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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89화 (89/150)

89화

새로 보는 문장, 새로운 기능, 무슨 도전 과제에 호칭까지. 떠오른 글씨를 훑어 내리고 나서야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연서 찾는 거 퀘스트였지. 그것도 보상이 걸려 있는.

‘이건 뭐, 등장인물이랑 배경만 얼추 같지. 다른 게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는데….’

관계도 역시 원작에서는 한 번도 접한 적 없었다. 이런 게 있었으면 게임 참 쉽게 했겠다. 어쨌든 주변인에 관한 생각, 그것도 서연준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니. 양심은 조금 아프지만, 지금의 내겐 마다하지 못할 만큼 달콤한 기능이다.

한우주는 정말로 피곤했던 것인지, 옆에서 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시스템 창을 켠 뒤 서연준의 인물 수첩을 열었다.

있다. 새로운 버튼. 「관계도」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걸 보면 한우주와 서연준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겠지.

비장한 마음으로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눈앞에 서연준의 주변인 이름이 가득 적힌 창이 떠올랐다. 한우주는 물론이고 조현우도 적혀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우주의 이름 옆에 무어라 쓰여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한 단어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한우주: 싸가지」

…네?

뭐라고?

이…이럴 리가 없다. 침착하고 다시 읽어 보자.

「한우주: 요즘 들어 활기와 싸가지를 바꿔 먹은 것 같다. 성격이 이전보다 고약해져 대하기 피곤하다. 그래도 우주는 오랜 친구지…. 좋게 생각하자…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을 때를 돌이켜 보면 지금이 훨씬 나으니까.」

‘…….’

진짜로 ‘싸가지’라고 적혀 있는 거야…? 성격이 고약해…?

연인, 혹은 그 직전의 단계에 있는 관계에서 상대방을 저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적어도 서연준과 한우주의 관계성에서는 아닐 것 같은데? 혹, 문장에 암호를 숨겨 놨을지도 몰라.

이쯤 되면 희망조차 안 된다. 부질없는 허상이다. 관계도 창을 죽어라 노려보았지만, 암호는 무슨 눈만 아팠다.

‘썅.’

지금껏 스쳐 간 수많은 신호, 옆에서 시끄럽게 울려 대는 경고를 무시하고 행복 회로나 돌려 온 것에 대한 업보가 닥쳐왔다. 내가 눈치를 분쇄기에 갈아 넣었다고 쳐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겠다.

아마도… 서연준은 한우주에게 별 감정이 없다. 그냥… 정말… 오래된 친구로 대할 뿐이다.

말도 안 돼. 충신에게 칼을 맞은 기분이다.

‘아니, 아니지. 아닌가….’

사실… 솔직히. 내심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지금껏 둘 사이에서 사랑 혹은 그 비슷한 감정의 기류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니, 느낀 적이 있던가? 그렇다면 그건 내 망상이고 가짜 기류였던 걸까.

하지만… 봐, 둘이 저번 주에 내내 붙어 다니고, 오늘은 부모님 껴서 같이 식사까지 했잖아…. 이벤트… 진행했잖아, 너희….

왜…?

너희 왜… 사랑 안 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데이터가 잘못된 건 아닐까? 의구심이 일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서연준의 동생들 옆에 잔뜩 적힌 주접을 보면 아예 틀린 데이터일 리는 없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눈동자가 한곳을 향했다.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조현우: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 전보다 더 신경이 쓰인다. 잘 보이고 싶다. …그런데 못난 모습만 잔뜩 보여 준 것 같다. 창피해.」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귀엽……. 귀엽다…? 귀엽다가 무슨 뜻으로 쓰는 단어더라?’

어린아이, 혹은 반려동물을 봤을 때나 하는 말 아니었나? 내가 한국어를 잘못 배운 걸까? 아니다. 이래 봬도 나는 모의고사에서 국어 2등급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무슨 상관이냐고? 나도 모른다. 그냥… 몰라….

그래, 이게 서연준 마음이라고. 음… 조현우가 귀엽다고? 눈이 삐었나, 아니면 서연준 얘 요즘 좀 힘든가? 아니면… 내가 너무 애처럼 굴었나? 서연준의 동생들 항목에 빠짐없이 ‘귀엽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나를 동생처럼 여기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지?

몸속 어딘가의 부품이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쨌든 상황이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상황을 바로 돌리고 싶다.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익숙한 가요의 가사 몇 줄이 멋대로 머릿속에 흘러왔다. 덕분에 내 처지가 배로 처량하게 느껴졌다.

부정과 회피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러다 옆에서 앓는 소리가 나 얼핏 정신을 차렸다. 한우주는 졸음에 잠겨 가물가물한 눈으로 내 쪽을 보며 인상을 썼다.

“시끄러워….”

“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너 말고. 네 핸드폰….”

나는 그제야 바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메시지 알림음이 몇 번이고 울렸다.

“아. 미안.”

“…뭘. 어차피 곧 일어나야 했네.”

한우주가 창밖에 시선을 두곤 말했다. 어느새 집에 가까워졌나 보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렇게 절망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까. 와… 드디어 생산적인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이 기특해 죽겠네.

하하… 허탈하게 웃었다. 한우주가 날 이상한 놈 보듯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하고 핸드폰이나 확인했다. 늘 그렇듯 활기찬 단톡방, 허지훈의 걱정 어린 메시지, 그리고….

「서연준: 현우야 집에 잘 들어갔어?」

「서연준: 난 방금 도착했어. 연서도 잘 있고.」

「서연준: 오늘 정말 고마웠어!」

「서연준: 다음에 정말 밥이라도 사게 해줘.」

「서연준: 많이 피곤하겠다. 푹 쉬고 내일 보자!」

‘…….’

끝에는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까지 보냈다. 겨우 다잡은 마음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전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괜히 눈에 밟힌다. 예를 들면… ‘나를 대하는 말투가 왜 이렇게 상냥하지?’ 같은 것…. 좀 덜 친한 친구라고 해도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서연준 성격에는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어영부영 넘기기엔 망할, 그… 귀…귀엽? 미친. 하…. 그거 때문에….

“하, 한우주.”

“왜?”

“…혹시 너 연락 온 거 있어? 연…준이한테.”

“서연준?”

“응.”

한우주가 핸드폰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안도했다.

“연준이가 뭐래?”

핸드폰을 심드렁히 들여다보던 한우주는 엄지로 액정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참견했나? 사적인 부분을 건드린 걸까?’ 걱정하던 차였다. 한우주는 아예 핸드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보여 줬다.

「서연준: 집?」

「한우주: 아니 곧도착」

「서연준: 그래. 오늘 고마웠어. 쉬어.」

「한우주: 어 너도」

‘…….’

이 무미건조한 대화는 뭐냐? 울고 싶어졌다.

“이게 다야?”

“이게 다인데.”

“왜 이거뿐이야?”

“뭐라고?”

“…아니야.”

한우주가 핸드폰을 거두어 가고, 택시 안에는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내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한우주는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쳐다봤다. 그리고 정말로 집에 거의 다 왔을 즈음, 한마디 던졌다.

“서연준이 너한테도 연락했나 보네.”

‘연락했어?’도 아니고, ‘연락했나 보네.’라니. 아니라고 잡아떼기 참 애매하게 묻는다. …아니지, 굳이 잡아뗄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문자 몇 통일 뿐인데.

“어… 응. 쉬라고 하던데….”

“음, 그래.”

건조한 대답이 떨어지고 택시가 멈췄다. 거의 하루 만에 맞이하는 한우주의 집. 높디높은 고급 오피스텔을 마주하자, 또 다른 골칫거리가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

‘아, 조현우 이놈 때문에 내가 진짜….’

한우주의 집에 들어서는 것에 저항감이 들었다. 조현우가 한우주를 스토킹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라 괴롭다.

게다가 꼭 조현우 때문이 아니어도 ‘슬슬 얹혀사는 신세에서 벗어날 때도 됐지. 팔도 다 나았고, 자취방도 있는데… 조현우가 한우주의 집에서 지내는 건 자연스럽지 못하니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놈의 스토킹 덕에 ‘조현우가 한우주의 집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넘어서서 미친 짓이 되어 버린 게 문제지.

이곳에 온 이래로 거의 매일 심신이 시달려 힘들었지만, 이번 주말은 정도가 심하다. 하루는 조현우 때문에, 하루는 서연준과 한우주의 관계로 속이 썩어 가니 마음 잠잠할 날이 없다.

“뭐 해. 안 와?”

“…지금 가.”

오피스텔 입구에 선 한우주가 나를 재촉했다. 천근만근 한 발걸음을 옮겨 겨우 그 뒤를 따랐다. 어쨌든 지금 당장 한우주의 집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우주한테 제대로 인사도 해야 하고…. 집에 혼자 있기 싫으니 머무르라는 식의 말을 몇 번이고 하지 않았던가. 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눠야겠지.

어찌 되었든, 나는 한우주의 집을 떠나는 것이 맞다.

…단지 그게 오늘이 아닐 뿐이다.

“많이 피곤한가 봐.”

‘17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안내음이 한우주의 말소리와 섞여 들었다.

“그냥… 조금. 오늘 많이 움직이긴 했으니까.”

한우주의 기다란 손가락이 도어 록의 숫자 버튼 위에서 움직였다. ‘001017.’

‘그러고 보니 한우주 생일이 10월 17이었던가?’

얼마 전 방에서 읽은 책, 한우주 어머니의 흔적을 상기했다. 집 비밀번호를 자기 생일로 해 놓다니. 가만 보면 은근히 단순한 구석이 있다. 건물 보안 자체가 철저해서 집 비밀번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 걸지도.

‘그러고 보니 조현우 자취방 비밀번호도 001017이었지.’

조현우는 한우주 집 비밀번호를 알고 맞춰 둔 걸까? 아니면 그냥 한우주가 좋아서, 한우주 생일로 해 둔 걸까? 떠오른 궁금증은 내 기분만 더럽혔다.

“아, 맞아.”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에 다다르고 어두운 집에 불을 밝혔다. 내내 앞장서 걷기만 하던 한우주가 뒤돌며 나와 마주 섰다. 서연준, 한우주, 조현우, 스토킹. 지긋지긋한 상념이 한우주의 목소리에 기꺼이 물러났다.

“너한테 물어볼 거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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