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불쾌함과 약간의 두려움 사이로 의아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한우주… 무슨 일 있었나?’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한우주는 아버지의 물음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슬그머니 내리뜰 뿐이었다.
한우주의 아버지는 인내심이 길지 않았다.
“이럴 때 보면 네 형이 낫지. 그 녀석은 적어도 내 물음에 입을 다무는 일은 없으니.”
“…….”
…역시 이상하다.
아버지를 대하는 한우주의 태도가 원작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우주는 이 게임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제 아버지, 임 회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일 것이다,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는 걸 지독히 싫어했고, 싫은 티를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성질이라도 냈다간 그에 반발하거나 아예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리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임도윤을 언급하며 비교하고, 비아냥거리는 데도 한우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임 회장은 아주, 아주 사소한 반항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침묵 또한 그에게는 분명 용납 못 할 반항으로 여겨질 것이다.
“됐다. 네가 말할 생각이 없다면야.”
정말로 궁금해서 추궁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우주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가 나서, 오기를 부리는 게 분명하다. 다만 제 분노를 아들에게 쏟아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래, 적어도 이 부분은 원작이랑 같네.’
임 회장은 한우주에게만은 마음껏 분노하지 못했다. 분노는 무슨, 한우주의 요구는 그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러니 ‘임 회장은 막내아들, 한우주를 끔찍이 아낀다.’라고 정평이 났지.
그리고 발견한 ‘원작과 같은 부분’ 두 번째. 임 회장의 분노는 줏대가 없어 방향을 잘도 바꾸어 댔다. 이제 곧, 임 회장의 분노는 한우주가 아닌 다른 이에게 재앙처럼 닥쳐올 것이다. 그것도, 여기서 가장 힘없고 만만한 이에게…….
‘와, 진짜 괜히 왔나 봐.’
나를 향해 친히 걸어오는 임 회장을 마주하자 후회가 치밀었다. 이게 다 뭐야. 나뿐만 아니라 한우주까지 곤란해졌잖아.
“잠깐….”
한우주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고 한 걸음, 다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멀끔한 구두의 앞코에 젖은 흙이 달라붙었다. 그러나 임 회장은 한우주가 인제 와서 무슨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을 기세였다.
공기 중에 긴장감이 팽배했다. 나는 매체에서 흔히 나오는 중년의 재벌이 서민을 대상으로 저지를 만한 몰상식한 일 100가지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비우려 했다.
…그래! 그냥 포기하자. 포기하고 이 시련을 받아들이자. 적어도 지금 여기 물컵은 없잖아. 물세례 맞을 일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회장님. 그, 사실은… 제 친구예요.”
그때였다. 서연준이 한우주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가, 임 회장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어 갔다. 몹시 사근사근해 듣기 편안한 투였다. 미묘하게 늘어진 말끝과 어절 사이에 설핏 비치는 망설임. 자신을 낮추어 가며 잘못을 토로하고, 은근하게 두려움을 드러낸다. 나는 직감했다. 저 모든 것은… 연기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연기.
“연준이 네 친구라고?”
“네. 친한 친구예요. 같은 학교라서 우주랑도… 음, 얼굴 정도는 알 거예요.”
부실한 변명이었으나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서연준은 임 회장이 무어라 따질 틈을 주지 않았다.
“저 친구랑 오늘 저녁 약속이 있거든요. 아까 잠깐… 만날 장소를 정하다가 저더러 지금 어디냐고 묻길래 그냥, 솔직히 말했던 게…. 장난이었는데, 진짜로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서연준이 임 회장의 앞에서 손짓까지 해 가며 열렬하게 말하다가 끝에는 고개를 툭 떨궜다. 이내 절로 동정심이 일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우주도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상황을 몰라서….”
서연준이 뱉은 말엔 단 한 조각의 진실도 담겨 있지 않았다. 조금만 따지고 들면 금방 거짓이 들통날 정도로 엉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임 회장에게 중요한 건 진실 따위가 아니다. 아들이 제게 부러 반항한 게 아니며, 자신이 모르는 일, 통제 못 할 상황 따위는 없다는 걸 확인하고자 한 것이리라. 서연준은 그 사실을 알고 꼬리를 바짝 내려 임 회장의 비위를 맞추었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가고, 상황은 허무할 정도로 매끄럽게 풀려 갔다.
덕분에 임 회장이 내게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따져 대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내게 관심 따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하하.’
재주는 서연준이 부렸는데 왜 내 기운이 쭉 빠지냐. 바로 옆 소나무에 무게를 싣고 가만히 몸을 기댔다. 임 회장과의 대화를 마친 서연준이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서연준은 눈썹을 늘어트리고, 곤란한 듯 웃었다.
“…안녕, 현우야.”
***
디링—.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상하관계」
「깜짝 퀘스트 완료! ‘서연준’과의 주말 이벤트 진행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소원권’이 지급되었습니다.」
「’소원권’의 사용은…….」
「…….」
눈앞에 연속해서 떠오른 알림 창을 별 감흥 없이 훑어 내렸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서연준네 부모님과 한우주 아버지의 이후 일정이 정해지고 나서야 이벤트는 끝이 났다.
면목이 없다. 괜히 사서 고생했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이 망할 퀘스트. 망할 시스템. 괜히 사람 불안감 부추겨선 이게 다 뭐야?
‘…됐어. 제일 중요한 건 무사하니까.’
인물 수첩에 제대로 남아 있는 서연준의 프로필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이미 벌어진 일,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곤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곁에 바짝 선 서연준이 작게 속삭였다.
“현우야, 괜찮아?”
“…응? 응. 나야 괜찮지.”
반사적인 대답이었다. 사실은 괜찮지 않다.
한우주와는 안면 정도만 튼, 서연준의 친한 친구. 이후에 서연준과 저녁 약속이 있음. 약속 시간을 못 기다리고 서연준을 찾아 고급 한식당까지 쫓아온 놈.
서연준의 능숙한 처세에 상황을 무사히 넘긴 건 천만다행이다. 서연준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비록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상한 친구 놈이 되어 버린 데다가 꼼짝없이 서연준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지만….
인제 와서 모른 척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정쩡하게 무리에 껴 있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애들은 먼저 귀가시키죠. 기사를 불렀으니 금방 올 겁니다.”
서연준의 부모님과 임 회장은 사무실에 가서 저들끼리 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모양이었다. 말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여 정신이 없다. 서연준네 가족만 모아 놓아도 몇 명이냐.
조부모님은 자리하지 않으신 것 같고, 부모님에, 서연준에, 그 밑에 동생이 셋이나….
‘…응?’
동생이 셋…. 서연준 동생이 분명 세 명이었지? 여자애 두 명이랑, 남자애 한 명. 아닌가?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나?
‘그럴 리가. 이름까지 전부 기억나는데.’
서연준이 장남, 저기서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는 애가 중학생인 서연아, 바닥에 쪼그려 있는 애가 아마… 이제 초등학교 4학년쯤 된 서연재. 그리고 또 한 명이… 어… 한 명이…?
“저, 연준아.”
“응?”
“그……. 저번에 네가 도서실에서 얘기했잖아. 네 막냇동생….”
“응. 연서가 왜?”
나는 고민하다가 연재를 가리키며 물었다.
“쟤…가 연서인가?”
“아니? 쟤는 연재야. 연서는 이제 7살 됐어.”
“아, 아하. 그럼 오늘 연서는 같이 안 왔어?”
“응? 같이 왔지. 연아가 데리고 있을 텐데.”
말하며 주변을 살피던 서연준의 눈이 침착함을 잃어 갔다.
“……연준아?”
“잠깐, 잠깐만.”
서연준이 연재와 연아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걸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설마….
“조현우. 넌 어쩌다가 여길….”
온기가 어깨에 와 닿았다. 한우주다. 아버지 곁을 드디어 빠져나왔나 보다. 한우주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굳이 내 입으로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금방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서연준은 제 부모님과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한우주에게 맡겨진 연준의 동생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리고 임 회장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은 차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검지로 팔뚝을 두드리는 손길에 지루함이 묻어났다.
“서 사장님, 우 이사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예. 그러면 차에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임 회장이 차 문을 열었다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리곤 오만상을 찌푸렸다. 한우주를 본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한우주를 말이다. 임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우주. 오 분 안에 정 기사님이 오실 거다. 괜한 곳으로 샐 생각 말고 얌전히 집에 들어가.”
임 회장은 대답도 듣지 않고 차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서연준의 부모님도 임 회장과 같은 차에 올랐다.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출발한 차는 금방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황당하고 의아했다. 도대체 뭐야? 한우주와 서연준, 연준의 동생들, 그리고 나만이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버렸다. 연준이네 부모님… 정말로 가 버린 건가?
사실은 그다지 심각한 상황이 아닌 걸까? 그도 그럴 것이 동생들을 달래는 연준의 어조는 부드러웠고, 입가에는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막내가 사라진 것치고 지나치게 침착했다.
곧, 차가 한 대 더 도착했다. 임 회장이 말한 ‘정 기사’가 온 모양이었다. 한우주는 볼일이 남아 돌아가지 않겠다 말했다. 그에 연준의 동생들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서연준이 익숙하게 동생들을 달랬다.
“연재야, 연아야. 집에 먼저 가 있어. 연서가 집에 가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너희가 문 열고 맞아 줘야지.”
일곱 살짜리가 여기서 어떻게 집까지 가.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연재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면서도 제 형의 말을 믿고 차에 올랐다. 문제는 연아였다.
“내가 애야? 그런 말에 속게!”
“연아야. 목소리 좀 낮춰. 연재가 들으면 어떡해.”
“…들으면 뭐?”
“불안해할 거 아니야. 부탁할게, 연아야. 네가 집에 가서 연재 좀 돌봐 줘.”
“…….”
“연재 걱정 많은 거 알잖아…. 응? 도착하면 문자 남기고.”
연아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고마워, 연아야.”
마침내 연아까지 차에 들어섰다. 연아는 차창을 내려 연준을 향해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연서 찾으면 바로 연락해야 해. 미안해, 오빠. 내가 제대로 못 봐서… 연서가.”
자신을 탓하는 말에 물기가 어렸다.
“연아야. 네 잘못 아니야.”
“……그렇지만.”
“네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 연재랑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알았지?”
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골랐다. 이내 차가 출발했다. 어른들도, 연준의 동생들도 떠났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연준아?”
죽 평정을 유지했던 연준의 표정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괜찮냐는 말을 건네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눈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알림 창 탓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망할, 이게 진짜. 이젠 소리도 없이 막 나오냐?
「::깜짝 퀘스트::‘서연준’ 이벤트 발생!
♥내용: 공략 캐릭터 ‘서연준’의 동생을 찾으세요.
♥완수 시 보상: 알 수 없음.
♥실패 시 패널티: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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