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9. 화학 작용
가차 없이 빛을 쏘아 대는 모니터 화면에 새벽 내내 시달린 눈이 비명을 질렀다. 언제 잠이 든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재영, 강준희와 방에 처박혀 게임을 실컷 해 대다가 오재영의 형에게 쓴소리를 듣고 얌전히 잠을 청하려 했다. …조금. 아주 조금만 더 하자며, 기어코 다시 게임을 켠 오재영에게 휘말리고 말았지만. 우리는 거의 해가 뜰 때까지 게임을 해 댔다. 몰래 한다고 방 불을 끄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눈이 아프지….
중력에 강하게 저항하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린다. 그리곤 눈썹을 찌푸렸다. 눈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웬 빛이 코앞에서 번쩍여 안구를 공격했다. 도로 눈을 감은 채 꾸물꾸물 상체를 일으켰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헤매던 뇌가 점차 느릿하게 제자리를 찾아 오기 시작했다. 다시금 눈을 뜨자, 이전보다 시야가 훨씬 뚜렷했다.
“이 미친.”
곧장 욕설이 튀어나왔다. 바로 옆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방바닥에서 잠든 오재영이 잠꼬대로 팔을 휘휘 저었다. 기어코 주인을 쫓아내고 침대를 차지한 강준희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눈앞에 떠오른 것을 천천히 살폈다. 부른 적도 없는 알림 창이 홀연히 나타나 새로운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깜짝 퀘스트::두근두근! ‘서연준’ 주말 이벤트 발생!
♥내용: 공략 캐릭터 ‘서연준’과의 주말 이벤트를 무사히 진행합시다.
♥완수 시 보상: ‘소원권’ 당신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립니다.」
……뭐야.
이 게임에 퀘스트 시스템 같은 게 따로 있었던가? 오늘 서연준 이벤트 있는 거야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알림 창까지 띄워서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게다가 뭐, 소원? 이젠 안 속는다. 뭐든 들어줄 것처럼 말해 놓고 이것저것 거르면서 까탈스럽게 굴 거면서.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실패 시 패널티: ‘서연준’루트 삭제
※ 퀘스트 완수 보상인 ‘소원권’을 획득할 경우, 시스템 창 상단에 ‘소원권’버튼이 생성됩니다. 해당 버튼을 터치한 후 바라는 소원을 입력해 주세요. 수령 후 7일 안에 소모하지 않을 시 자동 소멸되오니 주의 바랍니다.
※ 한 번 삭제된 루트는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아?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알림 창을 확인했다.
「♥실패 시 패널티: ‘서연준’루트 삭제」
잠이 확 깼다. 지금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내재된 불안이 만들어 낸 환상인가? 팔을 세게 꼬집어 본다. 미치도록 아프다. 개 같다. 꿈이 아니다.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이건 너무하지 않냐? 시스템 제정신이냐? 서연준만은 뺏어 가지 말라고. 그거 나한테 겨우 하나 남은 도토리라고. 엄동설한을 앞둔 가을에 등산 가서 도토리 싹쓸이해 가는 인간처럼 굴 거냐고. 진짜 미치겠다. 아니, 미쳐선 안 된다. 이러다 진짜 내 도토리 뺏기게 생겼다.
억울해 미쳐 날뛰기 직전인 마음을 겨우겨우 억눌렀다. 좋게 생각해 보자…. 인하성 때처럼 대비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삭제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 발생할 이벤트는 오후 1시경에 점심 식사를 하면서 시작될 텐데.
「5/11 SUN 13:27」
미쳤나. 나 얼마나 오래 잔 거야.
앉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려다 발이 꼬여 몸이 크게 휘청였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악!”
“아? 아. 진짜 미안!”
오재영의 손을 밟아 잠을 깨우고 말았다. 오재영의 비명에 침대 위 강준희까지 잠이 깬 모양이다. 강준희는 작게 욕설을 뱉으며 이불을 정수리까지 끌어 올려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난리 났다.
오재영이 밟힌 손을 어루만지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하씨, 개아파! 조현우 너 뭐 하냐?!”
“아니. 그, 너무 늦게 일어나서. 늦잠 자 버렸어. 나 볼일이….”
“늦잠? 지금 몇 신데? 그까짓 늦잠으로 이렇게 요란하게 굴어!”
“지금… 한 시 반쯤…?”
“……늦게 일어나긴 했네! 욕실 찬장에 새 칫솔 있으니까 그거 써라. 샤워하고 나가든지. 미친. 손 존나 아파.”
저건 무슨 화법이지? 막 성질내면서 알려 줄 건 다 알려 준다. 오재영은 툴툴대며 자리에 도로 누워 버렸다. 얼마 전에 뼈에 금이 가는 고통을 겪은 입장에서 신경이 쓰여 오재영의 손을 유심히 살펴봤다. 겉보기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고마워. 손은 좀 괜찮아? 다쳤어? 아직도 아파?”
“아니. 엄살이었는데.”
“…….”
“나 몸 개튼튼함. 어우, 새끼. 그래도 잠 깰 만큼은 아팠다. 아, 맞다. 수건은 세면대 서랍 첫 번째 칸에 있으니까 새거 꺼내서 써.”
“응….”
…그래. 그렇구나. 멀쩡하다니 다행이다…. 나는 오재영의 욕설 섞인 친절한 안내에 따라 수월하게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벌써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
나는 어리둥절해 한참 동안 눈만 끔뻑였다. 지도에 표시된 한우주와 서연준의 위치를 따라오기는 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가 나왔다.
식당이다. 식당인 건 문제가 안 된다. 원작 이벤트에서도 서연준의 가족과 한우주가 점심 식사를 함께 했었다. 그땐 아마 값이 꽤 나가는, 맛집으로 유명한 소 갈빗집에 갔을 것이다. 땅값 비싼 곳에 세워진 고급 빌딩 어딘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식당의 입구는 일주문 형태를 띠고 있었고, 안쪽으로 예쁘게 꾸며진 정원이 보였다. 기둥 쪽에 가까이 서 기웃거리니, 안쪽 깊은 곳에 건물이 몇 채 보였다. 전부 한옥이다. 단아한 전통 양식의 건물 수 채가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섬세한 배치와 조경이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드라마에서 재벌들이 상견례 할 때 올 것 같은 곳이다. 어쨌든…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마음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용기 내어 들어가도 금방 쫓겨날 것 같다. 내 차림새만 봐도 그렇다. 나는 회색 후드티에 검정색 삼줄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떡하냐, 진짜.’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쯤…. 슬슬 식사 마치고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식사 다음이 뭐였더라. 기존 이벤트랑 장소부터가 달라졌는데 이다음을 생각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간섭할 필요 없었던 거 아니야? 이벤트 망칠 거면 진작 망쳤겠지. 퀘스트 창이 멀쩡한 걸 보니… 아마도 순조롭게….’
식당 앞을 서성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식당 안쪽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그중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닿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서연준이다. 이제 나오려나 봐. 미치겠네. 어떡하지. 여기 계속 서 있다가 ‘어, 우연이네. 안녕.’ 하고 인사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떤 놈이 이런 식당 앞에 우연히 죽치고 있냐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대로 우왕좌왕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이 수상해질 것 같아 급한 대로 문 바로 옆에 있는 소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귀한 시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임 회장님.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실 줄은….”
“하하…. 아닙니다. 마침 나눌 이야기도 있었고, 오랜만에 아들 녀석 이야기도 듣고…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제가 더 감사하고 죄송하지요.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이렇게 반겨 주시니.”
방금 뭔, 누구? …… 임 회장님?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그나저나 부족한 이야기를 들려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자료를 갖추고 제대로 말씀드려야 했는데.”
“그건 따로 미팅을 잡지요. 아니, 음. 서 사장님. 이후로 일정 있으십니까?”
“아! 없습니다. 없지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빼꼼 내밀었다.
“어?”
임 회장님.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임성진, 성운 그룹 회장. 한우주의 아버지가 왜 여기에 있지? 뭐야? 진짜로 상견례라도 한 거야? 사고가 정지했다. 어… 그러니까… 젠장.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지금 나오지?
복작한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우주와 서연준이 저들끼리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한우주의 아버지까지 껴 버린 저 어마어마한 무리를 앞에 두고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솔직히 좀, 넋을 놓고 있던 게 사실이다.
나는 고작 나무 하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마저도 상체를 반쯤 빼 놓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나 보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한우주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자연스레 서연준의 시선 또한 뒤따랐다. 그리고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나는 당황해 완전히 굳어 버렸다.
“…조현우?”
…라고, 한우주가 말한 것 같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이 그랬다.
“현우야?”
……라고, 서연준이 말했겠지.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스르륵… 소나무 뒤로 은폐했다.
“무슨 일이냐?”
거리가 꽤 있는 데도 한우주 아버지의 목소리만은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저 나이쯤 되면 성량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걸까? 쓸데없이 목소리가 크고 위압적이었다. 한우주와 서연준이 무어라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실랑이가 오가고 있다는 건 알겠다. 한우주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한우주. 내게 뭘 숨길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임 회장님. 저, 우주는….”
“부자끼리의 일입니다. 빠져 주시겠습니까.”
설마 지금….
저거 나 때문에 저러는 거냐…?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어 걸음을 옮겨 나무 바깥으로 몸을 완전히 뺐다. 한우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거기서 뭐 해. 도로 들어가.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서연준은 흉부가 부푸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는 녀석이냐?”
한우주의 아버지가 금방 나를 발견했다. 대놓고, 그리고 익숙하게 사람을 깔보는 눈빛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당당해서, 나는 내가 벌레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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