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나한테? 뭔데?”
“별건 아니고.”
한우주가 입가를 가리며 하품을 했다. 아까부터 쭉 피곤에 절은 상태인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얼른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생리적인 눈물에 한우주의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조현우 너, 오늘 식당에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어?”
“그땐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둘러대긴 했는데….”
줄곧 말이 없기에 어영부영 넘어가는가 싶었다. …넘어가기는 무슨, 내 희망 사항일 뿐이었구나.
“서연준도 나도 딱히… 뭘 알려 준 적은 없잖아. 네가 알아서 온 거지.”
“…….”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피가 메마르는 듯했다. 안 그래도 조현우가 이전에 벌인 짓 때문에 싱숭생숭한 마음에 가시가 콕콕 박혀 왔다. 나야 갑작스럽게 퀘스트를 받고 시스템을 활용해 찾아갔을 뿐이지만…. 한우주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적 시스템을 배제하고 봤을 때 오늘 나의 행보는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은가. 솔직히 스토킹을 의심해도 할 말이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하지. 거짓말 따위 하기 싫고 잘할 자신도 없다. 그렇지만 해야만 한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어도 모자랄 상황에 나는 그만 한우주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왜 질린 얼굴이야?”
한우주는 목적지도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내 시선을 따라 굳이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추궁하는 거 아니고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좀 놀라기도 해서. 널 거기서 볼 줄은 몰랐으니까.”
“…놀라게 해서 미안.”
“됐어. 잠깐 그러고 만 거지, 얼굴 보니까 반갑던데. 게다가….”
말을 멈추고 눈을 두어 번 끔뻑이는 모습에 또 다시 눈을 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고작 몇 초가 길게 느껴졌다. 곧,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나보다는 네가 더 놀랐을 것 같더라.”
“…내가?”
“어. 우리 아버지 때문에.”
“아….”
“미안. 거기서 내가 말렸다간 더 난리 칠 게 뻔해서.”
한우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나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한우주는 오늘 유독 자주 쓸쓸해 보였다. 서연준과 그 가족, 자신의 아버지까지.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나는 그런 한우주의 모습이 싫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 사과하는 것도 어쩐지… 싫다.
“…난 괜찮아. 네 잘못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해.”
“글쎄. 아버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과 안 할 테니까? 나라도 대신 해야지.”
“그러지 마. 그럴 필요 없어.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진지하게 던진 말에 한우주가 웃었다. 쟨 또 뭐가 웃겨서 저러지…? 의아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전보다 편해 보여 되레 보기 좋았다.
그보다는 아직 한우주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게 또 얼굴에 티가 나기라도 한 걸까?
“음… 너무 신경 쓰지 마.”
“뭘?”
“아까 내가 물어본 거. 말하기 싫은 거면….”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건데. 가슴이 답답하다. 한우주가 가벼운 투로 이어 말했다.
“굳이 내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는 거니까.”
…뭐지?
익숙하게 와닿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비슷한 대화를 저번에도 한 것 같은데…. 아닌가?
자리에 멀뚱히 선 채 잠시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그 사이 한우주는 이만 피곤해서 쉬어야겠다며, 짧은 인사를 건네고 계단으로 향했다. 한 칸, 두 칸, 어쩌면 세 칸 그 이상까지…. 한우주가 계단을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불현듯 어떤 순간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내 입으로 같은 말을 한우주에게 한 적이 있다. 그 망할 윤태현에게 교무실에서 부모 없이 큰 애들이니 뭐니, 하는 망언을 들었던 날. 그 이후, 한우주가 윤태현과 있었던 일을 물었을 때 신경이 날카로워 뱉은 말이었다.
-내가 꼭 너한테 뭐든 털어놓아야 해?
…가슴이 철렁했다.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 말 한마디를 속에 새겨 둬 오늘의 일을 더 묻지 않겠다니. 한우주 얘 진짜 헛똑똑이 아니야? 그때랑 지금이랑은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한우주!”
그때의 일은 나 홀로 겪은 것이다. 한우주와는 큰 관계없는 별개의 일. 그러니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
반면에 오늘은 어떤가?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알려 주지도 않은 장소에 멋대로 찾아간 거잖아. 거기서 다른 볼일을 본 것도 아니고… 슬그머니 무리에 합류하지를 않나.
엄연히 한우주 본인과 관련이 있는 일이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인지, 왜 온 것인지 궁금한 게 당연하고,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의심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한우주는 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사과와 싫으면 물음에 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나 한다. 이게 말이 되냐? 혹시라도 내가 이상한 수를 써서 나쁜 마음으로 찾아간 거면 어쩔 건데? 게다가 실제로 조현우는… 한우주의 스토커란 말이다.
만약 진짜 조현우가 한우주의 곁에 있었다면. 그놈이 제가 한 일을 한우주에게 들켰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니라 조현우였다면….
‘……그렇더라도 한우주는 비슷하게 반응했겠지.’
환장하겠다. 다시 생각해도 한우주는 제 신변에 조금, 아니 지금보다 아주 많이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한우주는 나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고 계단에 서 있었다. 난간 너머의 한우주를 올려다본다. 마음이 초조했다. 마구잡이로 떠올라 투박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그중 몇 가지가 막을 새 없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말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너한테 뭘 숨기려는 게 아니라….”
한우주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오늘 찾아간 데 이상한 의도는 없었어.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아, 씨… 이걸 뭐라고 말해야… 미치겠다, 진짜.”
“…조현우?”
이제는 날것의 말이 막 나온다. 망했다. 이상한 의도는 없었다고 굳이 이야기하는 거 진짜 수상하다. 한우주는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우주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땅이나 쳐다봤다. 와중에도 한번 터진 입은 도통 멈출 생각을 않았다.
“제대로 말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저번에… 윤태현 일도. 거짓말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얘기라 그랬어. 네가 그냥, 몰랐으면 해서 그런 건데….”
필사적이었다. 간절할수록 애쓰게 되고, 애쓸수록 속내가 드러나는 법이다. 밝히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전부. 어쩌면 나는 지금 선택지를 잘못 고른 걸지도 모른다.
한우주가 나의 행동에 대해 캐묻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대충 넘어가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결코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뭐라도 말해 주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크게 작용했다.
욱해서 내뱉은 한마디에 마땅한 물음을 포기해 버린다. 가족에 대한 분노도, 나에 대한 의구심도 전부 묻어 둔다. 익숙함인지, 버릇인지. 아니면 그냥 편해서 몸에 익은 태도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그런 한우주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적어도 나로 인해 한우주가 제 당연한 욕구를 등한시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한우주는 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내 앞에 섰다. 절로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솔직히 무섭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 곧 떨어질 한우주의 말, 그에 응해야 하는 것까지.
한우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욕설보다도 침묵이 배로 무섭다.
왜 말이 없지? 화났나…. 나 이제 쫓겨나나…. 어차피 곧 나가야 했어……. 체념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쩐 일인지 한우주는 나의 한쪽 손끝을 슬며시 잡기만 했다. 몹시 약하고 조심스러워 손을 잡았다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고개를 들어 한우주를 살폈다. 평소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한우주?”
“응.”
대답도 멀쩡히 잘하고….
“너 뭐 해…?”
“그냥….”
한우주는 뜸을 들이며 남의 손이나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잘 자라는 인사를 안 한 것 같아서.”
“…그게 다야?”
“응.”
…정말 그게 다라고? 그럴 수가… 있나? 혹시 내 말을 못 들었나?
묻고 싶은 건 많았다. 뭘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라 조용히 있기로 했다.
‘아니, 그것보다 이거 좀….’
조금… 그렇지 않나…?
손바닥을 은근하게 훑고 지나가는 한우주의 하얗고 긴 손가락, 얽힐 듯 말 듯 닿았다 떨어지는 손. 기분이 이상했다. 그만하라고 떼어 놓으려다가 한우주의 얼굴을 보고 포기했다. 한우주는 노곤함에 잠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시답잖은 행위에 집중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손장난이 즐거운가…?
‘그래, 뭐… 손이 닳는 것도 아니고. 네 멋대로 해라.’
딱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우주의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아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저, 한우주가 갑자기… 손가락 끝으로 손목을 긁어서. 미친, 이게 무슨, 뭔 느낌이야. 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 방금 뭐 했어?”
“왜?”
“너… 아, 아니다. 아니야. 호, 혹시 나한테 더 할 말 있어?”
“아니.”
“그러면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 피곤하다면서?”
한우주는 맑은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왠지 민망해서 더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 뒤로는 그냥… 한우주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손님 방에 들어가 멀거니 서 있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 문득 치미는 엉뚱한 욕구를 해소하고자 침대에 뛰어들었다.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한우주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타 버렸다. 쟨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지? 도저히 모르겠는데. 아악, 짜증이 나.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소리나 몇 번 질렀다. 그러다 한순간에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듯이 침대에 엎어져 생각했다.
‘나가겠다고… 언제 말하지.’
한우주의 집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게 맞는 일이라 깔끔히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한우주에게 이야기할 순간을 상상하면 속이 턱 막혔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피곤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야만 했다. 이 지독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자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뒤로 베개에 머리를 몇 번 더 박았으나, 더럽게 푹신해서 안락하기만 했다.
길게 뱉은 한숨에 짙은 감정이 실렸다. 온갖 것이 섞이고 또 섞여서 원형이 어땠는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정체불명의 감정이.
푹, 한숨을 또 내쉬었다.
「System: 6주 차의 플레이를 평가합니다.」
「랭크: C, 공략 캐릭터와의 관계 진전에 분발을 요합니다.」
「랭크가 C 이상으로, 경고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경고 3회 누적 시 난이도가 하향 조정됩니다.」
「경고: 1/3」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