕 못 한다. 윤태현의 인사에 고개만 대충 까딱였다. 선생님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예의의 ‘예’ 자도 모르는 경거망동한 인간처럼 보일 텐데. 문득 치미는 생각을 꾹꾹 눌러 담았다. 저 변태를 선생 취급할 필요는 없다.
“선생님이 지금은 우주랑 이야기 중인데. 급한 일이라도 있니?”
“네.”
한우주의 팔을 끌어당기며 뻔뻔스레 굴었다.
“완전 급해요. 한우주랑 당장 해야 할 일 있어요.”
말하며 한우주를 흘긋 살폈다. 눈치도 빠른 녀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눈만 끔뻑이고 있다. 답답함에 팔을 두어 번 더 잡아당겼다. 한우주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윤태현을 바라보았다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급해 죽겠네요. 할 말은 얼추 다 하신 거 같은데.”
“아, 그러니? 너희 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윤태현은 나와 한우주를 번갈아 살피고는 소리 내어 웃으며 의자에서 몸을 떼었다. 여유가 넘치는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웃음소리, 동작 하나하나, 눈빛까지도 어떤 뜻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봤자 어린애의 발버둥일 뿐이라고, 우위를 점한 것은 자신이니 원할 때에 언제든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 한우주를 놓아 주는 것은 그러한 역겨운 자신감에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나의 헛된 망상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유감은 없다. 상대는 윤태현이다. 강박에 가까울지언정 느슨하게 구는 것보다는 경계하는 쪽이 백 배 낫다.
“음… 그러면 우주야.”
윤태현이 한우주를 향해 팔을 뻗었다. 짧은 순간, 며칠 전 겪은 불쾌한 감각이 생경하게 떠올랐다. 윤태현의 살과 피부, 서늘한 체온이 맞닿았을 때의 끔찍함이.
타악-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한우주의 곁에 바짝 다가가 윤태현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망할, 이건 누가 봐도 과잉 반응이잖아.
“하… 한우주는….”
시선이 길을 잃고 헛돌았다. 나는 한우주 본인이 있는 앞에서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고 말았다.
“누가 만지는 거, 닿는 거 싫어해요.”
“…그래?”
윤태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른한테 그러면 안 되지. 방금의 행동은 부적절했어. 게다가 정말 싫으면 우주가 스스로 말하지 않겠니.”
틀린 말이 없어 반박하지 못했다. 짜증 나. 부적절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표출 못할 분노가 점점 쌓여 갔다. 윤태현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인지, 얄미운 입이 다시 열리려던 때였다.
“제가 워낙에 내성적이다 보니.”
한우주가 윤태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표현에 서투른데요. 용기 내서 말씀드릴게요. 제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싫어하는 거 맞거든요.”
툭툭 내뱉는 말에 성의가 없었다. 윤태현보다도 훨씬 크게, 교무실을 가득 메우도록 한숨을 푸욱 내쉬며 탐탁지 않은 티를 내었다.
“…그러니. 참고해 둘게.”
윤태현은 한우주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미소만 지어 보였다. 양심도 없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에 기가 찼다.
여기 더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한우주의 팔을 약하게 쥐어 잡는다. 내 뜻을 금방 이해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윤태현에게서 몸을 돌렸다. 어차피 곧 종이 칠 테니 윤태현도 한우주를 더 붙잡아 두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을 놓기 무섭게 손목이 붙잡혔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쾌한 접촉이었다. 아, 끈질긴 새끼. 진짜 지긋지긋하다. 망할, 저놈의 살랑이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온다.
“맞다. 현우야?”
대답하지 않았다.
“교무실에서는 정숙하도록 하자. 다음부터는 신경 써 주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곤 정말로 교무실을 나섰다. …교무실은 무슨, 악마의 굴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는데. 속으로만 비아냥거렸다.
교실로 향하는 내내 한우주는 별말이 없었다. 나 역시 말없이 걷기만 했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아서, 그래서 오히려 묻지 못했다. 무엇을 먼저 묻는 게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강준희와 오재영조차 전말을 모르는 ‘사고’, 허지훈이 말한 조현우의 죄책감, 서연준과 발생한 이벤트, 그리고 윤태현까지. 분류도 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데이터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나는 제대로 부하가 걸려 버린 뇌를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한 것이라곤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댄 것밖에 없는데…. 그 사이 오후가 다 지나가 버렸다.
하루 종일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담임은 종례 때가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오늘 담임까지 보고 마는구나. 그래, 잔소리 좀 듣고 말지 뭐. 오늘 겪은 일들이 워낙에 요란해 담임이 무슨 말을 한들 무던히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상투적인 말과 안내 사항이 이어졌다. 종례가 막바지에 다다를 때였다.
“이 녀석들아, 조용히 안 해?! 거기, 김성훈! 누가 책상 위에 가방 올리래! 종례 아직 안 끝났으니 집중해!”
집중하라는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있나. ‘너희 이런 식이면 보충 직전까지 종례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성이 난 담임이 크게 외쳤다. 쿵, 출석부로 교탁을 내리치는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뻔한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나서야 소란함이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다.”
교실을 조용했지만 지독한 무료함이 공기 중에 팽배했다. 학생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산만했으나 그나마도 잠시였다. 곧, 담임이 공표한 사실은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갑작스럽고 미안한 소식이지만… 선생님이… 으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교직을 내려놓게 되어서….”
정적은 짧았다. 담임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말을 이어 갔다.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 학업에 대한 잔소리, 두서없는 이야기 끝에 충격적인 소식이 따랐다.
“아무튼, 앞으로 3반은 윤태현 선생님이 임시로 담임을 맡아 주시기로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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