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허지훈은 내 쪽을 돌아보곤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대놓고 불만 가득한 얼굴이 꽤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허지훈은 이까짓 일로 사람을… 구체적으로는 조현우를 위협할 인간은 아니다.
“하… 그러니까, 내가….”
허지훈의 눈을 좁혀 떴다. 이어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조현우랑 둘이서 중요하게 할 말이 생겨서 그런다.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냐.”
“나랑? 갑자기?”
“어.”
나중에 하면 안 되는 거야? 가볍게 대꾸하려 들자 허지훈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스며들었다. 나를 흘겨보는 기민한 눈짓에 담긴 의도가 선명히 느껴졌다. 제발, 협조 좀, 해라. 허지훈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정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짜슥아,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던가! 방금 너 존나 시비 털려고 작정한 새끼 같았거든?”
오재영이 경쾌하고 큰 목소리로 허지훈을 가볍게 다그쳤다. 허지훈은 한층 누그러진 기색으로 ‘어, 그러냐…. 미안하다.’ 하고 순순히 사과했다.
이후 상황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오재영은 ‘마침 배가 고팠다. 겸사겸사 이 게을러 빠진 새끼 산책 좀 시키고 와야겠다.’라며 강준희를 끌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강준희는 그냥… 졸려 죽겠는데 개빡 친다는 표정으로 힘없이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사라져 주변이 허전했다. 나는 곧장 허지훈에게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허지훈은 내 곁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반응 왜 이래?
“됐고, 하던 거나 마저 해.”
“할 말 있다며?”
“조현우 너 눈치 갖다 버렸냐…?”
영문도 모른 채 눈치 없는 놈 취급받았다. 뭐야, 기껏 다른 애들까지 내보내 놓고선…. 속으로 꿍얼거리며 하드나 마저 확인했다.
달칵, 라는 폴더에 들어간다. 폴더 안에 폴더가 또 있다.
, 그리고 그 안에 또 . …뭘 이렇게 꽁꽁 숨겨 놨대. 장난쳐 놓은 건가? 아니면 정말로 이 안에 이상한 거라도 있나.
느낌이 안 좋다. 불쾌한 이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시 한번 마우스를 클릭했다.
달칵.
“……어?”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폴더 안에는 웬 파일들이 가득했다. ‘20210208.txt’, ‘20210208_1.jpg’,‘20210208_2.jpg’… 날짜별로 분류된 파일명의 사진과 텍스트 파일이 짝을 이루어 빈틈없이 들어찬 모습이 기이하게 다가왔다.
‘왠지 불안한데….’
어물대 봤자 애꿎은 시간만 흐를 뿐이다. 조현우에 대한, 그리고 조현우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에 대한 것. 뭐라도 좋으니 알고 싶다고 생각한 건 나잖아.
…달칵.
심호흡 끝에 가장 첫 번째에 자리한 사진 파일을 열어 보았다. 얼핏 봐선 무얼 찍은 것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잠깐만, 이거….’
사진 속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한다.
‘…….’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나는 정신없이 사진을 넘겼다. 그렇게 약 스무 장의 사진을 눈에 담고 나서야 이 폴더의 정체를, 사진의 목적을, 정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가슴이 턱 막혀 온다. 이딴 걸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사진 속의 한우주는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인지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 사진이 얼추 수십, 수백 장은 되었다.
설마. 이건 아니다. 무언가 잘못됐다. 생각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어 보려 애썼지만 헛짓거리였다. 숨김 처리된 폴더, 한우주를 겨냥해 몰래 찍은 사진들, 조현우 자취방의 비밀번호, 한우주를 짝사랑한 것…. 사소한 듯 아닌 듯, 은근하게 나의 속을 긁어 온 사실들이 퍼즐처럼 맞추어져 한 가지 사실을 자아냈다.
조현우는 한우주를 스토킹했다.
부정 못 할 문장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모니터에 띄워 둔 사진에서 비틀린 욕망이 짙게 풍겨와 속이 역했다.
“야, 조현우.”
헛숨을 들이켰다. 대답하지 못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모니터만 바라봤다. 눈이 뻑뻑해 아프다. 곧, 허지훈이 한쪽 팔로 책상을 짚으며 슬며시 허리를 숙여왔다. 허지훈은 제법 진중한 얼굴로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떤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는다.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절박한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역시 지우는 게 낫지 않겠냐?”
“……뭐?”
“…왜. 설마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허지훈 너….”
다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어떻게?
설마, 아까…….
내가 폴더를 확인하려 든 순간, 허지훈이 갑작스레 오재영과 강준희를 방에서 물리려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허지훈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조현우의 범죄 사실을 은폐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도대체 왜? 조현우랑 허지훈이 막역한 사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애들 오기 전에 빨리 결정해. 이거 때문에 온 거 아니야?”
“…잠깐만.”
한 줌 생각마저 휘발되어 버린 것 같다. 머리가 차게 식고, 시끄러운 속이 고요히 침잠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원래의 목적에 집중했다. 조현우가 사진과 함께 남겨 둔 텍스트 파일을 하나 열어 본다.
「2021. 02. 05
드디어 우주의 얼굴을 봤다. 우주는 오피스텔을 나와 아주 잠깐 얼굴을 비추고 도로 들어가 버렸다. 슬펐다.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아, 우주가 다시 나왔다! 목도리를 두르려고 들어간 모양이다. 목도리는 누가 준 걸까? 우주가 직접 산 건가? 귀엽다. 잘 어울린다. 역시 우주는 추위에 약한 것 같다. 아까도 두꺼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더워 보일 정도로……」
“이 새끼가 진짜….”
참지 못한 욕이 터져 나왔다. 내 눈 썩었잖아, 미친놈아.
“…조현우 너 괜찮냐?”
허지훈이 손을 뻗어 왔다.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허지훈을 뿌리치며 의자를 뒤로 물리고 말았다. 허지훈의 표정이 당혹감에 젖어 들었다. 이런 상황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미안. 지금 내가 좀… 그냥….”
중얼거림이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개 같은 파일들 다 지워 버리고 하드까지 부숴서 불태워 버리고 싶다. 정말로, 마음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조현우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이놈은 힌트 자판기도 아니고, 단순히 같은 반 친구이자 조력자도 아니고, 그놈의 짝사랑 설정 하나 덜렁 붙은 것으로 조금 애잔하고 말 녀석도 아니었다.
조현우는 스토커다. 그것도 주인공을, 한우주를 스토킹했다. 한우주 주변인치고 멀쩡한 놈 하나 없더라니, 조현우도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또?’
의심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 자식이 스토킹만 했을까? 조현우에 대한, 내가 모르는 다른 사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상 조현우를 파악할 수단이라곤… 저 일기인지, 스토킹 일지인지 하는 것뿐이다. 허지훈의 말마따나 오재영과 강준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를 일이니, 여기서 전부 확인할 수는 없다.
나는 몇몇 쓸 만한 데이터와 폴더를 통째로 핸드폰에 옮기기 시작했다. 허지훈은 그런 나를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데이터를 전부 옮기고 하드를 분리할 때가 되어서야 오재영과 강준희가 돌아왔다.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 속에 고소한 냄새가 섞여 들었다.
그리고 나의 위장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솔직했다. 와, 이런 상황에도 배가 고프다니. 아침에 반찬 하면서 간 본 걸 빼면 먹은 게 없긴 하지만….
분노와 울적함, 거기에 허기짐이 한데 섞여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툭, 떨궈 버렸다. 당황한 오재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현우 뭐야, 이 새끼 안색이 왜 이래?”
강준희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한쪽 어깨를 짚고 내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허지훈을 향해 무어라 하려다가, 숨을 얕게 들이켜 멈췄다. 이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할 말 있다며. 사람까지 쫓아내 놓고 무슨 얘길 한 거야?”
“……미안.”
해 줄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다. 오재영이랑 강준희는 모르겠지. 친구라는 녀석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지.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는 것이 불편하고 괴로웠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입술만 달싹이고 말았다.
“싸웠어.”
묵직하고 덤덤한 목소리였다. 강준희의 시선이 허지훈을 향해 옮겨 간다.
“뭐라고?”
“조현우랑 나랑 싸웠다고. 너희 나가 있는 동안에.”
“그게 말이 돼? 너희 둘이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또 싸워?”
“몰라. 말이 왜 안 돼?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 아니냐?”
“다 큰 새끼가 징그럽게 무슨 소리야.”
“다 안 컸나 보지.”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허지훈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강준희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려던 때였다. 방 입구를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하던 오재영이 말인지 랩인지 모를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이, 미친. 야. 내가 너희한테도 알려 주기 아까워서 숨겨 둔 맛집까지 갔다 온 참이거든. 화덕 피자 갓 구운 거 사 왔는데 그냥 먹고 화해하면 안 되겠냐? 지금 개 따끈따끈해. 여기 배달도 안 돼. 배달 안 해도 장사 존나 잘 돼. 나랑 강준희랑 줄 서서 사 온 거라고. 십 년 원수랑도 화해할 맛이니까 일단 처먹어 봐. 너희 배고파서 싸운 걸 수도 있어, 새끼들아. 원래 사람이란 게 배고프면 예민해서 말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야.”
“…….”
오재영아….
하….
내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 이상의 난장판을 맞이하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나는 허지훈의 말에 얼추 장단을 맞춰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이야기했다.
“오재영, 네 말이 맞아….”
“엉?”
“배가… 고파서 그랬어. 말하는데 드는 에너지… 칼로리 소모 무시 못 하는 건데…. 배고파서 말할 기운 없다는 데도 허지훈이 자꾸 말 걸잖아. 그래서 성질 좀 부렸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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