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88화 (88/150)

88화

-그런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연서 네 말대로 또 볼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연서에게 맞춰 주기 위해, 연서를 달래 주려 하는 말 따위가 아니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 체념이 가득 묻어났다.

그 순간의 한우주가 지은 표정과 내뱉은 말과 어조, 가라앉은 눈빛이 나의 가슴에 먹먹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 한우주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아주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작은 움직임마저 없었다.

그런 한우주가 연서와 겹쳐 보였다. 제 서운함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함을 못 이기고 달아나 숨은 곳에서 지쳐 잠든 모습이….

우스운 생각이다. 한우주가 도망쳐 온 곳이 내 어깨, 나의 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한우주.”

…어찌 됐든, 나는 한우주가 괜찮은지 궁금했다.

“한우주? 너 진짜 서서 자는 거야…?”

연서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속상함을 털어 낼 수 있는 안식처가 있다. 살면서 우여곡절을 겪을지언정 연서와 그 가족들이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연서는 괜찮겠지.

그러면 한우주는? 아버지에게 맞서 화내는 것조차 하지 않는 한우주의 마음은 언제, 누구에게 풀어낼 수 있을까?

한 손을 들어 한우주를 향해 뻗었다. 손끝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감겨 왔다.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적절한 방법을 몰랐다. 혹 나의 말과 행동이 한우주에게 어설픈 동정으로 느껴질까 봐, 그래서 되레 상처를 주게 될까 두려웠다.

…한우주가 신경 쓰인다. 한우주 앞에서는 별것이 다 조심스럽다. 어째서일까? 이유도 모른 채 남의 마음을 가늠하는 자신이 유난스럽게 느껴져 조금 민망했다.

“현우야.”

서연준이 나를 부름과 동시에 한우주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야? 내가 부를 때는 반응 한 번 않더니. 어이가 없네.

서연준은 그새 연서, 그리고 다른 가족과의 대화를 무사히 마친 모양이다.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흘긋하는 시선 끝에는 여태 내게 기대어 있는 한우주가 있었다. …아, 미친. 슬슬 떼어 내야겠다. 나는 한우주를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야…. 이제 좀 떨어져 봐.”

“힘들어서 안 돼.”

“다른 데 기대든가…. 무겁고 불편하다고.”

꿈쩍도 안 한다. 내가 뭐라 하든 요지부동일 것 같다. 유치한 생떼를 부리는 걸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근데 나 진짜 팔 저리려고 하는데?

“한우주!”

“우주야. 현우 곤란해하잖아.”

서연준이 웃으며 한우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한우주가 한숨을 푹 내쉬며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한우주 뭐냐? 서연준 말만 듣고? 무어라 따질 틈도 없이 서연준이 빠르게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한 것 같아서…. 고마워, 현우야. 너 아니었으면 정말….”

서연준은 고개를 숙여 가며 감사 인사를 전해 왔다. 그 진중한 태도에 잔뜩 당황한 나는 떠오르는 말을 마구 뱉고 말았다.

“응? 아, 아니. 뭘. 결국 식당 안에 있던 거잖아. 연서가 어디 멀리 간 게 아니라 다행이었지. 그러니까… 나 없이도 금방 찾았을 거야. 연서가 잠들어서 그렇지, 깨어나면 금방 직원분이…….”

서연준이 자세를 고쳐 바로 서며 웃었다. 나 말실수했나? 이놈의 입 좀 어떻게 하고 싶다. 서연준은 내가 민망해하는 것을 금방 알고는, 애써 웃음기를 지워 가며 전보다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랬으면 지금보다 훨씬 늦게 찾았을 테고, 우리 가족들 애타서 전부 기절했을 거야.”

“…어, 응. 그러게. 기절 안 하셔서 다행이다.”

‘응. 다행이지.’라고 대답하는 서연준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그러다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웃어라. 절망에 빠져 시들거리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이 훨씬 낫다.

그런데 어째 나랑 서연준만 대화하는 것 같다. 한우주는 피곤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림이 이상하다. 여기선 서연준이랑 한우주 너희 둘이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거 안 되겠다.

“…그, 우주! 연서가 나를 엄청나게 경계해서 내 말은 안 듣더라고. 한우주가 잘 달랜 덕에 겨우 데려온 거야.”

나는 한우주의 팔을 질질 끌어당겨 내 앞에 세워 두곤, 한우주의 업적을 죽 늘어놓을 작정을 했다.

“맞아. 연서가 우주를 많이 좋아해.”

“어쩐지 둘이 죽이 척척 맞던데? 만약 나 혼자였으면 한 시간 걸려도 못 달랬을걸.”

“그랬구나…. 한우주. 매번 고마워.”

서연준이 기꺼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우주는 몸이 뻐근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제 목덜미를 몇 번 주무르다가 답했다.

“뭘. 별거 안 했어. 아, 너 연서한테 소리지르지 마. 엄청 놀랐던데.”

“그건… 이따가 다시 사과해야겠다.”

“그래. 꼭 해라.”

“…….”

뭐야?

대화가 이게 끝이야? 장난해? 이게 어떻게 미연시 주인공과 공략 캐릭터의 대화일 수 있어? 주말 식사 이벤트까지 별일 없이 마쳤잖아. 그런데 이 분위기 뭔데.

…내가 옆에 있어서 그런가? 실은 내게 저리 좀 가 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 먼저 가 볼 테니. 둘이 할 이야기 있으면 편하게….”

“응? 나랑 한우주랑? 할 얘기 없는데?”

“그런 거 없어.”

한우주와 서연준이 거의 동시에 답했다. 서로에게 할 말이 없다는 주장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친구와 그 이상의 경계를 넘을 것인지, 말 것인지. 설레는 고민 끝에 용기가 부족해 수줍게 내뱉는 ‘나는… 할 말 없어.’ 따위가 아니다. 지나치게 친구답고, 지나치게 털털한 이 분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이상하네. 할 말이 없을 리가… 없는데…?’

너흰 도대체 뭐가 문제냐. 미처 고민을 마치기도 전에 서연준이 나의 기분을 더 깊은 곳으로 끌어 내렸다.

“현우야. 이후에 일정 있어?”

“…그건 왜?”

“식사라도 같이 할까 싶어서. 말로만 고맙다고 하고 넘기기 불편해서 그래.”

아니, 그런 말은 나 말고 한우주한테 하면 안 될까? 한우주도 큰일 했다니까?

“나, 나만?”

“…우주도 시간 되면 가고?”

우주‘도’가 아니라고, 이 자식아…. 서연준이 흘끗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사실 우리 부모님이 현우 너 보고 싶어 하셔. 연서 찾아 줘서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그런데 부모님까지 껴서 식사하기엔 좀… 부담스럽지?”

“…….”

정신이 멍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사실 지금까지 뭐가 잘 풀린 적이 없긴 한데, 이건… 좀, 아주 많이 잘못됐다. 집 나가려는 정신을 붙잡고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식사도 제안은 고마운데, 오늘은 좀….”

“서연준 너는 가족이랑 있어. 연서랑도 얘기할 거 남았을 거 아니야.”

어물쩍대는 내가 답답했는지, 한우주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리곤 턱짓을 하며 서연준의 뒤쪽을 가리켰다.

“네 가족들 너 기다리는 거 같은데. 얼른 집 가서 연아랑 연재도 봐야지. 아니야?”

“…그렇네. 내가 마음이 너무 앞섰나 봐. 정말로 고마워서 그랬어. 부담스러웠다면 미안.”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한우주를 쳐다봤다. 진짜냐? 서연준을 이대로 보내겠다고? 서연준은 나와 눈을 맞추며 웃고는, 뒤돌아 자리를 떠나려 했다.

“서연준.”

한우주가 서연준을 불러 멈춰 세웠다. 그에 아주 잠깐, ‘그래. 설마하니 저 둘이 이런 식으로 사랑 한 점 없이 주말을 보내겠어? 뭐라도 더 있겠지.’ 하며 안심할 뻔했다.

“조현우한테 식당 위치 알려 준 거, 나야. 저녁에 약속 있는 것도.”

“…….”

“아무튼 고마웠어. 아버지가 알면 곤란할 뻔했으니까.”

무슨 소리야. 네가 언제 나한테 식당 위치를 알려 줬어. 왜 없는 저녁 약속을 혼자 만들고 있는 건데? 경악스러운 언사에 입이 떡 벌어졌다.

서연준은 몸을 살짝 틀어 나와 한우주를 한 번씩 보고는,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학교에서 보자.”

“잘 가.”

건조한 인사가 오갔다. 나는 말이 안 나와 손만 흔들었다. 곧, 서연준의 부모님이 다가와 집까지 태워 주겠다고 하셨지만, 한우주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나는 서연준이 ‘부모님이 현우 너 보고 싶어 하셔.’라고 한 게 빈말이 아니었음을 통감했다. 나를 향한 지대한 관심이 마구 쏟아졌기 때문이다. 서연준의 부모님은 내게 안부와 이름, 서연준과의 관계 따위를 물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셨다. 다행스럽게도 이 부담스러운 대화는 금방 끝을 맺었다. 연서가 얼른 집에 가고 싶다며 졸라 댄 덕분이다.

그렇게 나는 서연준과 그 가족이 탄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온전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정말로 끝이다. 서연준도, 서연준의 가족도 떠났다.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고, 밤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한우주와 조금 걸으며 외진 곳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하루가 길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한숨 소리에 익숙한 알림음이 섞여 들었다.

디링-.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투명한 선」

「깜짝 퀘스트 완료! ‘서연준’의 동생을 무사히 찾았습니다.」

「도전 과제 달성! ‘플레이어’에게 다음의 호칭을 지급합니다: ‘서연준의 은인’」

「‘서연준’은 앞으로 당신을 ‘은인’으로 인식합니다. ‘플레이어’의 부탁이라면 ‘서연준’의 의지에 따라 무엇이든 기꺼이 들어줄 거예요.」

「축하합니다! 다음의 보상을 지급합니다.」

「NEW 기능 오픈! ‘서연준: 나 사실은….’」

「‘서연준’ 인물 수첩에서 ‘관계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연준: 관계도’를 통해 ‘서연준’이 주변 인물에게 가진 생각을 간략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안내 사항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