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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86화 (86/150)

86화

분노가 욱하고 차올라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런 미친… 악독한 게임 같으니라고. 이딴 퀘스트 안 줘도 당연히 찾아낼 것이다. 마땅한 일에 보상이니, 패널티니 하며 사람 자극하는 꼴이 참 옹졸하다. 알림 창을 신경질적으로 치워 버렸다. 그리고 연준의 어깨를 붙잡아 약하게 흔들었다.

“연준아.”

“…….”

“서연준!”

서연준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넋을 놓고 있었다. 큰 소리를 낸 뒤에야 초점 잃은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눈동자 위로 어지러이 뒤엉킨 불안이 비쳤다. 인상을 설핏 찌푸리자, 서연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아, 응. 응. 저 현우야, 미안… 우주 너도. 오늘은 내가 아무래도……. 너희는… 너흰 그만 집에 돌아가도 돼.”

…무슨,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데.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무표정하게 자리에 서 있던 한우주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집에 가려거든 벌써 차 타고 갔어. 너 바보야?”

한우주가 질린다는 투로 말했다. 동시에 서연준의 어깨를 움켜쥔 내 손을 가볍게 떼어 놓고는, 연준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몇 번 털어 내기까지 했다. 이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련하게 굴지 좀 마. 이럴 땐 도와 달라고 해야지.”

한우주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 분명 맞는 말인데… 그보다 한우주 방금 뭐 한 거야?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궁금증이 일었다. 내 손에 뭐 묻었나…? 더러운가? 아닌데. 깨끗한데…. 무지 신경 쓰였지만 쓸데없는 물음을 건넬 때가 아니다. 당장에 불필요한 생각은 털어 내자.

……아니, 근데 진짜로. 한우주 뭐 했냐?

‘털어 내라고. 집중 좀 해, 미친놈아.’

스스로를 타박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연서를 찾아야 하는데.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연준아, 연서 최근 사진 가진 거 있어?”

“…응. 있어. 핸드폰 앨범에.”

“연서 사진 좀 한우주랑 나한테 좀 보내 줄래? 그리고 경찰에 실종 신고 좀 부탁할게. 그쪽에서 묻는 거 있으면 잘 대답해 줘. 이건 연준이 네가 해야 돼. 가족이니까.”

“……실종.”

서연준의 안색이 더더욱 파리해졌다. 실종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렇게나 기겁하다니. 아까 동생들이랑 부모님 앞에선 어떻게 그리 침착했던 건지.

“연준아, 연서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야?”

“30분 안 넘었을걸. 식당 건물 나올 때까지만 해도 연아 옆에 있었어.”

아연실색한 서연준 대신 한우주가 대답했다.

“그러면 한우주 네가 식당 안쪽 좀 살필래? 직원분들께도 여쭙고…. 난 이 근방을 찾아볼게. 식당을 나왔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너희 둘 다 핸드폰 소리 켜 놔. 소식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응.”

한우주와 내가 각자 할 일을 정리하는 동안, 서연준은 입에 꿀이라도 잔뜩 문 것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저런 상태로 경찰이랑 제대로 대화는 할 수 있을까.

“연준아, 정신 차려.”

“…….”

힘을 실어 서연준의 팔뚝을 툭툭 쳤다. 시선을 바로 맞추고,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찾을 수 있어.”

연서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약 30분 전. 절망하며 우왕좌왕할 때가 아니다. 지금밖에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바삐 움직여도 모자랄 것이다. 서연준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이야기는 충분히 나눴다. 이제는 정말로 연서를 찾아 나설 때이다.

서둘러 흩어진 뒤에야 작은 후회가 밀려왔다. ‘연준이에게 너무 냉정하게 군 걸까? 달래면서 이야기해도 됐을 텐데.’ 하고, 뒤늦게 떠오른 미안함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야속해도 어쩔 수 없다. 연준이 동생을 아끼는 만큼, 절망해 주저앉을 시간을 주어선 안 됐다. 결국에는 시간 싸움이다. 1분 1초가 귀했다. 조금도 낭비해선 안 된다.

“연서야!”

그렇게 나는 목이 터져라 연서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

두 시간이 지났다. 아직 연서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초조했고, 초조함은 곧 어설픈 화가 되어 서연준의 가족을 향했다. 정확히는 서연준의 부모에게.

‘불안한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역시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서연준의 가정사는 어느 정도 꿰고 있다. 원작 게임의 서연준 루트를 몇 번이고 플레이하며 질리도록 접했으니까. 서연준의 부모님은 임 회장, 그리고 한우주에게까지 절절매곤 했다.

서연준의 부모님은 자수성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끔찍이도 가난한 시절이 있었고, 장남인 서연준, 그리고 어쩌면 둘째인 서연아도 온 가족이 궁핍한 생활에 지쳐 가던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실패를 수없이 거듭해 기적적으로 잡은 기회. 기업의 성장, 그리고 성운 그룹의 계열사로 자리 잡기까지. 그들의 피나는 노력이 담긴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게임 스크립트에 서술된 바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분은 바이오 산업체를 경영하고 계신데, 최근 같은 분야의 기업이 성운 그룹의 계열사로 새로이 편입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서연준 부모님의 기업은 최근 성과가 지지부진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같은 그룹의 바이오 계열사, 한 지붕 아래서 경쟁이 벌어지고 있고 서연준 부모님의 기업이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때에 임 회장과 독대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도 성운 그룹 내부 투자 심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된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그들 밑에는 자식이 넷이나 있지 않은가?

어떤 심정일지 얼추 짐작은 가지만 역시 이해 못하겠다. 보호해야 마땅한 가족이, 어린 자녀가 사라졌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적어도 둘 중 한 분은 남아 있을 수 있지 않아? 아무리 절박함에 이성이 흐려졌다 해도….

[♪——]

요란스러운 음악 소리에 줄줄이 이어지던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서연준」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서를 찾은 걸까?

“여보세요, 연준아?”

[현우야. 너 혹시….]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 몹시도 떨렸다. …아직 못 찾았구나. 두려움이 전파를 타고 전이되는 것만 같다. 이제는 나 역시 서연준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마저 찾아보고 나중에 또 연락하자.’ 따위의 말이 건조하게 오갔다. 특별한 수확은 없었다.

연서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연준의 어머니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와 어머니가 합류한다고 해서 연서가 불쑥 튀어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해가 기울기 시작해 주변이 뉘엿했다. 밤이 되면 더더욱 찾기 어려워질 텐데.

‘식당 안에 없고, 근방에도 없고, 경찰이 탐문수색도 하고 있댔는데. 여기서 뭘 더 해야 하지? 일곱 살짜리가 도대체 어딜….’

혹 놓치고 지나간 장소가 있을까. 어린애가 갈 만한 곳. 아랫입술을 잘근댔다. 시스템 창을 열고, 지도를 열려던 때였다. 못 보던 글씨 석 자가 눈에 띄었다. 날짜와 난이도, 그리고 그 옆에 새겨진 것.

「소원권(1)」

‘…….’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얼결에, 그다지 한 일도 없이 받아 버린 소원권.

기분이 이상하다.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하지 않나? 이벤트를 마치자마자 지급된 소원권, 그리고 사라진 연준의 동생.

‘…무슨, 사람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이 망할 시스템은 정말로 날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축하 파티라도 열어 줘야 할 판이다. 덕분에 기분 아주 더러워졌거든.

시스템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자기혐오가 피어올랐다.

솔직히…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망설여졌다. ‘소원권을 통해 큰 건 못 바라도, 조현우의 기억이라던가, 루트 진행률 같은… 사소하게 도움이 될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친 것이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면서. 아니, 설령 그렇더라도 지금은 써야 할 곳이 분명하잖아.

괜한 미련과 나에 대한 실망감이 깊어지기 전에 얼른 소원권을 터치했다. 시스템의 사족은 전부 넘기고 서둘러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연서의 행방. 서연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고.

디링——.

「승인되었습니다.」

「요청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앞으로 ‘지도’에서 ‘서연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곧장 지도를 열어 확인했다. 의외로 시스템이 준 것은 단발성 정보 따위가 아니었다. 여타 공략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지도 UI에 ‘서연서’ 항목이 추가된 데다가, 연서 형태의 깜찍한 도트 캐릭터가 지도 위에 표기되어 있었다. 나는 안도하며 빠르게 연서의 위치를 훑었다. 다행히 연서는 머지않은 곳에….

……뭐야?

황당함을 뒤로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연준아? 너 어디야? 지금 식당으로 와 봐. 응. 거기 말하는 거 맞아. 너희 점심 먹었던 곳….”

뚝, 말을 마치기 무섭게 통화가 끊겼다. 한우주에게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남기고, 나는 식당을 향해 내달렸다.

***

시스템이 나를 정말 엿 먹이려 했거나,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다. 나는 지도에 표시된 곳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렇게 같은 곳을 한참 동안 헤맨 뒤에야 조그만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타이밍 좋게 도착한 서연준은 온 세상의 근심 걱정을 전부 짊어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쳐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연서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서연준이 고개를 기울였다가, 긴가민가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말 그대로 경악을 했다. 걱정이 분노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서연서!”

서연준의 외침이 거대한 정원에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연서는 식당 정원 한 편에 위치한 팔각 정자의 밑바닥 틈새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연서는 몸을 일으키다가 정자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너… 이리 나와. 얼른! 사람들이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자, 잠깐. 연준아….”

이 게임 전 루트를 통틀어서 서연준이 이렇게 격정적으로 구는 것은 처음 봤다. 서연준의 눈가가 붉었다. 울분에 못 이겨 당장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다 깬 일곱 살짜리 동생은 제게 다정했던 오빠가 버럭 소리를 질러 대니 마냥 무서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줄행랑을 칠 리가 없지.

“연서, 너 거기 안 서!”

그대로 달음박질치려는 서연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여, 연준아.”

“비켜 줘. 연서가….”

“…진정 좀 해 봐.”

“진정?”

서연준이 말을 멈추고 제 이마를 짚었다.

“아…. 내가 방금, 진짜….”

“어? 응? 어어?”

잠깐만, 이건 좀. 잠깐.

서연준 진짜로 울어? 아니, 미친, 이게 다 뭐야.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저러다 온몸의 수분을 다 쏟아 내고 탈진할까 두렵다.

‘미치겠네. 일단 연서가….’

지도를 흘긋 살폈다. 연서는 정원 어딘가에 또 숨은 모양인지, 바로 근처에서 움직임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연준아, 일단 내가 연서 데려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서연준은 숨을 죽이고, 고개를 떨군 채로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서연준이 겪었을 마음고생과 부담감을 가늠하려니 동정심이 일었지만, 곤란한 건 별개의 일이었다.

“너 이러다 숨 넘어가겠다. 곧 연서 볼 건데 계속 울고 있으려고?”

고개를 가로젓는 행동에 자그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서연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저 팔이나 몇 번 두드리고, 시선을 맞춘 뒤에 위로 몇 마디쯤 건넬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연서를 데리러 가야지.

서연준의 팔 위로 손을 올리자, 젖은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이제 정말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건네려던 때였다.

“……너희 거기서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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