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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75화 (75/150)

75화

뭐?

누구…? 누가 담임을 해?

“젊은 선생님이 잘해 준다고 버릇없이 굴지 말고.”

담임은 그 뒤로도 한참을 떠들었다. 그중 머리에 남은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윤태현이 우리 반 담임을 맡기로 했단다. 충격적인 소식에 가까스로 유지해 온 정신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넋이 나간 채로 허공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담임의 쩌렁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려 겨우 다시 정신을 차렸다.

“조현우!”

언제 종례가 끝났지? 교탁 앞에 있어야 할 담임은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마, 대답 안 해?”

“…네.”

“녀석아, 종례에 집중하라고 했건만 말을 안 들어요, 말을. 나 참, 얼른 교무실에나 가 봐. 윤태현 선생님이 잠깐 보자고 하시더라.”

“…….”

“조현우! 제대로 들었어? 또 대답 안 하지!”

“…들었어요.”

힘 빠진 대답에 담임이 혀를 찼다. 잊지 말고 꼭 가 봐라. 한마디 덧붙이며 그대로 곁을 떠났다. 뒤에서 한우주가 몇 번인가 ‘조현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교무실… 일단 가 봐야겠지.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반쯤 체념한 끝에 가방을 챙겨 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우주는 날 불러 대는 걸 포기하고 조용히 따라 일어났다.

“한우주!”

뒷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준이 한우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째서인지 심란함이 깊어졌다.

“아, 현우야?”

내게도 살갑게 인사를 건네기에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서연준의 낯은 점점 어두워졌다.

“현우… 역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어? 아니…. 아프기는. 그런 거 아니야. 나 멀쩡해.”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피곤해 보여.”

“그래? 요즘 잠이 좀 부족했나….”

괜찮다는 데도 자꾸만 물어 댄다. 진심 어린 걱정이 고마우면서도 달갑지 않았다. 지친 정신이 브레이크를 내던지고 엄한 사람에게 성질을 낼까 두려웠다. 내키지는 않지만… 윤태현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가야겠다.

“미안한데 나 윤….”

“야, 서연준.”

한우주가 내 말을 가로채 버렸다. 서연준의 관심이 한우주에게로 옮겨 갔다. 결과적으로는 내게 잘된 일이었다.

“왜?”

한우주가 내 쪽을 한 번 곁눈질하곤 말했다.

“오늘 얘기한 거… 안 되겠는데.”

“어… 갑자기? 무슨 일 생겼어?”

“생각해 보니 선약이 있었어.”

“네가? 누구랑?”

…아니, 서연준. 그런 말은 좀. 한우주 친구 없어 보이게 왜 그래. 물론 친구 없는 거 맞지만 어련히 모른 척 해 줘야지. 오늘 서연준의 눈치에 여러 번 감탄하게 된다.

“조현우랑.”

“현우?”

“나?”

뭐야, 나 한우주랑 약속한 거 있었나? 아닌데… 그런 거 없는데…. 그보다 방과 후 서연준과의 약속이라니. 이젠 뭐, 데이트랑 다름없지 않나. 선약을 취소하고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지금 서연준을 바람맞히려는 거야? 그것도 내 핑계 대서?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남의 연애 훼방 놓는 기분 따위 더는 느끼고 싶지 않다.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선약은 무슨 선약이야! 너희 둘이 볼일 봐.”

“…조현우. 나랑 한 약속 잊은 거야?”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아니 내가 언제 너랑 약속…. 아니, 잠깐. 나랑 선약이 있었다고 쳐. 그러면 너도 내 약속은 잊고 연준이랑 새로 일정 잡은 거 아냐.”

“그래서 지금 바로잡으려고 하잖아.”

“늦었어. 너랑 놀기 싫어졌으니까 얼른 연준이랑 가 버려.”

한우주가 어쭙잖은 거짓말을 한 탓에 대화가 우스워졌잖아. 이 중 가장 어리둥절한 것은 서연준일 것이다. 서연준의 얼굴에 누군가 유성 매직으로 ‘곤란함’이라고 적어 놓은 것만 같다. 서연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 나는 됐어. 나는 다른 날에 봐도 괜찮으니까….”

“그건 안 돼!”

제발 가라. 내 눈앞에서 썩 꺼지고 둘이서 알콩달콩해 보라고. 애걸복걸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냈다. 그 대신 한우주의 수법을 따라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선약이 있었어.”

“뭐?”

“한우주랑 한 약속 이전에… 먼저 잡은 약속이 있다고.”

한우주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대놓고 불쾌한 티를 냈다. 애초에 너랑 나랑 뭘 약속한 적이 없는데 억울할 게 뭐가 있다고 저래…?

“누구랑 한 약속인데.”

“그냥 친구.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까 둘이 하려던 거 해.”

한우주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꼈고, 서연준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서연준은 아예 머리를 부여잡고 말았다.

“그러니까… 한우주랑 현우랑 약속을 했는데, 현우는 그 이전에 다른 친구랑 한 약속이 있고, 한우주는 현우랑 한 약속을 깜빡 잊고 있다가 나랑 약속을 잡은 상황인 거야? 게다가 이 모든 약속의 날짜랑 시간이 겹치는 거고?”

…뭐 이딴 게 다 있어. 누구랑 누가 뭐? 모르겠다. 이해를 포기했다. 대충 답해야겠다.

“……그런 셈이지. 어쨌든 한우주랑 연준이 둘이 잘 놀고. 나는 먼저 간다.”

한우주가 또 억지를 부리거나 꼬투리를 잡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그전에 한우주가 내 팔을 붙잡고 말았지만. 한우주의 표정이 뚱하다. 얼토당토않는 거짓말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건 자기면서…. 뭘 혼자 삐지고 있어?

“뭐야? 이거 놔. 나 약속 있다니까?”

“…거짓말쟁이.”

“뭐라고?”

“왜 거짓말해?”

“아니, 야. 거짓말은 네가 먼저….”

뻔뻔함에 기가 막혀 작정하고 따지고 들려던 때였다. 한우주와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힌다. 나는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긴 속눈썹 아래에 드리운 자그마한 그늘과 희미한 빛무리를 머금고 검게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금방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짙은 눈 속에 담긴 생명력이 유독 여리게 느껴져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반칙이다. 불가항력이라고….

하찮고도 우스운 대화를 거두어 내고 보면 밀물처럼 밀려오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간다.

주말 내내 한우주 앞에서 침이 마르도록 윤태현 욕을 해 댔는데…. 윤태현이 갑자기 담임을 맡는다지 않나, 수업 마치고 따로 호출까지 하고. 그러니까… 한우주는 아마도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억지를 부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연준과 한 약속을 취소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니, 그래선 안 된다고.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 나보다는 서연준이 더 중요한 게 당연하잖아.

내 팔을 붙든 한우주의 손 위로 나의 손을 겹쳐 올리며 말했다.

“한우주. 나 괜찮아.”

“…….”

“연락할게.”

눈가를 살짝 찌푸리는 것이 아직도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팔을 놓는 모습이 투정을 부리는 동생 같기도 하고, 꽤 귀엽다. 하여튼 이럴 때 보면 진짜 애 같다니까.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냈다.

“그럼 나 간다? 더 늦기 전에 교무실 가야 돼.”

“…어.”

“…그, 으음. 내일 보자, 현우야.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

“알았어. 걱정 고마워.”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서연준은 마지막까지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에 서연준은… 눈치를 좀 단련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집착하는 버릇도 어떻게든 고치고. 그래야 한우주랑 제대로 사귈 수 있을 것이다. 서연준의 이런저런 단점과 개선 점을 떠올리며 바쁘게 걸었다.

***

교무실 진짜 싫다. 교무실에 있는 윤태현은 더 싫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보는 거다. 으, 짜증나. 왜 나만 따로 부르고 지랄이지? 이제는 ‘담임도 아니면서 웬 참견.’하고 꼬투리를 잡을 수 없게 된 것이 야속했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교무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교무실 중앙에 자리한 윤태현의 자리를 향해 느릿느릿 걸었다. 윤태현은 다른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어 내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거리가 좁아지자 내 의지와 관계없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하필 3반이에요? 하여튼 요령도 없으셔. 굳이 나서서 맡으시고….”

“하하… 전 좋기만 한걸요. 예전부터 꼭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담임이요.”

“힘드실 텐데. 일도 일이지만… 윤 선생님같이 정 많은 사람은 학기 말 다가오면 마음 아파서 앓아눕는다니까요?”

으, 누가 정이 많다는 거야. 윤태현 저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실실대는 것 좀 봐. 징그러워 죽겠네.

이거 더 들어서 좋을 거 없을 것 같은데…. 얼른 용무나 보고 학교를 뜨고 싶다. 그러나 선생님들 대화에 불쑥 끼어들 수는 없어 적당한 곳에 서 있었다. 대화는 꽤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아까 보니까 장난 없던데? 누구더라, 걔…. 아까 점심시간 끝날 즈음에 윤 선생님 찾아온 애요.”

“응? 누구요? 아, 우주 말씀하시는 건가?”

“아아, 한우주. 걔도 할 말이 많긴 한데요. 말고, 좀 더 작은 애 있잖아요.”

“음… 현우요? 조현우?”

“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두 분이 말씀하시는 사람 지금 여기 서 있는데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좋은 말은 안 하겠지, 뭐. 피곤하다. 하품이 나왔다.

“교무실 와서 소리나 질러 대고. 윤 선생님한테 버릇없이 굴던데?”

“아… 죄송해요. 그 부분에 대해선 주의 줬으니 이제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어우, 말한다고 들으면 교직이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러고 보니 걔가 걔죠? 그, 인하성 일 때에도 있었는데.”

“아, 네. 맞습니다.”

“올해 3반에 문제 있는 애들이 유독 많은 것 같아. 나라면 거기는 절대로 못 맡아요.”

“하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린 학생들이잖아요.”

어른이라고 별다른 거 없으면서 나이 타령이다. 학생 뒷말이나 하고…. 나는 딱히 내 행동을 후회한 적도 없고, 잘못했다 생각한 적은 더더욱 없다. 저들은 귀 기울일 가치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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