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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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맞이한 평일은 평소와 같은 듯 같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고작 일주일 새에 겪은 변화가 제법 되었다. 덕분에 나는 이전보다 더 머리 아픈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느냐?
첫 번째로, 우리 반 담임이 정말로 학교를 떠났다. 졸지에 공석이 될 뻔한 담임 자리를 윤태현이 살신성인해 메꾸었다. …나를 제외한 학교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아니꼬워 죽겠다. 아직까지 눈에 거슬리거나 불쾌한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윤태현은 새로이 추가된 업무에 적응하며 수업을 준비하는 것만으로 바빠 보였다. 평생 저렇게 일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두 번째. 허지훈이 이전보다 나를 더욱 열렬히 챙기기 시작했다. 종종 나의 상태를 물어보고, 조현우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한다. 게다가 지난 일주일의 패턴이 지금까지 이어져, 점심은 허지훈과 오재영, 강준희와 먹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차라리 다행인 일이다. 그 이유는… 세 번째와 이어진다.
그래, 그놈의 세 번째. 서연준이 이전보다 우리 반에 자주 찾아온다. 이전 같았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서연준과 한우주는 반드시 연애할 것이다.’라는 이름의 콩깍지를 벗기고 보니, 서연준 이 녀석…. 한우주 때문이 아니라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서연준과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허지훈 무리와 점심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게 더 조현우답기도 하고….
게다가 사실은… 나는 아직 서연준을 포기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한우주랑 함께 점심을 먹다가 눈도 맞고 입도 맞췄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연준이 아니면 남는 게… 임도윤과 윤태현, 그리고 지금까지 이벤트 한번 발생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뿐이지 않은가.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한우주와 서연준이 서로 칠색 팔색 하는 것도 아니잖아. 친한 친구쯤은 되니까 아직 가능성이 있다. 있을 것이다.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변화는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수요일 오전, 조례 때 중간고사 성적표가 배부되고 진로 및 학부모 상담에 대한 안내가 이어졌다. 나는 윤태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 아니, 조현우의 성적표나 열심히 구경했다.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렇게 시험을 막 쳐 본 건 처음이다. 심지어 한 과목은 찍기가 처참히 망해 한 자릿수 점수가 나왔다!
마냥 신기했다. 조금 신난 것도 같다. 누구 한 명 붙잡고 ‘야, 이거 봐. 나 9점 맞았어. 신기하지 않냐?’ 하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 냈다. 그러면 정말… 미친놈처럼 보일까 봐….
아무튼 나는 내 점수를 구경하느라 주변이 어수선한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몇 교시 쉬는 시간이었더라? 어김없이 찾아온 서연준을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문으로 향했다. 서연준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현우야?”
“어, 응. 무, 무슨 일이야.”
“어디 가?”
“그…….”
서연준이 말 걸기 전에 얼른 나갔어야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게….”
뻘쭘하게 자리에 도로 앉고 나서야 ‘화장실’이라는 좋은 변명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 안태원 이거 진짜 멍청이 아니야? 나도 모르게 내쉰 한숨은 다행스럽게도 한우주가 던진 말에 가려졌다.
“서연준. 너 요즘 할 일 없나 보다.”
“응?”
“…왜 이렇게 자주 와?”
“좀 자주 올 수도 있지. 내가 귀찮아?”
“귀찮지.”
“와, 한우주 너무하네.”
그러게, 너무하다. 서연준에게 쌀쌀맞게 구는 한우주를 보고 마음이 천 갈래로 찢어지던 때였다.
“현우야.”
“……응.”
서연준이 나를 부르기에 부러 퉁명스레 답했다. 관계도에서 ‘귀엽다.’라는 단어를 본 뒤로, 나는 서연준 앞에서 귀여움과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예의 없게 눈도 안 마주치고, 창밖의 운동장이나 보며 턱을 괴었다.
그런데 웬, 서연준은 내가 시험을 못 봐서 시무룩한 줄 알았나 보다. 왜 못 봤다고 확신을 하지? 기분 나쁠 뻔했다. 내 책상 위에서 전시회라도 하듯이 버젓이 놓인 성적표를 보기 전까지는.
서연준은 등까지 도닥여 가며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괜찮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성적… 올릴 수 있어. 도와줄게.”
“어? 아니, 나는….”
“왜. 조현우 성적이 어떤데?”
뒷자리에 앉은 한우주가 내 팔을 쿡쿡 찔러 댔다. 한쪽에선 등 도닥이고, 한쪽에선 팔 찌르고. 두 사람이 에워싸니 자리가 좁아 갑갑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덕분에 진심이 담긴 신경질이 나왔다.
“아, 좀! 왜들 이래! 그래, 나 시험 망쳤어. 20면체 주사위 구해서 몇 번 굴려 봐. 그 안에 내 점수 다 있을 거니까…!”
“…….”
서연준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네 점수가 죄다 20점 이하라고?”
한우주가 굳이 한 번 더 물었다. 나를 놀리려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인상만 조금 찌푸리고 말자, 한우주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등수는 얼마나 나오는데?”
“야, 한우주….”
서연준이 한우주를 말리고 들었다. 나는 말로 설명할 기운이 없어 성적표를 아예 한우주에게 건넸다. 성적은 별 문젯거리가 안 된다. 내 문제는 한우주 너다. 연애 안 하는 미연시 주인공.
성적표를 죽 훑어본 한우주가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서연준도 내심 궁금했던 것인지, 한우주 옆에서 성적표를 흘끔대다가 헛숨을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둘이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며 헛된 만족감을 품었다. 연애적으로 아무런 의미 없는 친구끼리의 접촉….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곧, 한우주가 고개를 들고 시선이 마주쳤다.
“너 이 성적으로 대학 갈 수 있어?”
“한우주. 너 좀 조용히 해 봐.”
“아니, 조현우가 자기 입으로 대학 간다고 말했다고.”
“그러니까 조용히 좀 하라니까?”
“조현우. 너 시험을 도대체….”
“한우주! 잠깐만 다, 닥…쳐 보라고!”
…나는 한마디도 안 했다. 내 성적을 따지려 드는 한우주와 내 눈치를 살피며 한우주의 언행을 수습하려는 서연준을 구경하기만 했다. 상황이 조금 웃기긴 한데… 쩔쩔매는 서연준이 안쓰러워 한마디 얹었다.
“대학… 간다고 한 적 없는데…?”
물론 나는 웬만하면 대학에 갈 것이다. ‘내’가 말이다. 죽 쒀서 개 줄 일 있나. 조현우 몸으로 아등바등하며 성적에 매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솔직히 지금 받은 성적이나, 조현우의 기존 성적이나 비슷할 것이다. 남의 몸으로 성적을 이따위로 받았네, 하며 양심에 찔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나는 그저 조현우가 해 온 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니까.
한우주의 눈빛에 불만이 잔뜩 어렸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중간고사를 치르기 전에 한우주랑 대학, 진로 따위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긴 하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한우주가 내게 대학에 갈 것이냐 물었고, 나는 조현우의 상황에 맞추어 대답했을 것이다.
-못 가지 않을까?
-왜?
-대학을 아무나 가나…. 돈 있고 성적 돼야 가지.
-그러니까, 갈 수 있으면 가고 싶다?
-그럴걸…?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 가겠다 한 적이 없는데. 돈도 없고, 성적도 안 되잖아. 공부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대학 안 가겠다고 대답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 한우주는 내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군다. 못마땅한 얼굴로 말없이 책상 서랍을 뒤적이다가 종이 한 장을 꺼내 올려 둔다. 그 일련의 행동에서 은근한 짜증이 묻어났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어떤 오해인지는 몰라도 한우주가 삐치기 직전인 것 같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려던 때였다.
앞서 말한 ‘네 번째 변화’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뒷문이 열리고, 누군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한우주의 책상을 사납게 내리쳤다.
“야.”
목소리를 듣고도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야… 이 시기에, 이런 식으로 등장할 리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고개를 들고 얼굴을 확인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헛숨을 들이켰다. 나의 존재를 눈치챈 상대의 시선이 내 쪽으로 옮겨 왔다. 찰나의 순간, 눈이 마주쳤다.
……바로 얼마 전에 비슷한 걸 느껴 본 적 있다. 마치 내가 벌레가 된 것만 같은 기분. 이런 구석은 제 아버지를 아주 빼다 박았다.
임도윤은 금방 내게서 눈길을 거두곤 뒷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우주. 나와.”
용건조차 밝히지 않은 명령조의 말이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저조한 한우주는 턱을 괸 채로 임도윤을 노려봤다. 둘 사이에 불꽃이 튀는 듯했다.
“저… 도윤이 형? 오랜만이네요.”
“어. 연준아. 미안한데 인사는 나중에 하자.”
서연준이 가운데서 중재하려 들었지만 어림없었다.
“내 말 안 들리냐? 나오라고. 아니면 여기서 얘기할까?”
“…또 뭐가 불안해서 이래? 왜. 아버지가 내 이름 들먹이면서 성질이라도 부렸어?”
“이 새끼가….”
“애초에 잘 좀 했으면 됐잖아. 나 같은 놈이랑 비교당하는 게 그렇게 싫으면….”
한우주는 안 그래도 날 선 임도윤의 성질을 박박 긁어 댔다. 이대로 그냥 뒀다간 금방 난장판이 벌어질 게 뻔했다. 나는 뒤돌아 한우주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야, 한우주….”
어둡게 가라앉은 한우주의 시선이 제 팔을 향했다가, 이내 내게로 안착했다. 미처 말을 건네기도 전에 한우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며시 내 손을 떼어 내곤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임도윤, 나랑 한우주 사이를 오해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역겨워 죽겠다는 눈으로 나를 죽 훑고는, 혀를 차며 성난 걸음으로 한우주를 따라나섰다.
‘방금 뭐가 지나갔지…?’
당혹감에 시선이 방황했다. 그러다 문득, 한우주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가 눈에 띄었다. 서연준은 한우주와 임도윤을 따라 복도로 나갈지, 말지 망설이는 듯하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종이에 시선이 갔나 보다.
한우주의 성적표다. 지금 성적표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럴 때가 아닌데.
……내 눈이 잘못됐나?
어… 한우주….
성적이 왜 이러지…? 석차 옆에 쓰인 한 자리 숫자가 참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학급 석차: 1/26
전교 석차: 5/264」
‘……뭐야?’
한우주가 왜… 시험을 봤지? 이럴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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