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우리 중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안다. 내가 일부러 엿들은 것도 아니고, 한우주는 내가 있는 줄 모르고 그런 식으로 말한 거니까…. 아마도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도윤이 귀찮은 일을 벌일까 봐 적당히 둘러댄 거겠지.
‘설령 그게 한우주의 진심이라 해도 문제 될 거 없지 않나.’
만약, 정말로 만약에 한우주가 내게 베푼 수많은 호의가 동정심에서 비롯했을지라도. 여전히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어도 별수 없는 일이다. 덕분에 몸 편하게 지낼 수 있었잖아. 이곳에서 몇 번이고 맞이한 감정적인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한우주의 덕이 크다.
“조현우.”
“……응?”
지나치게 골몰해 있었나 보다. 이름이 불리고 어깨를 붙잡히고 나서야 굼뜬 대답이 나왔다. 겨우 제대로 마주한 한우주의 얼굴은 당혹감에 젖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 나갔다.
“아, 미안.”
“…뭐가.”
한우주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나는 쫓기듯 말을 이어 갔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야. 난 네가 여기 있는 줄도 몰랐어.”
“그런 거 상관 안 해. 그보다….”
한우주의 다급한 목소리가 경쾌한 음률에 파묻혔다. 수업 종이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고, 이내 복도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나는 한우주가 내게 할 말이 있는 걸 알았다.
“종 쳤다. 얼른 들어가자.”
그러나 애써 모른 체하며 뒤돌아 걸음을 서둘렀다. 한우주가 내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깨지더라도 직면하는 것이 속 편한 길인 걸 안다. 두려움은 회피할수록 부풀어 오를 뿐이다. 전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겁쟁이가 되어 갔다. 한우주 앞에서는 특히 그랬다.
***
“야.”
“…….”
“야, 조현우!”
“어, 응. 왜, 왜 그래!”
급식실의 소란함을 가르고도 남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나까지 덩달아 외치듯 대답해 버렸다. 시선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흩어졌다. 오재영은 주변을 신경도 안 쓰고 제 급식판을 가리켰다. 설거지까지 마친 것처럼 말끔했다.
“너는 밥을 먹는 거야, 마는 거야? 날 좀 본받아라!”
“아 존나 귀청 떨어지겠네.”
“뭐, 인마?”
오재영와 강준희의 의미 없는 투덕거림이 또다시 시작됐다. 허지훈이 손바닥으로 한쪽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저것들 또 저러네. 야, 조현우. 밥 다 먹었냐?”
“응.”
“그게 다 먹은 거라고?”
“…으응.”
“뭐… 그래라, 그럼.”
허지훈은 한 손에는 제 급식 판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것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둥절해 허지훈의 뒤를 따르고, 급식실을 나갈 때까지도 오재영과 강준희는 싸우고 있었다. 아까는 분명 시끄럽다고 싸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무슨… 게임 캐릭터 밸런스 패치된 것 가지고 싸운다. 저 둘이 싸우기 시작하면 답이 없으므로 그냥 피하는 게 가장 낫다는 사실을, 허지훈은 너무나 잘 알았다.
“조현우.”
“어?”
“너 한우주랑 무슨 일인데?”
“……뭐?”
오재영과 강준희에 대해서만 잘 아는 게 아닌가 보다. 뭐야, 나 소름 돋았어. 어떻게 안 건데? 허지훈은 혀를 차며 말했다.
“3교시 수업 시간에 한우주랑 같이 들어온 뒤로 쭉 이상하거든, 너.”
…그런 걸 다 관찰하고 있었다고?
“솔직히 내가 눈치 빠른 건 아니고. 존나 티 나는데 모르면 똘추 새끼지. 야. 한우주 그 새끼는 주변에 적 만드는 게 취미냐? 쉬는 시간에 쳐들어온 놈은 또 뭐야?”
쳐들어온 놈…? 임도윤 말하는 건가?
“아, 대답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다. 그냥 그 새끼도 참, 이상한 놈들 잘도 달고 다닌다.”
그 ‘이상한 놈들’에 조현우도 포함되지 않아? 떠오른 생각을 뒤로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이상하다. 내가 한 말이라곤 방금 한 ‘그러게’ 딱 한 마디인데 대화가 죽 이어진 것 같다. 기분이 묘하다. 허지훈 얘 내 마음 읽고 있는 거 아니야?
“뭐, 그런 건 다 됐고… 한우주가 괴롭히냐? 귀찮게 해?”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냐! 진짜야.”
“여태 뜸 들이던 건 뭐였냐. 대답 빠른 거 봐라.”
그야 한우주랑 허지훈이 싸우는 것만큼 피하고 싶은 일은 또 없을 테니까. 고개까지 세차게 저어 가며 부정했다. 허지훈은 되레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무튼 아니면 됐어. 그것보다 너 요즘 팔은 좀 어때.”
“팔… 다친 거? 일상생활에는 지장 없는데. 왜?”
“아니. 너도 슬슬 알바 다시 해야 하지 않냐?”
“아.”
“지금 알바 같이 하는 형 한 명이 영장 받았거든. 조만간 관둘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하는 허지훈은 어쩐지 들뜬 모양새였다. 허지훈은 종종 순박한 아이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아는 형 영장 나온 이야기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곧 입대할 알바생분에 대한 유감을 담아 골똘한 시선을 던졌다. 허지훈은 그걸 또 귀신같이 눈치채곤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타이밍이 좋잖아. 그 형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쨌든, 너 필요하면 사장님한테 미리 얘기해 두겠다고.”
허지훈 눈치 빠른 거 맞는 거 같은데. 아닌가, 조현우 한정인 건가? 실없는 생각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괜찮으려나? 무거운 거 옮겨도 되는지는 모르겠어.”
허지훈은 저번 주부터 지하상가의 서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뭘 한댔더라, 집책이랑 재고 관리한댔나? 아무튼 책을 옮길 일이 꽤 된다고 들었다.
“캐셔 자리 비는 거라 크게 걱정 안 해도 될걸.”
아하, 캐셔. 그거라면 자신 있다. 안 그래도 생활비랑 월세 생각에 막막했는데 잘된 일이다. 허지훈 말마따나 타이밍이 좋다. 흔쾌히 승낙하며 감사를 표하자 허지훈은 도로 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따라서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정도면 미연시가 아니라 그냥… ‘조현우 인생 대신 살아 주기’쯤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생계를 꾸려 가는 동안 한우주가 알아서 연애해 줄까? 물론 내가 옆에 있는다고 연애를 하는 건 또 아니긴 한데….
오후에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한우주와 서연준은 서로에게 마음이 없다. 그런 상황에 한우주의 성적은 비상하고 있고, 임도윤은 난리가 났고. 이러다가 임도윤 루트를 타는 건 아닐까?
‘하… 내가 미친다, 진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중간에 몇 번인가 한우주가 말을 걸었지만, 상황이 따라 주질 않아 제대로 대화 한번 못했다. 갑자기 오재영이 복도에서 날 부르며 날뛰기에 큰일이 난 줄 알고 급히 나갔더니, 대박 난 가챠 자랑을 십 분 동안 들었다. 순간 조현우 행세를 해야 하는 걸 잊고 욕할 뻔한 것을 참느라 혼났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따라 마주치는 선생님마다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성적에 대한 잔소리까지 푸짐하게 얹어 주시더라.
한우주는 처음엔 별 신경 안 쓰는 것 같더니 이내 짜증이 기포처럼 피어오르는 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냄비 속의 끓는 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곧 터질 활화산이었더라. 이런 거 알고 싶지 않았다. 분노의 마그마 활동을 촉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야. 잠깐만. 나 강준희한테 뭐 빌려 놓고 안 돌려줬다.”
“지금 돌려줘야 해?”
“어. 이 새끼 개지랄하네…. 잠깐 기다려 봐.”
함께 복도를 거닐던 허지훈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일행 한 명 없이 자리에 멀뚱히 서 있으니 자연스레 한우주 생각이 났다.
종례를 마치자마자 나는 황망하게 한우주에게 인사를 건넸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허지훈과 교실을 나섰다. 그때 한우주 표정이 어땠더라.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변명하자면 딱히… 한우주를 피하려고 그런 건 아니다. 그저 허지훈이 불 같은 행동력을 발휘해 알바처 사장님께 연락을 넣었고, 생각보다 일찍 답장이 왔고, 영장 나왔다는 형은 예상보다 빨리 알바를 관둘 것 같아서….
……그래서, 얼결에 오늘 허지훈과 함께 서점에 가게 된 것뿐이다. 내 잘못이 있다면 한우주에게 전후 사정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솔직히… 당장 한우주와 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을 내심 다행스럽게 여긴 것 정도.
“뭐, 뭐야.”
복도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구경하던 중 갑작스레 손목이 붙잡혔다. 곧 상대를 확인하곤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멋쩍게 웃었다. 웃었는데… 분위기가… 음….
웃을 때가 아닌가 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손목이 당겨졌다.
“잠깐, 한우주?”
한우주는 대답 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얘 걸음이 원래 이렇게 빨랐나. 한우주가 한 걸음 내디디면 나는 두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힘들다, 놓아 달라는 표현을 할 새도 없었다. 손목을 그러쥔 힘은 뿌리치기 곤란할 정도로 강했다. 한우주가 이토록 내게 강압적으로 군 적이 있던가?
교실 문이 덜컥 열렸다. 불은 꺼져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상과 의자는 죄다 교실 뒤쪽에 옮겨져 있다. 이곳저곳에 안 쓰는 잡동사니 따위가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지금은 안 쓰는, 혹은 창고로 쓰는 교실로 보였다.
아니, 왜 갑자기 이런 곳에….
얼빠진 채 주변을 눈에 담고 있자니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뭔데. 한우주 쟤 뭐 해? 지금 문 잠근 거야?
“하, 한우주?”
“왜.”
“문은 왜…?”
“자꾸 방해받으니까. 짜증 나서”
황당했다. 천천히 내 처지를 돌이켜 보니 어이가 없었다. 갑작스레 끌고 와서는 문까지 잠그고. 한우주 이 새끼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치미는 불만에 문을 열고 나가려 들자, 한우주가 뒤에서 손을 붙잡아 저지했다.
“뭐야, 이거 놔.”
“얘기 좀 해.”
“너 같으면 이런 식으로 끌려온 마당에 대화하고 싶겠냐? 저녁에 얘기해.”
“저녁에는?”
“뭐?”
“저녁에는 안 피할 거냐고.”
이런 식으로 끌려온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억울함이 섞여 들었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내가 언제 널 피했…….”
큰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분명 그랬다. 그랬는데… 나의 분노는 속 빈 강정이었나 보다. 한우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작 그 이유로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던 감정이 잠잠해졌다. 스스로가 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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