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피한 게 아니야? 불러도 눈길 한번 안 줘 놓고….”
한우주가 한숨을 내쉬며 잠긴 목소리를 냈다. 숨결이 목에 닿아 간지럽고 소름이 돋았다.
“……알았으니까 손 좀 놓아 봐.”
“놓으면 나갈 거잖아.”
“안 나가….”
“진짜?”
“진짜로.”
나보다 훨씬 큰 녀석이 떼쓰는 어린애처럼 자꾸만 되묻고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 힘은 또 더럽게 세서 뿌리칠 수도 없다.
“…약속했어.”
한우주는 말하며 순순히 손을 놓았다. 나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뒤돌아 한우주와 마주 섰다. 날 선 감정은 착실히 누그러들고 있었지만, 화난 척이라도 하려고 했다.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만들어진 이 자리가 달가울 리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한우주의 깊은 눈매와 불안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검은 눈동자에 시선이 닿았다. 그러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감정마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는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는 도통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우주는 이내 내게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
나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심각해져 고개를 떨궜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그래, 생각해 보면 미칠 만도 하다. 안 미치면 이상한 거지. 게임 속 세상에 홀로 떨어져서, 별 이상한 놈의 몸에서 지내고, 주변에는 상식을 분실한 인간이 가득하다. 축적된 스트레스로 쓰러질 지경에 다다라 뇌 신경계가 무슨 일이든 벌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딴 순간에 한우주가 귀여워 보일 리 없지….
마른세수를 하며 나의 광기를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온갖 변명거리가 오갔다. 한우주가 이러는 건 본 적 없으니까. 이게 그건가? 반…전 매력?
아니면 그거다. 나는 한우주를 오래 봤잖아. 별 미친놈과 미친 상황에 엮이는 걸 지켜본 입장에서 정이 유독 깊게 든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동정심이 얹어졌고, 그걸 ‘귀엽다.’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지.
‘아하, 그런 거구나.’
이 정도 가설이면 봐 줄 만하다며 혼자 만족했다. 게다가 한우주는 잘생겼잖아. 귀엽고 잘생긴 것에 동요하는 건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성이니까….
“…조현우?”
“아, 응. 그래. 응…. 어… 그러니까….”
한참을 말이 없자 한우주가 의아한 듯 말을 걸어왔다. 그 뒤로 내가 뭐라고 했더라. 별 의미 없는 헛소리에 노력을 기울이다가 힘이 빠지는 바람에, 앉아서 이야기하자는 결론을 냈던 것 같다.
의자는 교실 뒤쪽에 바짝 밀려 나열된 책상들의 비좁은 틈 사이에 껴 있었다. 한우주는 ‘굳이 저 책상을 옮기고 의자를 빼내는 수고로움을 겪고 싶지 않다.’라고, 얼굴에 적어 놓은 것만 같은 표정을 했다. 이쪽도 귀찮기는 매한가지다. 별수 없이 우리는 의자를 포기하고 적당한 곳에 있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허지훈이 나를 찾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지?’ 하는 고민 따위 금방 사라져 버렸다. 아, 나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구나. 먼저 서점에 가 있으라는 답장을 남기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솔직히 조금… 피해 다닌 건 맞아. 한우주 너한테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 그냥, 내 문제야.”
한우주는 내내 조심스럽던 시선을 거두고 미간을 조금 좁혔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까 한우주더러 귀엽니 뭐니, 생각한 뒤로 마음에 여유가 사라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와중에 허지훈에게 연락까지 왔으니 초조함이 극에 달할 수밖에. 내가 온전히 솔직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이 망할 초조함 때문일 것이다.
“사실 네가 날 어떻게 여기든 상관없는 건데.”
“뭐?”
“네 마음이잖아. 내가 너한테 신세 진 게 한두 가지야? 나도 염치라는 게 있지. 겨우 그런 일로 내가 너를….”
“조현우. 진심이야?”
“…….”
“내가 널 어떻게 여기든 상관없다고?”
얼른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관이 없나?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한우주는 고민할 시간 따위 주지 않았다.
“나는 상관 있어. 네가 날 어떻게 여기는지 신경 쓰인다고. 내가 단순히 불쌍해서, 동정심 같은 데 휘말려서 너랑 지내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아니야. 임도윤이랑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확실히 말해 둘게.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거짓 없는 말이 다급하게 쏟아졌다. 한우주는 자신이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너무 긴 이야기라 당장 말로 정리하기 쉽지 않아서,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래,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 홀로 짐작하는 것과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의 무게감은 확실히 달랐다.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다. 동정심 따위가 아니라고, 정말로 원해서 나와 함께했고, 베풀었을 뿐이라고. 한우주가 토로하길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말을 들어 버린 이상, 나는 물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면 왜?”
이전에도 한 번 물은 적이 있던가. 그때의 물음이, 그때의 답이, 부러 가볍게 여기며 묻어 놨던 것이 기어코 싹을 틔워 모습을 드러냈다.
“…동정심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왜 이러느냐니. 뭘 묻고 싶은 거야?”
“네가 나한테 한 일들 전부 다. 보통 호의로는 그렇게까지 안 해.”
많은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이곳에 온 날부터 한우주가 내게 한 말과 행동, 그리고 오늘의 일까지. 대학 이야기를 한 것. 그리고 임도윤에게 부러 거짓말을 한 것.
…그래, 그때 한우주가 한 말이 거짓이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한우주의 가정사를 꿰고 있고, 얼마 전에 임 회장까지 직접 마주친 마당에.
임도윤이 나를 주시하고 도발하다 보면 언젠가는 임 회장의 귀에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들어 갈 것이다. 안 그래도 식당 앞에서 꺼림칙하게 마주친 데다가, 아무것도 없는 녀석이, 아끼는 아들 옆에서 알짱거리는데. 임 회장이 잘도 얌전히 넘어가겠다. 임도윤이 게이니 뭐니, 떠들어 대면 임 회장은 헛소리라 여기면서도 결국엔 확인하려 들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쯤은 간단히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곤란해질까 봐 거짓말을 하는 한우주. 날 계속 옆에 두면 언젠가는 저가 질색하는 아버지와 마찰할 날이 올지 모르는데도 그마저도 감수하는 한우주.
한우주가 내게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는 이유를, 나는….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한우주에게 뭘 물었지? 나 진짜 미쳤나?
한우주는 생각에 잠겨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우주는 앉은 자리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약속. 나 약속 있다고 했잖아. 늦었어. 이만 가 봐야겠다.”
“…아직 대답 못 들었잖아.”
“아니 그냥. 적어도 오해는 풀었잖아. 급한 불은 끈 셈이니까.”
더더욱 가라앉는 한우주의 표정에 변명이 절로 나왔다.
“주, 중요한 약속이야.”
“아르바이트? 허지훈이랑?”뭐야. 어떻게 알았지? 눈을 휘둥글게 뜨자 한우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지훈 목소리가 크더라.”
…아. 교실에서 이야기했지, 참. 민망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반면 한우주는 헛헛한 웃음마저 거두었다. 낯설 정도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오롯이 나만을 담고 있었다.
“떠나려고?”
주어 없이 내던져진 한 마디 물음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금 이 교실을 나갈 것이냐, 따위를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놀라서 눈만 끔뻑거렸다. 그야… 한우주에게 말해야지, 말해야만 하는데. 생각만 하고 차마 내뱉지는 못한 말이 아니던가.
어떻게 된 거지? 한우주가 내 속을 읽었나? 독심술을 부릴 줄 아는 건가? 생각이 엉뚱한 곳을 헛돌았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한우주는 그마저도 알겠다는 듯이 굴었다.
“너무 티 났어.”
“내, 내가 티를 냈다고?”
“그래.”
“언제?”
“…24시간?”
지금 나랑 장난치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한우주를 보면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뭐야? 내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발이 땅에 달라붙은 것만 같다. 한우주는 책상에서 일어나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더러 왜 이러냐고 물었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무난하게 넘길 방법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저번에 한 번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잊었어?”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났다. 이 상황을 위험으로 간주한 자율 신경계가… 망할, 다 집어치워.
“좋으니까.”
마침내 떨어진 말이 심판처럼 느껴졌다.
“현우 너랑 있는 게 좋아서 그랬어.”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다. 모든 생각이 지워지고, 떠오른 짧은 말 하나만이 크게 부풀어 갔다.
…기어이, 기어이 이렇게.
싫은 순간이든, 피하고 싶은 순간이든 기어이 오고야 만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허탈했다. 한우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네가 함께 있어 좋아야 할 사람은 내가, 조현우가 아니라고.
차라리 조현우가 저지른 만행을 전부 털어놓으면, 그러면 정이 떨어져서라도 나를 내보내려 들지 않을까? 이럴 땐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왜 또 그러기는 싫은 건데? 한우주가 아예 내게 등 돌리게 되는 것은 싫었다. 상상만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나 역시 한우주에게 지나치게 정을 붙여 버린 탓이다. 진짜 쌍으로 멍청한 짓 하고 있다.
아니, 멍청한 건 나 하나지. 한우주는 아무것도 모를 거 아니야.
“…조현우.”
그놈의 조현우. 나는 언제쯤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적어도 여기선 아닐 것이다. 엔딩을 본 뒤에, 나의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야….
“가지 마.”
이래서 엔딩 볼 수는 있나.
“떠나지 마. 나는….”
“…….”
“네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정말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누를 것이다.
…종료는 무슨. 선택지도 없이 던져진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냥… 멍청한 짓 하나 더 늘리는 거.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때마침 다시 울린 진동 소리가 내게 변명거리를 안겨 줬다.
“나 너무 늦었어.”
당장 한우주를 볼 자신이 없다. 대답할 말 또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뒤돌아 뛰었다. 교실 문을 열고, 또 뛰었다.
나가지 않겠다는 약속은 그렇게 덧없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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