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허지훈은 나름대로 자연스레 굴려는 것 같았지만, 꼬인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엉망인 나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행동이 어색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한우주, 책, 게임, 세계, 그리고 허지훈까지. 신경을 쓸 게 점점 늘어만 간다.
“우리 할머니.”
허지훈이 대뜸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아까 사장님이 영숙이라는 사람 얘기했잖아. 그분이 우리 할머니라고.”
“아.”
“사장님이랑 할머니랑 좀 친했어. 아, 사장님은 너랑 완전 초면이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라?”
근래 들어 허지훈은 조현우에 관한 정보를 꽤 자주 늘어놓았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그것도 허지훈 쪽에서 부러 별거 아니라는 듯 농담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예를 들어 조현우와 허지훈은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고, 그때에도 공부를 못했다는 것……. 예전부터 성격 답답했다는 은근한 험담이 섞인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무튼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일전에 허지훈의 집에 갔을 때 본 사진을 떠올렸다. 사진 속에 함께 계셨던 분이겠구나.
잠시 상기하고 있었을 뿐인데. 허지훈의 눈에는 내가 잊은 것을 억지로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허지훈은 손바닥으로 나의 등을 툭 치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할머니랑 너랑 친했어.”
누가 보면 네가 할머니 손주인 줄 알았을걸. 허지훈이 여상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그 안의 미미한 위화감을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허지훈은 조현우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나를 확인할 때마다 부러 침착하려 노력했다. 허지훈이 연기에 뛰어난 편은 아니라 곧잘 티가 났고, 오늘은 그 정도가 더했다.
이런 데엔 도통 익숙해지질 못하겠다. 짧은 망설임 끝에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네. 친했던 것 같아. 너희 할머니랑….”
“……진짜?”
“응. 기억은 안 나는데 느낌이 그래.”
그 짧은 몇 마디 말에 허지훈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들뜨지 않은 척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입꼬리가 몇 번을 꿈틀거렸는지 모른다.
“뭐… 그게 어디야. 다행이네. 할머니 얘기는 다음에 해 줄게, 다음에.”
말에 웃음기가 배었다. 그리고 금방 다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물론, 조현우 네가 원한다면. 귀찮으면 말아.”
“아니야. 궁금하니까 말해 줘.”
그때부터 허지훈은 대수롭지 않은 척하는 걸 포기했는지, 대놓고 기쁜 티를 냈다. 오늘은 일해야 하니 학교에서든… 아니, 그냥 집에서 얘기하는 게 편할 수 있겠다며 벌써 계획을 마구 세워 댔다. 그동안 나는 아픈 양심에 죽어라, 땜질이나 해야 했다.
허지훈은 이제 일하러 가 봐야겠다며 떠나는 순간까지 나의 양심을 마음껏 긁어 놨다. 기껏 소개해 준 좋은 알바처 구직을 유보한 것만으로 미안한데, 허지훈은 ‘마음에 안 들면 하지 마.’, ‘혹시 몸이 아직 많이 안 좋냐?’ 하며 내 걱정을 잔뜩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니,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라는 말로 대화를 끝맺기까지 했다.
나는 허지훈이 새로이 입고된 물량을 확인하기 위해 서점을 나가고 나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행동임을 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솔직히 지금은… 심란함에 불타는 마음이 기름으로 샤워당한 기분이다.
허지훈에 그 할머니, 오재영, 강준희, 그리고 한우주까지. 하여튼 조현우는 좋은 사람들에게 사랑 참 많이 받고 지냈구나. 진작 알고 있던 일인데도 그 사실이 가슴에 생경하게 와닿았다.
그런 조현우의 몸 안에서 지내는데도. 아니, 조현우로 지내고 있으므로. 이토록 사무치게 외로울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새삼스레 생각했다.
***
어느새 밖은 어둑했다. 종이 쇼핑백이 다리에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유독 크게 울렸다. 나중 가선 그마저도 요란스레 뛰는 심장 소리에 묻혀 버렸다.
쇼핑백 안에는 세 권의 책이 담겨 있었다. 호수의 주인 1, 6권. 1권은 한우주 읽어 보라고 산 것이고, 6권은… 내 거다. 그리고 다른 한 권은 충동구매한 것인데, 솔직히 후회 중이다. 중간에 길바닥에 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냈다. 책이 무슨 죄라고. 호기심을 못 이긴 내가 죄인이지.
…그래, 내가 죄인인가 보다. 이렇게까지 긴장되는 걸 보아하니.
오피스텔에 카드 찍고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1701호 앞에 멀뚱히 선 채로 현관문만 애타게 쳐다봤다.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기엔 양심에 찔렸다. 인터폰에 손을 가까이 댔다가 떼기를 몇십 번 반복하고 있다. 나 지금 뭐 하냐?
정신 차려 봐라, 안태원아. 솔직히 너만 잘못한 거 아니잖아. 그냥… 당황해서 뛰쳐나간 거라고, 솔직히 말하면 될지도 몰라.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랜 끝에… 인터폰을 누른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항상 이런 식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이 멋대로 버튼을 스쳐 버렸고, 한우주 집 인터폰 버튼은 감도가 쓸데없이 좋았다.
지금만큼은 인터폰 소리가 장송곡처럼 들렸다. 십 초가 한 시간 같았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복도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나는 안도했고 절망했다. 현관문 앞에 망연히 서 있기만 했다. 정신은 천천히 또렷해져 갔다.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아 가는 시간이었다.
잇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현우?”
낯선 이의 이름을 처음 입에 담는 것처럼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부름이었다. 뒤를 도는 것으로 부름에 응하려 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거친 손길이 팔뚝을 쥐어 잡았다. 고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동공이 크게 팽창된 채 형편없이 떨리는 새카만 눈동자, 그리고 꾹 깨문 아랫입술. 저러다 피가 맺힐까 싶어 그만, 입술을 향해 손을 뻗고 말았다. 그 손마저 한우주에게 붙잡혀 저지당하고 말았지만. 다행인 일이다. 내가 방금 뭘 하려고 한 건지 모르겠다.
한우주는 내 등 뒤의 엘리베이터를 한 번 쏘아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곤 물었다. 목소리 끝이 떨렸다.
“갈 거야?”
엉뚱한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볼일이 있으니 여기까지 왔지. 그러나 한우주의 태도가 워낙에 진중하고 또… 절박해 보여서, 나 역시 눈을 맞추어 기꺼이 답했다.
“아니.”
그에 한우주는 안정을 찾고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을 되찾아갔다. 아니,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말없이 나의 손목을 고쳐 잡던 때, 그리고 제집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 애달프게 느껴졌다. 당장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서글퍼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
“한우주.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무래도 한우주의 상태가 이상하다. 착각이 아니다. 자꾸 멍하게 있고, 손은 안 놔주고, 이래서 대화는 제대로 할 수가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나는 혹 그사이 임도윤이나 임 회장과 또 일이 있던 것은 아닌지 싶어 물었다. 한우주는 나를 거실 소파에 앉히고는, 바로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일… 있었지. 너랑.”
“역시… 아니. 잠깐만. 뭐?”
나랑 있었던 일. 그게 전부라고? 그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넋이 나간 거야?
그게 말이 돼? 내가 생각한 반응은… 내게 실망해 타박하거나, 무시로 일갈하거나, 아무튼… 가볍게라도 한 소리 할 줄 알았다. 불안감에 시달린 나머지 내 안에서 한우주를 인성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다신 못 볼 줄 알았어.”
“뭐?”
“난 네가 아예…….”
답지 않게 말끝을 늘리다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역시 한우주가 좀 이상하다. 아예, 뭐. 내가 갈 곳이 어디 있다고. 기껏해야 자취방이고, 학교에서 다시 볼 거 아니야. 한우주는 그런 걸 전혀 고려치 못한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머리 잘만 굴리는 녀석이 왜 이럴까.
“한우주.”
나보다도 불안에 떠는 한우주를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황스러웠고, 이러지 않았으면 했다. 차라리 멸시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내가 뭐라고 한우주가 이렇게까지….
어쨌든 나는 할 말을 해야 했다. 그러려고 온 거니까. 게다가 지금의 한우주에겐 무슨 말이든 필요해 보였다.
“그렇게 가 버려서 당황했을 거 알아. 미안. 그런데 난 진짜, 그, 음. 그러니까.”
검게 가라앉은 눈이 나를 향했다. 한우주는 나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밀려오는 부담감에 한숨을 속으로 삼켜 내곤 겨우 입술을 떼어 냈다.
“그땐 너무 놀라서. 네가 이렇게까지 그, 하… 뭐라 하냐.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나갔을 거야. 아마. 아니지. 절대 안 나갔어.”
말하곤 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민망해 죽겠다.
“내가 좋다고 해서 그래?”
한우주 쟤는 돌려 말할 줄 모르나 봐. 미친, 딸꾹질할 뻔했다.
“내가 곁에 있어 달라고 해서. 그게 싫었어?”
“잠깐만. 나 생각할 시간 좀.”
“…생각이 왜 필요해?”
아, 왜 또. 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뭘 바라는 거야. 애초에 뭐가 좋다는 건데. 친구로서 좋다는 거지? 망할, 이런 걸 어떻게 물어봐. 생각이 왜 필요하냐고? 난 지금 생각할 거투성이라 미치겠다, 한우주야.
말이 없자 한우주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 그러니까,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이거 진짜 양아치 아니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건가? 나는 당혹감에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손에 힘을 잔뜩 주어 버텼다. 그 상태로 겨우겨우 말을 쥐어 짜냈다.
“생, 생각은 어디에든 필요하지. 하다못해 밥을 먹을지 말지, 먹을 거면 뭘 먹을지도 생각을 해야 나오잖아. 너 바보야?”
솔직해 내가 봐도 바보는 나 같은데. 한우주는 웃지도 않고 진중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토마토를 먹을지 말지는 고민할 수 있지. 근데 토마토가 좋은지 안 좋은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 있어? 한 번 먹어 봤으면 바로 알 거 아니야.”
“뭐?”
나는 퍼뜩 얼굴을 들어 한우주를 노려봤다. 얼굴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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