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순식간에 정신이 멍해졌다. 멀뚱히 있다가 신호가 끊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한우주」
그리고 다시 끊겼다. 본의 아니게 두 번이나 전화를 씹어 버렸다. 나 지금 뭐 하냐?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에… 한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통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할 말을 와르르 쏟아 냈다.
“여보세요. 한우주? 전화 못 받아서 미안. 핸드폰을 늦게 봤어. 그나저나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내 걱정은 말고 먼저 자.”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망했네. 손에 식은땀이 났다. 얼른 전화를 끊고 싶었다. 솔직히 지금은 한우주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다. 얼굴 볼 자신은 더더욱 없고. 한우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조현우?]
“으응.”
가슴께가 답답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서성이기 시작했다. 초조함이 전신을 뒤덮어 가만히 있기 괴롭다.
[너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인데 그래.]
“아니, 아니야. 일 없어. 그냥, 나 오늘은 집…. 아니지, 너희 집 안 들어가려고.”
[뭐?]
대화가 아까보다 더 망한 것 같다. 그래도 본론을 바로 이야기한 것에 점수를 조금 줄 수는 있겠다.
[너 지금 어딘데?]
“…어디긴, 친구 집이지.”
그때였다. 털이 복슬복슬한 작고 귀여운 흰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허지훈이랑 있을 때 본 그 강아지다.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인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강아지의 걸음은 경쾌해졌다. 차오르는 흐뭇함에 그저 눈으로만 인사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귀여운 친구가 ‘왕!’ 하고 짖으며 내 다리를 향해 돌진해 왔다. 강아지의 돌발 행동에 가슴 줄을 놓치고 만 주인이 경악하며 외쳤다.
“붕붕아, 안 돼!!”
조그만 솜뭉치 같은 강아지는 내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인지, 이름처럼 꼬리를 붕붕 흔들어 대다가 앞발을 들고 몇 번 폴짝이는 게 전부였다. 귀여워서 웃음이 다 나왔다. 주인분이 연신 사과하는 것에 거듭 괜찮다 말하고, 강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눌 즈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액정 너머에서 찬 공기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친구 집에 강아지 있어?]
“…응.”
[강아지가 집에서 산책을 해?]
“……아니.”
[강아지랑 같이 있어서 행복해?]
“……응. 아니, 잠깐. 응?”
[됐어.]
“뭐가 됐다는 건데. 한우주? 여보세요?”
[…….]
“야. 한우주. 그, 내가 지금 친구 집… 안은 아니고, 바로 앞이야. 답답해서 산책 좀 나왔다가 강아지 만난 거야.”
[놀러 가 놓고선 왜 혼자 산책을 해? 그럴 거면 집에 와.]
“그건… 잠깐 나온 거라서, 이제 다시 들어가려고….”
이후로 한참 동안 이런저런 변명을 둘러대기에 바빴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고작 하루 안 들어갈 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절절매고 있지?’
그리고 한우주는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걸까. 이쯤 되면 오기로 이러는 건가 싶다. 사전 통보만 하면 됐지, 외박을 하니 마니로 투덕대는 건 좀…?
“야아, 한우주. 됐어. 그만해. 지금 우리 대화 진짜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뭐가.]
“친구 사이에… 이건 좀….”
[좀?]
이게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좀… 낯간지럽잖아.”
[…그런가?]
한우주는 몹시 평이한 투로 되물었다. 당황스럽네. 얜 진짜 아무렇지 않은가 봐. 그러고 보면 평소에도 친구끼리 하기엔 민망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는 되어야 미연시 주인공 하는 건가? 조금 혼란스럽다. 나의 상식을 되짚게 된다. 한우주는 생각할 시간을 오래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싫어?]
“어?”
[내가 이러는 게 귀찮거나 징그러워?]
“잠깐. 뭐가 그렇게 극단적이야?”
[정말로 그래?]
얘가 미쳤나. 사람이면 가끔은 귀찮을 수 있지. 아닌가? 한우주가 귀찮은 적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징그럽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지구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한우주더러 징그럽다는 말은 못 할 것이다.
“안 그래…. 귀찮은 것도 아니고, 징그러운 건 더더욱 아니고….”
굳이 이런 걸 묻고 답하는 것도 낯간지럽지 않나…? 생각이 탈출구 없이 돌고 돌아 고리를 맺으려 드는 것을 한우주가 가위를 들고 나타나 싹둑 잘라 버렸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네. 슬플 뻔했어.]
“……뭘 또 슬프기까지 해.”
[슬프지. 난 네가 없으면 허전해서 그런 건데….]
“뭐? 하, 한우주.”
[막상 너는 낯간지러워서 싫다고 하니까….]
“내가 언제 싫다고…. 아니, 야. 말하지 말아 봐.”
[네가 오기 전에는 집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는데….]
“다, 닥치라니까?!”
한우주 이 미친놈. 그냥 전화를 확 끊어 버릴까? 뭐라는 거야, 진짜? 남의 속은 모르고 민망한 말만 나불대는 게 얄밉다. 이왕 얄미울 거면 눈앞에서 얄미웠으면 좋겠다.
‘……?’
뭐야. 아무래도 진짜 미친 새끼는 나인 것 같은데? 마침 옆에 가로등이 있길래 이마를 쿵 박았다. 정신 차려, 이 자식아.
[방금 무슨 소리야?]
“넌 몰라도 되는 소리…. 아무튼 나 오늘은 진짜 좀… 그러니까… 먼저 좀 자라. 제발.”
이제는 애원까지 하고 있다. 아, 한우주가 원망스럽다. 아니, 조현우가 밉다.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이게 다 조현우 때문이잖아.
‘진짜로, 지금은 한우주 네 얼굴 보기 힘들단 말이야.’
멍청한 생각인 거 알지만 심란한 걸 어떡하냐. 한우주와 한 달을 같이 산 녀석이, 이 몸의 주인이, 조현우가 사실은 한우주를 지독하게 스토킹해 왔단다. 그 와중에 나는 ‘친구 조현우’ 노릇을 하며 한우주의 과분한 호의를 받아 버렸다. 모르고 한 일이래도 싱숭생숭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오래 삽질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한동안은 한우주랑 가까이 지내야 하니까. 게임 엔딩을 볼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고, 그놈의 연애를 도와야 하는 입장이지 않은가. 내가 하지도 않은 일 가지고 면목이 없다, 찝찝하다며 한우주를 피해 다니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또 없을 것이다.
그래, 딱 하루만이다. 하루 동안 어떻게든 마음 추스르고 내일부턴 말짱하게 생활할 거다. 조현우가 스토커면 뭐 어쩔 건데. 이런 조무래기 같은 자식 따위 떨궈 내면 그만이다. 한우주는 그냥… 개과천선한 서연준이랑 연애나 하면 된다. 달라진 것은 없다. 나의 목적과 의무는 여전하다.
“내가 오늘 좀 지쳐서 그래……. 너희 집까지 갈 힘이 없거든?”
[그 정도야?]
나는 혹 한우주가 ‘택시 타고 와.’라거나, ‘데리러 갈까?’라고 할까 봐 마음 졸였다. 그러나 한우주는 ‘얼마나 신나게 놀았길래 그래?’ 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는 금방 수긍했다. 그에 아쉬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 또 가로등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아무래도 내가 진짜로 미쳐 가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한우주 너는 얼른 잠이나 자. 내일 약속 있잖아. 침대 가서 눕고, 책 읽지 말고, 핸드폰도 보지 말고 있어.”
[음… 알았어.]
“늦잠 자지 말고. 알았지?!”
[그건 장담 못 하겠어.]
“야! 알람 백 개 맞춰 놔!”
[음….]
한우주와의 속 터지는 대화가 이어졌다. 덕분에 한 톨 남은 기력마저 쭉 빨려 버렸다. 지친 한숨을 내쉬는 순간,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묵직한 먹구름이 빠르게 다가와 희미한 달빛마저 가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핏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바보짓 하나 더 적립했네. 분명 아침엔 알고 있었는데, 정신이 없어 금방 잊고 우산을 안 가져왔다. 가끔 이렇다니까. 이미 아는 사실을 바쁘다, 정신없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지워 버리고. 후폭풍을 그대로 맞는다. 자업자득인 것을 어쩌겠냐. 나는 자조하며, 몰려드는 구름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곧 비가 올 것이 뻔한데, 피하지 않고 무얼 하는지. 괜히 목만 뻐근하다.
[조현우. 조현우?]
“…어?”
[갑자기 말이 없길래.]
“아니, 그냥…. 됐어. 너 얼른 자라니까.”
[잠 안 오는데.]
“말하니까 잠이 안 오지. 전화 끊고 자.”
[너는?]
“나도 이제 자야지. 피곤해.”
[…그래. 그럼 잘 자. 내일 봐.]
“응. 너도 잘 자.”
길고 긴 통화가 드디어 끝났다. 시원섭섭하네. 나는 새카만 하늘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떨궜다.
내일은 한우주랑 서연준 둘의 이벤트가 있는 날이다. 그러니까 얼른 정신 차려야지. 다짐하며 액정을 한참이고 들여다보았다.
톡.
환한 빛을 뿜어 대는 핸드폰 액정 위로 빗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두 방울, 세 방울….
급한 대로 건물 아래로 몸을 피한 채 고민했다. 한우주 얼굴도 심란해서 못 보는 마당에 조현우 집에 가는 건 끔찍이도 싫었다. 직전의 일을 생각하면 허지훈에게 신세 지기도 어려운 처지다.
쏴아아—.
가는 빗줄기가 굵어지고, 촘촘해져 이내 폭포처럼 내렸다. 마른 땅이 금세 젖어 들고 곳곳에 웅덩이가 고였다.
예상한 대로다. 비 한번 참 더럽게 많이 내린다. 속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울려 퍼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고민 끝에 염치를 살짝 내려놓고 전화를 걸었다. 이런 때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엥, 조현우 뭐야. 웬일이냐? 뭐 놓고 갔냐?]
오재영의 경쾌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간간이 강준희의 목소리도 들려 오는 것이 여태 집에 가지 않은 모양이다.
통화를 끝내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우산을 쓴 인영이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빗소리보다도 크게 쏟아지는 잔소리에 나는 그냥 웃어 보였다.
“조현우 왜 이래? 실성했어?!”
“아니, 그냥. 고마워서.”
“새끼, 별게 다….”
나는 조현우가 저지른 일 탓에 절망했고, 난처했다. 그러나 조현우의 인연에게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고, 그 덕에 이곳에서 버티고 있다. 이제는 내 이름 아닌 ‘조현우’로 불리는 것이 익숙하고, 내겐 그저 길 가다 스친 행인 수준에 지나지 않던 오재영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 모든 사실이 우스웠다. 아니, 사실은 우습지 않다. 그러나 우습지 않은 마음은 빗물에 흘려보내는 것이 나았다.
“새끼가 왜 자꾸 웃어…? 너 진짜 어디 아프냐…?”
“……아니?”
“…너 컨디션 좀 괜찮냐?”
“응.”
“그러면 들어가서 게임…할래? 야. 우리 집에 멀미약 있다.”
“어? 뭐?”
나는 오재영의 말에 정말로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민망하긴 한지 왁왁 말을 내뱉던 오재영은 ‘그래. 같이 게임 하자.’라는 한마디에 금방 화를 가라앉혔다.
비가 내리는 긴 밤 동안, 나는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실컷 웃고 즐기며 찌꺼기 같은 생각과 감정을 씻어 내렸다.
그러나 어쩐지 밤을 혼자 보낼 한우주에 대한 걱정만은 머릿속에 돌처럼 단단히 박혀, 날이 밝을 때까지 씻겨 나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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