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정확히 나의 생각과 같은 것을 서연준이 말로 뱉었다. 한우주가 이 성적을 받았다는 건 시험지를 풀었다는 거고, 정말로 시험공부를 했다는 것인데….
‘……왜?’
시험 그까짓 거 다 의미 없다는 식으로 굴었잖아. 성적 따위 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보듯 관심조차 없던 녀석이 무슨 심경의 변화로…….
한우주가 왜 시험지를 풀었는가? 그건… 모르겠다. 아니, 설마… 싶은 게 하나 있긴 한데…. 말도 안 되는 가설이고 비약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넘기고 싶다. 그러나 조금 전 나의 처참한 점수에 은근히 열을 냈던 한우주를 상기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한우주 뭐, 나랑 같이 대학 갈 생각이라도 한 거야?
‘에이, 그럴 리가…하하, 하….’
하… 잔뜩 심각해져 이마를 짚었다. 서연준과 한우주의 관계에서 단단히 헛다리를 짚은 이후로 나는 웬만하면 ‘설마’를 그냥 넘기지 않기로 했다. 그래, 만약 이 다소 억지스러운 가설이 사실이라고 치자.
…도대체 왜? 왜 이렇게 나랑 붙어 있고 싶어 하는데?
조현우도 나도, 한우주에게 폐만 끼쳤지 특별히 잘한 일은 없지 않나?
“현우야, 괜찮을 거야.”
“…응?”
서연준이 자못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건네 왔다.
“음… 방금 그 사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고….”
그 사람? 임도윤을 말하는 건가? 서연준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화두를 꺼냈지만,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곤란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서연준은 내가 임도윤이 누구인지, 한우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아무튼 한우주한테 해 끼칠 사람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래?”
“응. 저 형이 사정이 있어서…. 한우주랑 사이가 안 좋긴 한데, 굳이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막아야 할 만큼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을 거야.”
한우주 기분 안 좋아 보였으니, 한우주보다는 도윤이 형이…. 서연준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서연준의 말에 동의한다. 임도윤이 코앞에서 뭐라 떠들어 대든 한우주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냥 임도윤 속만 터지겠지.
나 역시 한우주 걱정은 안 된다. 다소 걱정스러운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임도윤이 왜 한우주를 찾아와 난리를 치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불안해서 저러는 거다. 임도윤이 불안한 게 뭐가 문제냐고?
…그게 임도윤 루트의 핵심이니까.
이 게임의 전 루트를 통틀어, 한우주가 ‘시험을 제대로 치르는’ 장면이 묘사되는 것은 임도윤 루트가 유일하다. 임도윤이 한우주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것은, 아버지에 눈에 띌 만한 일을 안 하기 때문이다. 존재감 내비치는 일 없이 얌전히 오피스텔에 박혀 있는 한우주에게 찾아가 시비를 걸 정도로 한가로운 녀석은 아니다.
그러면 임도윤 루트에서는 어떠한가? 임도윤이 한우주 쫓아다니며 아주 지랄 발광을 하지. 그 이유는 지금과 같다. 집안에서 한우주의 존재감이 커지는 걸 두고 보자니 초조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임도윤 루트에서의 한우주는 임도윤을 부러 도발할 목적으로 시험을 제대로 치른다. 성적뿐만 아니라 생활 태도, 사회 활동의 방향성을 틀어 임 회장이 제게 줄곧 바라던 ‘우수한 아들’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그간 임 회장이 한우주를 고급 오피스텔에 홀로 던져두고 방치하다시피 한 이유와 심리에 대한 건 게임 스크립트에 서술된 적 있다.
「한우주는 제 미래를 스스로 내던진 채 살아갔다. 임 회장은 한우주가 제게 반항하기 위해 일부러 얼간이처럼 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우주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아니, 거둔 척했다. 다른 이, 특히 임도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임 회장은 단 한 순간도 한우주를 무시한 적 없다. 제 아버지의 ‘무시’가 저토록 관대할 리 없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임 회장은 한우주가 제 기준에 걸맞는 ‘제대로 된 삶’을 꾸리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지원할 것이며, 성운 그룹의 미래에 한우주의 자리를 계획할 의사 또한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임도윤은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한우주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까. 한우주는 타고나길 자신보다 우수하고, 아버지 또한 자신보다 한우주를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무튼, 이런 식이면 임도윤이 계속 지랄할 텐데….’
안 그래도 벅찬 상황에 임도윤까지 더해질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미간을 잔뜩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서연준에게는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일러두었다. 거짓말도, 핑계도 아니었다. 어지러운 정신을 깨울 겸 세수라도 하려고 했을 뿐이다.
사실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한우주가 신경 쓰여 찾아가 볼까,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지금 내가 찾아간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혹시라도 임도윤이 한우주를 도발한답시고 ‘저런 게 네 취향이냐.’ 같은 헛소리라도 했다간… 으,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머지않아 수업 종이 칠 터이다.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화장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입구 부근에서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가까운 곳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직접 가서 제발 관심 좀 달라고 빌어 보든지.”
“한우주 좆같은 새끼가 진짜….”
“응. 한우주 그 좆같은 새끼는 아버지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뭘 바라든 상관도 안 한다고. 그냥 얌전히 살고 싶어 하니까 쓸데없는 짓 말고 나만 봐 주세요. 그렇게 전하면 되겠네.”
화장실 바로 앞,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층계참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아, 미친. 임도윤이랑 한우주다. 장난하나? 이런 식으로 마주친다고? ‘그래, 사람이 빠질 때를 알아야지. 이번엔 얌전히 있자.’ 하고 마음 다잡은 지 5분도 안 됐는데?
‘망했다.’
하필 한우주는 이쪽을 등진 채 서 있어 내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대신 임도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안 그래도 약이 잔뜩 오른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야. 아니야. 네가 뭘 생각하든 간에 그거 아니야. 나는 세수가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우연히 동선이 겹쳤을 뿐이란 말이야. 억울함에 속으로만 외쳤다. 그리고 그냥… 태연한 척, 네게 볼일 따위 없다는 어필을 위해 원래의 목적지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임도윤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째 비웃는 모양새다.
“아버지 관심이 필요 없다고…. 그래, 그렇겠네. 이젠 별 이상한 새끼랑 어울리느라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뭐?”
“야. 그 새끼 도대체 뭐냐?”
“할 얘긴 얼추 마친 것 같은데….”
“아니. 내 얘기 안 끝났어. 집안의 기둥이 될 수도 있는 놈이 엉뚱한 데 눈이 팔려 있는데. 방관하는 것도 슬슬 한계거든.”
“갑자기 뭔 개소리야?”
……이럴 줄 알았다.
저 ‘이상한 새끼’는 날 말하는 거겠지. 별 같잖은 걸 갖다 대는 걸 보니 쟤도 참 간절한가 보다. 어떻게든 한우주 좀 긁어 보려고 안달 난 것 같은데… 지금 너 헛다리 제대로 짚은 거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임도윤의 목소리에 기분 나쁜 웃음기가 어렸다.
“옆에 끼고 다니는 거 있잖아. 저번에 네 집에 있던 놈. 역겨울 정도로 애틋해 보이더라?”
“…….”
“야, 한우주.”
“왜.”
“너 게이냐?”
미친놈아. 결국 저 얘길 하냐…? 뜬금없이 친구가 끌려 나와 엮여서는 애틋하니, 게이니 해 대는 상황이 한우주에게는 얼마나 황당할까. 게다가 게이라는 말, 설마 욕으로 하는 건가? 인권과 사회를 굳이 떼어 놓고 봐도 상황이 참 괴상하다. 임도윤 너도 남자 좋아할 수 있어, 인마…. 너는… BL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공략 캐릭터라고….
어이가 없어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나는 화장실 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문을 열면 소리가 날 테고, 한우주가 내가 온 것을 알아 버릴지도 모른다. 최대한 조용히 물러나는 게 나을지, 저 살얼음판에 껴서 뭐라도 하는 게 나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와중에 한우주는 말이 없었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입이 얼어붙었나? 임도윤만 신나서 개소리를 나불거렸다.
“야. 아버지는 아시냐? 네가 누구랑 뭐 하고 지내는지?”
“임도윤.”
“모르지. 아실 리가 있나. 알면 가만히 안 계실 텐데. 안 그래?”
깊은 한숨이 복도에 울렸다. 한우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걸 다 걸고넘어진다. 너 언제 이렇게 추해졌냐.”
“추해? 누가 누굴 보고….”
“네 눈에 그렇게 보였다니 유감이고, 뭐… 딱히 해명할 필요성도 못 느끼겠다.”
“야. 네가 아직 아버지를 모르나 본데….”
임도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무래도 한우주가 알아서 해결할 낌새라, 나는 조심조심 발을 끌어 은근슬쩍 교실에 돌아갈 채비나 했다.
“마음대로 해. 가서 말해 봐. 도대체 뭘 어디까지 상상해서 이 지랄을 떠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심하다 못해 냉혈함이 밴 목소리였다. 소리 없이 조심스레 옮기던 걸음을 멈춘 이유 중 첫 번째는, 그 목소리가 내겐 너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정이 딱해서 좀 어울려 준 것 가지고 아버지가 너처럼 비약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
“……어.”
“…그러니까, 불쌍해서 옆에 좀 있어 줬을 뿐이다?”
아침을 잘못 먹었나. 속이 안 좋다.
마지막에 한우주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마도 긍정했겠지.
확실히 대답했으니 이제 임도윤이 쓸데없는 오해로 한우주를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다행인 일이다. 임도윤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고 봐도 될 테니까. 그러니 안심하고 얼른 교실에 돌아갔으면 됐을 텐데. 왜 괜히 뭉그적거려서는.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차분한 걸음 소리…. 그 소리의 주인을 떠올리자 가슴이 묵직하게 조여 왔다.
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조현우?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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