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진짜야…. 그거 사진…. 기억이 안 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뇌가 얍삽하게도 굴러갔다. 만약 이 말이 먹힌다면 허지훈에게 자세한 정황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먹히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시침 떼자. 목이 아프도록 헛소리를 해 대면 아무리 허지훈이라도 ‘조현우 이 새끼가 단단히 미쳤구나.’ 하고 학을 뗄 수도 있다. 물론, 웬만하면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패기만만하게 지르고 보긴 했는데, 통할 거라는 확신이 없어 불안했다. …허지훈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져, 몸에 긴장이 바짝 들었다.
“……그게 말이 되냐? 기억이 안 난다는 게….”
허지훈은 가만히 넋을 놓고 있다가 시선을 바닥에 떨궜다. 나는 혹 허지훈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온몸의 촉을 곤두세웠다. 허지훈의 반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지금 내게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말실수라도 해서 크게 삐끗하면 나의 처지가 바닥없는 곳으로 고꾸라질 수 있으니까.
“하, 미친…….”
‘어쩐지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게….’라는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어 표정을 살피기 힘들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그래, 존나 하나도 이해 안 가지만 그렇다고 쳐. …뭘 잊은 건지 물어봐야 하냐, 어디부터 기억하는지 물어봐야 하냐?”
얼핏 침착한 투였으나 부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서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점잖은 반응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흥분해서 따지고 들지는 않잖아. 게다가 나의 말을 깊이 의심하는 눈치도 아니다. 짧은 고민 끝에 최대한 솔직한 답을 내놓았다.
“한 달 전쯤인가, 팔에 금 가서 깁스했을 때… 그 이후의 일들은 확실히 기억해.”
“뭔, 팔? 나 입원 중이었을 때?”
“응.”
퍼뜩, 허지훈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비명이라도 지를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선 입만 몇 번 벙긋거리고 말았다. 겨우 낸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아, 씨. 아니, 야. 너 그때 머리도 다쳤냐? 아오, 이거 욕하는 거 아니고. 말 그대로. 아, 미치겠네.”
“그…을쎄? 기절하긴 했어.”
“장난하냐?! 씹, 그때 뭐였지? 뭔… 1학년 새끼가 그랬댔냐? 그 새끼 때문이잖아, 그러면!”
기억을 잃었다. 다소 어이없는 거짓말 뒤로 툭툭 내던진 진실이 우스꽝스럽게도 맞아떨어졌다. 굳이 길게 말을 지어낼 필요 없이, 허지훈은 알아서 상황을 유추해 나갔다. 그렇게 인하성은 내 팔을 부러트리다 못해 기억까지 날려 버린 천하의 빌어먹을 쓰레기 새끼가 되어 버렸다.
“치료는? 병원은 다니고 있어?”
“…팔 재활은 순조롭게 하고 있지.”
“팔 말고.”
“……팔 말고는… 그냥 두고 있어.”
“미쳤냐? 그걸 왜 그냥 둬?!”
말과 말 사이에 욕설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인하성도 슬슬 몸 좀 회복되었을 텐데. 이대로 가다간 허지훈한테 한 번 더 처맞게 생겼다. 나는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골랐다.
“그, 뇌를 다친 건 아니기도 하고…. 이런 건 그냥 시간 지나면 돌아오는 일도 있다길래.”
“한 달째 안 돌아오는 거 아니야, 지금.”
“치료받는다고 금방 기억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다른 신체적인 불편함은 없거든. 진짜로.”
“그래서 그냥 방치하겠다고?”
“그건… 치, 치료비! 돈 들잖아.”
“뭔 소리야. 돈은 당연히 1학년 새끼한테 뜯어내야지. 왜, 그 새끼가 안 준대?”
…기억 상실 이야기는 적당히 넘기고 싶은데 허지훈은 점점 집요해지기만 했다. 온몸으로 채근해 대는 것만 같아 부담스럽다. 어떻게 하면 이 대화를 끝낼 수 있을까. 허지훈… 허지훈이라면….
“나… 더는 걔랑 엮이고 싶지 않아.”
“…….”
“얼굴 보는 것도 싫고, 목소리도 듣기 싫고, 어떤 방식으로든 접하기 싫어. 자꾸 병원 들락거리는 것도 지긋지긋해.”
“야. 너….”
나는 아예 아둔한 고집을 부리기를 택했다. 허지훈이라면 조현우 본인이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허지훈의 시선이 나의 얼굴에 잠깐 닿았다가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머물렀다. 흔들리는 눈동자의 표면 위로 망설임이 어슴푸레하게 비쳤다. 허지훈은 이내 한 자락 여유마저 잃어 더는 심란함을 감출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한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이 조현우를 위한 일일까.’ 허지훈의 생각을 가늠해 본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허지훈. 나 좀 도와줘.”
허지훈에게 생각할 시간을 오래 주어선 안 되겠구나.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튀어 나가기 전에 강하게 이끌어야만 한다. 그러면 허지훈은 어쩔 도리 없이 끌려올 것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허지훈과 조현우의 관계라는 게 그렇더라.
“이런 거… 나에 관해 물어볼 사람은 너뿐인 거 같아서….”
“…….”
“…아니야?”
한숨 소리가 더 커졌다. 힘없이 초라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가 궁금한데. 뭘 먼저 알려 줘야 해?”
허지훈이 곁눈질로 슬그머니 나를 살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꾸역꾸역 눈을 맞추며 바로 물었다.
“내가 한우주를 스토킹한 게 맞아?”
답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질문보다는 운을 떼는 것에 가까웠다.
“…어.”
그러면 그렇지. 스토커 자식….
“내가 그걸 너한테 말했어?”
대답이 없다. 또다시 고개를 돌리려 들기에 황급히 팔을 붙잡아 당겼다.
“허지훈?”
뭐야, 나 분명히 당겼는데?
“허지훈!”
안 당겨진다. 황당하네.
“허지훈, 야! 내 말 무시해?”
이렇게까지 꿈쩍도 안 할 일인가? 믿을 수 없다. 양손으로 질질 끌다시피 하자 허지훈이 겨우 입을 뗐다. 아예 몸까지 틀어 버린 탓에 잘빠진 턱선과 귓등만 보였지만.
“……들킨 거지.”
“뭐?”
“학교고 알바고 종일 같이 다니던 녀석이 자꾸만 어디론가 사라져. 이상하잖아. 네가 뭐… 그쪽으로 대단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바보냐? 그걸 모르게?”
“……너 그러면 다 알고도….”
다 알고도 동조한 건가? 이젠 증거 은폐까지 돕고? 이 정도면 공범 아니야? …분명 속으로만 읊조렸을 터인데. 텔레파시라도 간 걸까.
“아니, 새끼야. 나는 당연히 존나 뜯어말렸어!”
허지훈은 큰 소리로 억울함을 토해 내며 내 쪽으로 몸을 홱 틀어 버렸다.
“어?”
나는 여태 허지훈의 옷소매가 늘어져라, 힘을 잔뜩 주어 당기고 있던 참이었다. 망할 반동 덕분에 나의 몸이 맥을 잃고 허지훈 쪽으로 기울었다. 분명 그대로 엎어질 터였다.
툭, 이마가 부딪혔다. 단단한 것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야. 이 미친, 그러게 왜 사람을….”
팔뚝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어리둥절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스레한 달빛을 등진 허지훈의 얼굴이 보였다. 저녁의 어둑함 위로 옅은 그림자가 덧그려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현우 시력이 좀 안 좋은 편인가?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도 허지훈이 멀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다. 이제야 아주 조금, 허지훈을 알 것 같다고 여긴 마음이 덧없이 흩어졌다. …허지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짐작조차 안 간다. 나는 자각도 없이 허지훈을 노골적으로 관찰하고 말았다.
관찰 결과, 여전히 알 수 없음. 호기심이 미처 충족되기도 전에 내가 아는 허지훈으로 돌아왔다.
“인마, 조심 좀 해.”
무심하게 말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거리를 벌리려 든다. 아니, 이대로는 안 되지. 다급한 손길로 허지훈을 붙잡는다. 쉽게 뿌리칠 수 있을 텐데도 허지훈은 그러지 않았다.
아까부터 은근히 대답을 회피하려 드는 것이 답답했다. 그나마 내놓는 답들도 몹시 굼떠서, 말을 꾸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작게 솟아났다.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면 덜하지 않을까. 말을 주저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허지훈에 대한 호기심은 한편에 잠시 미뤄 두고 본래의 목적에 집중했다. 크게 뜬 눈이 느리게 끔뻑였다. 어쩐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혹여 이 순간을 놓칠까 싶어 서둘러 물었다.
“한우주랑 왜 싸웠어?”
한우주, 허지훈, 조현우. 셋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명은 입원하고, 다른 한 명은 학교에서 별 이상한 소문이 도느냐는 말이다.
“나 때문이야?”
“야, 잠깐 이것 좀 놓고….”
“조…, 내가 스토킹…한 거 때문이야?”
“잠깐.”
“다른 건 됐으니까 당장은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줘. 내가 한 짓이랑 관련 있어?”
“어.”
말끝의 음이 내려갔다. ‘어.’라고, 긍정한 것이 분명하다.
“…니.”
그런데 이 쪼잔하게 붙은 ‘니’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니? 어니가 뭐야. 저런 말이 세상에 어디 있어?
“어, 라고 한 거지?”
“아니. 아니라고 한 건데.”
“거짓말.”
“…….”
“말 안 할 거야?”
“…지금은 말고, 나중에.”
흘리듯 말하며 아주 손쉽게 나를 제게서 떼어 놓는 모습에 기가 찼다. 허지훈이 제대로 된 답을 유보할수록 조현우에 대한 적개심만 커졌다. 허지훈이 왜 저러겠는가. 이런 때에 마저 조현우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겠어. 기억을 잃은 조현우가 알면 충격받을 만한 내용이라던가. 아무튼 조현우 이 녀석이… 스토킹 말고도 무슨 잘못을 했겠지.
기억 상실이라는 변명이 통한 건 다행인데, 저놈의 입이 열릴 생각을 안 한다. 이러나저러나 속이 터져 죽겠는 건 마찬가지다. 진짜, 진심으로. 이러다 죽겠다 싶어 울분에 찬 말을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실수로 ‘나’를 ‘조현우’라 지칭해 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새삼 짜증스러웠다.
“그딴 짓을 벌여 놓고 다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는 건 비겁하잖아. 일을 저지른 건 나인데, 너만 기억하고 있는 게 억울하지도 않아?”
“안 억울해.”
허지훈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기가 찼다.
“나는 너랑 한우주 사이가 왜 그렇게 나빠졌는지도 몰라. 그냥… 나랑 연관이 있겠거니 얼핏 짐작만 할 뿐이야. 그런데도 안 억울하다고?”
“안 억울하다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래?”
“…….”
몰아치듯 이어지던 대화가 끊겼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떻게 그러냐고….”
허지훈은 감정에 솔직했다. 굳이 숨기지 않았고, 숨기려 들 때도 어디론가 줄줄 새어 나와 어떻게든 티가 났다. 그래서 대하기 쉽기도, 어렵기도 했다.
“모르겠다. 나한텐 그저 당연한 거라서.”
지금 같은 경우는… 완벽한 후자다. 어렵다. 너무나도 어렵다. 이게 시험 문제라면 망설임 없이 버리고 다음 문제로 넘어갔을 것이다.
“조현우. 나도 하나만 좀 묻자.”
싫어. 아무것도 묻지 마. 그렇게 말하고 어디로든 멀리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너… 나에 대한 건 얼마나 기억하냐?”
“…….”
“……기억나는 게 있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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