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한참을 뛰고 또 뛰었다. 학교를 완전히 벗어나고, 번화한 거리로 나오고 나서야 자리에 멈추어 설 수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가슴이 조이듯 아팠다. 한우주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가쁜 숨을 고르며 핸드폰을 확인한다. 허지훈에게 온 메시지가 몇 통. …한우주에게서 온 연락은 없다.
…아, 이 폰도 한우주가 준 거지. 불현듯 떠오른 사실에 두통이 몰려왔다.
‘실컷 다 받아 놓고선….’
아니, 억지로 쥐여 주는데 어떻게 해. 내가 뭘 해야 했는데? 뭘 하긴… 애초에 핸드폰을 잃어버리질 말았어야지. 생산성 없는 자문자답이 오갔다. 그러다 문득 핸드폰 케이스 너머에 자리한 것에 시선이 닿았다. 기가 막혔다. 가지런히 펼쳐진 채 마른 살구 꽃잎. 이게 뭐라고 여태 버리질 않고 있었을까.
몸이 붕 뜬 듯이 현실감이 없었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어쩌면 전부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짜 멍청한 생각이다. 나는 내가 한 행동에, 그리고 감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이건 꿈이 아니니까.
다만 내겐 모든 것이 버거웠다. 더는 뭘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터지기 직전인 머리를 애써 비우고 힘 빠진 걸음을 옮기는 것뿐이다.
***
학교 근처에 있는 지하철역 내부에는 상권이 꽤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의류, 잡화, 식당과 편의점… 줄줄이 늘어선 가게를 지나치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처음 보는 이름의 문고 하나가 보였다. 유리로 된 벽 너머로 보이는 작은 공간에는 온갖 책들이 가득했다.
잠시 관찰해 본 결과, 알바생 입장에서는 몹시 탐나는 일터였다. 일단 손님이 적었다. 중대형 문고에 비하면 드나드는 물량도 많지 않을 테고. 팔을 몇 번 돌리며 몸 상태를 파악해 본다. 허지훈이야 내가 무거운 짐 옮길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말했지만…. 소형 사업장이 으레 그렇듯 일하다 보면 업무의 경계가 흐려지기 마련이다. 캐셔 업무를 주로 본다고 할 뿐이지 손이 빌 땐 다른 일도 하게 되겠지. 생각하며 문고 안으로 들어섰다.
“허지훈이! 또, 또 틀렸어. 이게 왜 A 구역에 꽂혀 있는데?”
“몰라요. 헷갈린다고요.”
“새파랗게 젊은 게 알파벳도 못 읽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해 버렸다. 허지훈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할머니 한 분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죽 들어 보니 이곳 사장님이신 것 같다. 심각하게 다투는 것 같지는 않고… 혼내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친한 사람과 가볍게 투덕거리는 수준의 대화였다. 허지훈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얘는 은근히 친화력이 좋단 말이야. 그리 생각하고 넘겼다.
입구에 멀뚱히 서 있던 나를 허지훈이 금방 발견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 뒤로는 속전속결이었다. 더 미룰 것 없이 바로 면접이 치러졌다. 사장님은 조금 전 허지훈에게 보인 투박한 모습과는 다르게 내겐 무척 정중하셨다. 면접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꽤 좋았다. 내가 포스기를 능숙히 다루는 모습까지 확인하시곤 흡족하게 웃으셨으니까.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면접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사장님이 뭐라 하셨더라, 이거 봐. 벌써 다 까먹었네. 예의를 갖춘 상투적인 말들, 몸에 밴 행동. 내가 한 것이라곤 단지 그뿐이다. 정신은 애초에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한우주… 집에 들어갔겠지….’
평소 같았으면 벌써 연락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민망한 말을 하며 장난을 친다거나. 그런데 연락은 무슨, 감감무소식이다. 나한테 화가 많이 난 걸까. 한우주가 앞으로 날 무시하면 어떡하지. 그런 식으로 가 버려서, 내게 실망해서, 앞으로 얼굴조차 보기 싫어한다면. 그러면… 나도 얌전히 한우주를 모른 체하며 지내야 하는 걸까? 상상력이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고개를 틀었다.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 들 즈음 사장님이 건넨 말에 겨우겨우 삽질을 멈췄다.
“영숙 언니가 현우 학생 칭찬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덕분에 귀 아파 죽는 줄 알았지.”
“아… 네?”
모르는 이름이다. 사장님은 전부터 조현우를 알고 있었나…? 허지훈에게 전해 들은 거 말고 뭐가 또 있나 봐. 어리둥절해 있자 허지훈이 잘못 꽂아 둔 책을 정리하다 말고 불평했다.
“사장님. 이런 식으로 사적인 말 하기 있어요? 그것도 면접 중에? 요즘 알바생들 그런 거 싫어하는데? 있던 알바생도 다 도망가겠네.”
사장님이 인상을 구기며 대놓고 귀찮은 티를 내셨다.
“하이고, 저 시끄러운 거. 언니 손주라고 몇 번 봐줬더니 허구한 날 기어올라.”
그대로 허지훈을 무시하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느냐, 내게 물어 오시는데 말문이 턱 막혔다. 이제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기로 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될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치미는 한우주 생각에 선뜻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직 한우주와 제대로 대화를 마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나는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조금만….”
“응? 현우 학생, 뭐라고 했어?”
“조금만… 생각해 보고 연락 드려도 될까요?”
덜컹, 책 수레가 급정거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위로 수북이 쌓인 책들이 휘청였다. 바닥에 떨어져 처참한 꼴을 맞이할 뻔한 것을 허지훈의 민첩한 대처로 겨우 막아 냈다. 애초에 떨어트릴 뻔한 것도 허지훈이지만…. 사장님이 쯧, 혀를 찼다가 다시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일까지 생각해 보고 연락해요. 지훈이 통해서 얘기해도 되고… 아니다. 그냥 내 번호를 줄게.”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조금…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어우, 됐어. 요즘 젊은것들은 사과를 너무 많이 해. 고민 좀 하는 게 어디 나쁜 건가?”
사장님이 질린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어진 말에는 장난기가 담뿍 담겨 있었다.
“내가 뭐, 현우 학생만 목 빼고 기다린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사이에 다른 알바생 구해도 너무 섭섭해 말고.”
분위기를 풀려는 의도가 명백히 읽혔다. 그에 작게 웃는 것으로 응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봐요. 아니면 구경 좀 하다 가도 되고. 그 말을 끝으로 사장님은 잠시 볼일이 있다며 허지훈과 다른 알바생… 아마도 곧 군대에 가실 분께 가게를 맡기고 어디론가 가 버리셨다.
낯선 이 앞에서 느꼈던 긴장이 풀리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이제 어쩌면 좋지. 일단 한우주 일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 이 정신으로 알바하겠다고 나섰다가 사고만 잔뜩 치고 잘릴 미래가 보였다.
한우주를 만나긴 해야겠는데….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한우주를 대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는 책장 앞을 어슬렁거리며 한우주와의 대화를 시뮬레이션해 봤다. 결과는 전부 좋지 않았다. 저조한 기분을 끌어 올려 주는 것이라곤 차분한 책 냄새뿐이다.
아니, 아니다. 방금 말은 취소다. 한우주가 책 읽는 모습이 떠올라 다시 심란해졌다. 책 안 좋아한다면서 매일 같은 책만 읽는 한우주. 책장에는 오직 어머니의 책들뿐, 한우주의 것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우주에게 책이라도 사다 줄까, 하고 생각했던가? 물론 죽어 버린 한우주의 연애 욕구와 감성을 로맨스 소설을 통해 소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한우주가 자신의 책을 한두 권쯤 가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러면서 취향도 좀 찾아 가면 좋고.
그래, 이왕 서점까지 온 거. 한 권 사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막상 마음먹고 보니 대놓고 로맨스 소설인 걸 선물하긴 좀 그렇다. 한우주가 로맨스 장르를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얜 도대체 뭘 좋아할까? 새로운 고민에 잠긴 채 생각을 지우며 신간란을 둘러보던 때였다. 어떤 책을 발견하곤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표지와 제목이 익숙했다.
「호수의 주인 6」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홀린 듯 다가가 책을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숫자를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이게 6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이거 진짜 내가 아는 그 책이 맞나? 아니면 게임 속 세계에 나의 무의식이 반영되기라도 한 걸까? 다급한 손길로 몇 페이지를 넘겨 읽어 보았다. 5권과 이어지는 새로운 내용, 익숙한 필체, 생동감 있는 인물들까지. 아무래도 가짜는 아닌 것 같다. 그에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호수의 주인’은 내가 막 걷기 시작할 즈음에 1권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이다. 마니아층이 두꺼운 스테디셀러기도 하고. 탄탄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스토리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지만 동시에 욕도 먹고 있다. 출간 시기가 들쑥날쑥하고, 기껏 잡힌 출간일이 미뤄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5권 출간일이 아마 2017년 1월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출간 소식이 없다가 ‘2021년에 나온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기는 했는데…. 나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고3을 맞이한 해에 신간이라니, 너무하잖아. 이전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려서 1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단 말이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도대체 왜 실존하는 책의 신간이 게임 속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이곳에 이 책의 작가도 있고, 출판사도 있고, 그런 건가? 그럴 수가 있나?
게임 속 세계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 어차피 엔딩 보고 나갈 거니까. 나랑 상관없는 세상이니까. 여기 온 뒤로 몇 번이고 접한 지명이나 기업 이름은 현실 세계에 없는 것이었다. 한우주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성운 그룹이라든가, 서울시 서초구 강우동이라든가….
역시 ‘호수의 주인’ 6권은 내 무의식에서 비롯한 게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진로를 틀어 작가를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원작자가 쓴 게 맞는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혹스럽기만 했다.
“조현우. 야, 조현우?”
“응?!”
“뭐야. 왜 이렇게 놀라는데?”
허지훈이 다가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골몰해 있었나 보다. 넌 왜 책을 그렇게 노려보고 있냐. 허지훈이 가벼운 어조로 말을 건네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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