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87화 (87/150)

87화

“아, 한….”

반가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침 잘됐다. 나보다는 한우주가 서연준을 달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

“연서 찾았다며. 연서는 어디에 두고.”

한우주는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말투는 침착했으나 목소리에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 길게 내뱉는 한숨에는 여유가 없었다.

…기분 안 좋아 보인다.

한우주도 지쳤을 만하지. 연락받고 왔더니 찾았다던 연서는 안 보이고…. 어쩌면 나랑 서연준 둘이 농땡이라도 피우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조금, 아니 많이 억울한데.

“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뭔데.”

“놀고 있던 거 아니라고. 이제 막 가려고 했어.”

나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서연준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서연준은 눈동자만 굴려 한우주와 나를 번갈아 살피다가, 입꼬리를 올려 살며시 웃어 보였다. 흐르는 눈물을 채 멈추지도 못하고선.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내가 서연준에게서 떨어지자 한우주의 굳은 표정이 미미하게 풀렸다.

그 순간 번뜩,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했다.

…미안하다. 내가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한우주. 연준이 좀 부탁할게.”

“뭐?”

“연준이가 마음고생이 심했어. 네가 잘 좀 봐줘. 알았지? 연서는 내가 데려온다?”

“야, 잠깐….”

서둘러 둘과의 거리를 벌리고 갈 길을 향했다. 분명 원작에서는 주말 점심 이벤트 이후, 서연준과 한우주 둘끼리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벤트를 마치자마자 연서가 사라졌으니 둘이 함께 있을 틈이 없었지.

거기에 무슨, 조현우라는 놈이 볼때마다 서연준 옆에 붙어 있으니 심기 불편할 만하다.

‘귀엽긴. 경계할 필요 없는데.’

나는 서연준에게 흑심따위 먼지 한 톨만큼도 없고, 앞으로도 가질 일 없으니까.

…이대로 한우주와 서연준의 관계가 건전하게 흘러가면 좋으련만. 집착하고 감금하는 일 없이 말이다. 혀를 차며 지도를 따라 온 정원의 구석 자리를 살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라곤 몇 그루의 나무와, 눈앞의 원목 벤치 하나 뿐이다. 나는 손으로 벤치 등받이를 짚어 뒤편을 쭉 훑었다.

“히익.”

“엇, 연서야!”

이번에는 틈새를 살피겠다고 땅과 얼굴을 밀착시킬 필요가 없었다. 연서는 벤치 뒤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불안한 것인지 몸을 잘게 떠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연서를 달래고자 했다.

“연서야. 그만 돌아가야지. 연준이가 너 많이 걱정하고 있어.”

“…우리 오빠 알아요?”

“응. 네 오빠 친구야.”

“나 이제 연준 오빠 싫어요. 그러니까 오빠 친구도 싫어.”

연서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이어 말했다.

“게다가 오빠가 낯선 사람 말 믿지 말랬는데. 그리고 우리 오빤 이렇게 생긴 친구 없어요.”

“이렇게 생긴……. 나 나빠 보여?”

“아니요. 근데 사람 겉만 보고 판단하는 거 아니랬어요.”

맞는 말이다. 조현우는 순진한 얼굴로 스토킹이나 하고 다녔으니까….

“으음… 그러면 내 소개 먼저 해야겠다. 그렇지?”

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비죽이며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난 연준이랑 친구 된 지 얼마 안 됐어. 연서 너랑은 이번에 처음 보는 거겠다. 내 이름은… 조현우고, 연준이랑 같은 학교 다녀. 그, 연서 네가 연준이한테 화난 건 알겠지만….”

연서가 내 말을 끊고 들었다.

“나를 어떻게 알고 있어요?”

“…연준이가 네 얘기 많이 했거든. 사진도 보여 주고.”

“증거 있어요?”

“응…?”

“조현…? 오빠가 우리 오빠랑 친구라는 증거 있어요?”

연서는 당당한 태도로 증거를 요구하며 꾸물꾸물, 흙바닥 위에서 엉덩이를 끌어 내게서 멀어졌다.

‘이걸 어쩌지.’

연서가 이렇게까지 나를 경계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뭐? 증거? 그런 게 있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핸드폰 보여 줄까? 나랑 연준이랑 대화 나눈 게 있거든. 자, 여기.”

액정을 조심스레 들이밀자 연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은 통하고 있는 걸까? 어디 보자, 서연준의 친구라는 증거가 될 만한 게 또 뭐가 있지?

“우주 오빠!”

“그래, 맞아. 나도 우주 알아…. 응?”

연서의 시선이 나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곧, 표정이 단번에 밝아져선 벌떡 일어나 나를 지나쳐 달려가 버렸다. …연서가 달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우주는 꽤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서연준은 어쩌고 여기에…. 아니, 그보다 언제 온 거지? 인기척도 안 내고.

“연서 너 먼지투성이네. 앞으로는 연서 말고 먼지라고 불러야겠어.”

“아니야!”

한우주는 짓궃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한우주의 품에 뛰어드는 연서. 그리고 연서를 안아 드는 한우주의 모습이 몹시도 익숙하고 편안해 보여서, 나는 멍하니 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지금 엄청 더러워.”

“씻으면 되는걸.”

“옷도 지저분하고.”

“빨면 깨끗해져.”

둘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원작 게임을 하며 연서와 한우주가 꽤 친하다는 묘사를 글로 읽은 적은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우주의 말대로, 연서는 몇 시간 동안 흙바닥을 구른 탓에 곱게 차려입은 옷이 온통 엉망이었다. 그런 연서를 껴안은 한우주 역시 멀쩡하지는 못했다. 고급 정장에 흙먼지가 사정없이 달라붙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래? 깨끗해지려면 얼른 집에 가야겠네.”

“…….”

맑게 퍼지던 웃음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가서 네 가족도 보고.”

“…싫어.”

“가족들 보기 싫어?”

“싫어.”

연서는 이제 내려 달라는 의사를 몸으로 강력히 피력했다. 필사의 버둥거림이 무색할 정도로 한우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곧, 한우주가 덤덤히 내뱉은 말에 연서의 소소한 반항은 막을 내렸다.

“그래. 싫을 만도 하네.”

한우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로 앞 벤치에 연서를 앉혔다. 자연스레 자신도 그 옆에 앉으며 투정을 부렸다.

“오늘 진짜 짜증났지. 솔직히 밥도 맛없었어. 나물 반찬이 몇 개였더라. 연서 나물 싫어하잖아.”

연서의 뚱한 표정이 살살 풀렸다.

“맞아…. 우주 오빠. 나 고기인 줄 알고 가지 씹었어. 그래서 연준 오빠한테 휴지 달랬거든? 근데 내 말 무시했어. 그리고 아까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

“연준이가 잘못했네. 왜 그렇게 나쁘게 굴었대? 내가 혼내 줄까?”

“아니! 아니…. 아닌가? 심하게 혼내진 말구… 조금만?”

대답을 조심스레 번복하자 한우주가 웃으며 말했다.

“연서야. 우리 오늘 짜증났던 거 하나씩 말해 볼래?”

“으음… 음….”

“나는 연서한테 이야기하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아서.”

“…그래? 그러면 내가… 들어 줄게.”

“고마워.”

돌덩이같이 딱딱하게 굳은 연서의 마음을 능숙히 풀어내는 모습에 감탄했다. 누가 보면 한우주한테도 동생 여럿 있는 줄 알겠다.

‘……어쨌든, 나는 끼지 않는 편이 나아 보이네.’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조용히 자리라도 피할 생각이었다. 한우주는 그걸 또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뭐 해? 너도 이리 와서 앉아.”

“나?! 나는….”

한우주를 따라 연서도 뒤를 돌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아니, 둘끼리 단란하게 이야기 잘 나누고 있었으면서. 왜….

“저 사람이 자기가 연준 오빠 친구랬어.”

연서는 아직도 내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훑어보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한우주에게 시선으로 도움을 청했다. 한우주가 ‘친구 맞아.’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될 것이다.

“그래? 그랬던가….”

아, 한우주! 속으로 성질을 냈다. 그러나 나의 같잖은 분노는 금방 힘을 잃고 녹아내리고 말았다.

“연준이는 모르겠고, 나랑 친한 사이긴 해.”

“우주 오빠랑? 친해?”

한우주가 눈을 접어 가며 웃었다.

“응. 많이 친하지.”

***

“연서야!”

길고 긴 대화 끝에 한우주는 연서를 달래고 가족의 품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했고, 연서의 소식을 들은 부모님까지 부리나케 달려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참이었다. 눈물 젖은 사과가 끊임없이 오갔다.

한우주와 나는 서연준의 가족과 거리를 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아 되레 뇌가 작동을 멈춘 모양이다.

“조현우. 피곤해?”

…정정한다. 멍하니 있던 건 나뿐이었다. 한우주의 시선은 쭉 나를 향해 있었다. 이제야 눈치챈 것이 이상할 정도로. 멋쩍어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한우주가 눈꺼풀을 천천히 내렸다. 긴 속눈썹이 따라 흔들렸다.

“나는 피곤한데… 꽤 많이….”

졸음이 가득 담겨 평소보다 더욱 나긋한 목소리였다. ‘수고 많았어.’, ‘이제 집 가서 쉬어.’같이 떠오르는 말은 많았지만,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우주의 고개가 내게 가까이 기울었다. 툭, 어깨 위로 기분 좋은 묵직함이 내려앉았다.

“한우주?”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잠시만….”

불편하게 왜 서서 이러고 있어. 어깨 딱딱할 텐데…. 그리고 자꾸 숨이 닿아서 간지럽다. 솔직히 밀어내고 싶은데 못 밀어내겠다. 방금 한우주와 연서가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자꾸만 멤돌았다.

한우주가 의도한 대로, 연서는 오늘 자신이 느낀 불만과 불안, 서러움 따위의 감정을 전부 토로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임에도 전혀 즐겁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바짝 긴장해선 임 회장의 비위를 맞추기에 바쁘니….

일곱 살 연서에게 부모님은 가장 의지하는 어른이자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일 것이다. 그런 두 분이 평소와는 다르게 구는 것이 이상했다.

어른들의 사정을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오늘 가족들이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쯤은 연서도 눈치로 대강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아저씨 진짜 싫어. 무서워. 다신 안 봤으면 좋겠어.

한우주의 아버지, 임 회장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필사적으로 연서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나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임 회장이 여러모로 문제 있는 인간인 건 맞지만, 한우주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해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싫어할 만하지. 나도 그 사람… 정말 싫어해.

곧, 한우주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어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