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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97화 (97/150)

97화

한우주 이 녀석이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한다고,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사람처럼 있더니 다 연기였던 거 아닌가. 문득 스친 생각은 금방 모습을 감췄다. 한우주의 주변엔 여전히 먹구름이 낀 듯했다.

“호불호를… 토마토가 좋고 싫은 걸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냐고.”

진짜 뭐냐고. 나 지금 화내도 되는 건가?

“너 일부러 이래?”

“뭐가?”

“왜 하필 토마토인데?”

“그냥 떠올라서.”

“그거 하지 마. 나 토마토 싫어.”

“알았어. 싫으면 안 할게.”

그런데 이런 게 중요해? 그리 말하듯 한우주가 미간을 좁혔다. 억울했다. 이런 식이면 내게 불리하지 않은가. 한우주 저 녀석, 사람 안타깝게 축 처져선 은근히 할 말 다 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너도 나도 상태가 영 그른 것 같으니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는 그 대신 허리를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얼굴이 불덩이 같아서 울고 싶어졌다. 긴 한숨과 함께 무심코 속엣말을 토해 냈다.

“진짜 이해 못하겠어…….”

소파 시트에 무언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옮겨 온 무게 중심에 따라 쿠션이 조금 꺼졌다가 금방 원래 자리를 찾았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했다가, 어느새 바짝 다가온 한우주를 보곤 놀라 고꾸라질 뻔했다. 한우주는 나를 따라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 채로 말했다.

“뭘 이해 못하겠는데?”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한우주는 그 많던 여유와 인내심은 어디다 두고 온 것인지, 짧은 침묵조차 견디지 못하고 이어 말했다.

“뭔지 알려 줘. 네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눈을 바로 맞추지 못하고 한우주를 흘긋거리기만 했다. 불안정한 내 시선이 한우주에게 닿고 떨어지길 반복할 때마다 한우주의 낯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음….”

말은 안 나오고 앓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아, 모르겠다. 긴장감에 경직된 몸을 소파에 내던지다시피 했다. 등을 푹 기대고 목까지 젖혀 천장을 보았다. 조명에 눈이 부셔 눈꺼풀을 닫았다. 순식간에 피로해진 정신에 이대로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떡하지. 이런 상황은 예상 못했는데.

한우주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굳이 지금 이해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아니, 무섭다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또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답을 들어 버릴까 봐.

“조현우.”

“…….”

시선이 따갑다. 이러다 사람 뺨 뚫리겠네. 별수 없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한우주 쪽을 보지 않고 거실 테이블이나 쳐다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하는지 모르겠어.”

“그건 좋….”

“잠깐, 잠깐만. 기다려. 말 아직 안 끝났거든!”

하마터면 손으로 한우주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미치겠네. 한우주 뭐야, 앵무새야? 좋… 어쩌고 하는 말 이제 막 배웠어? 그런데 기다리라고 하니 또 얌전히 기다린다. 앵무새는 아닌가 보다. 친구 집에 가서 본 앵무새는 기다리라고 백번 말하니 ‘기다려’를 배워서 친구랑 같이 ‘기다려’를 열렬히 외치더라.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나도 모른다. 환장하겠다….

길게 고뇌할 시간조차 없다. 나는 한우주에게 하고 싶은 말 중 ‘좋’으로 시작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만한 것을 고르고 골라 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 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까만 해도 그래. 다신 못 볼 줄 알았다느니 하는데. 사실 내가 네 집을 나가도 학교에서 계속 볼 거잖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 뿐이고….”

말하고 나니 우습다. 이런 말을 하는 나야말로, 오늘 교실 좀 뛰쳐나간 것 가지고 한우주에게 미움받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라는 걸, 내가 상황을 너무 과장해서 생각했다는 걸 확인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우리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닐 텐데. 안 그래? 내가 여기 나가면 한우주 넌 뭐… 나 쌩까려고?”

아닌가? 아직 확인 못했나?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갈라졌다. 한순간 한우주가 ‘응. 완전 무시하고 살 건데.’라고 대답하는 걸 상상해 버린 탓이다. 혹여 동요하는 기색이 읽혔을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한우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나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천천히 고개를 젓는 모습에 안도했다. 나는 그제야 한결 편안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야…. 그럼 됐지. 사람 놀라게 좀 하지 마. 나 네가 그렇게 침울한 거 처음 본 것 같아.”

장난스러운 투로 건넨 말에도 한우주의 안면 근육은 꿈쩍할 생각을 안 했다. 한우주는 어떤 대답도 없이 내 얼굴만 쳐다보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철렁했다. ‘나 뭐 말실수한 거 있나?’ …하는 걱정은 금방 무색해졌다. 한우주는 물을 뜨러 간 것이었다. 내게 미온수가 담긴 유리잔을 건네고는 다시 내 옆자리에 앉아 속 모를 얼굴을 했다.

…뭐야, 진짜 뭔데. 상황 파악이 덜 되어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물이나 마셨다. 가슴 한편이 간지러운 게… 느낌이 이상하다. 물 한 컵을 다 비우고도 목이 타는 것만 같았다.

“……그러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한우주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보다도 낮고 깊게 울렸다.

“돌이켜 보면 이상하긴 해. 왜 그렇게 매몰됐던 건지.”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 이어 읊조린 말은 혼잣말에 가깝게 들렸다.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한우주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침묵이 길었다. 뭐든 말해 줄 것처럼 굴어 놓고선 이렇게 입을 다무니 애가 타고 답답했다.

“야, 한우주?”

“…….”

“한우주!”

“응. 잠시만.”

한우주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애써 지은 티가 물씬 나는 것이 싫어서, 나는 그냥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영원히 입 다물고 있진 않겠지, 뭐. 나는 괜히 손가락이나 꿈지럭거리다 한우주나 쳐다봤다. 의미 없이 던진 시선에 불과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입가를 매만지는 길게 뻗은 고운 손가락, 그 아래에 자리한 입술은 붉은 혈색이 돌아 예뻤다. 입꼬리를 내려 그늘진 입매와 내리뜬 눈을 따라 뻗은 긴 속눈썹, 그에 드리운 그림자까지. 눈꺼풀을 여닫는 찰나의 순간을 유심히 지켜보면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아롱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짙은 쌍꺼풀과 일자로 뻗은 눈썹, 깊은 아이홀까지.

……수심에 빠진 미남이라는 말을 가져다 박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 한우주 잘생겼지. 진작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왜 갈수록 더 잘생겨지는 것 같지? 소설, 게임, 매체를 막론하고 연애물에 종종 나오는 ‘보듬어 주고 싶은 미남’에 대한 묘사를 접할 때마다 내심 비웃곤 했다.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어서.

과장이 아니었구나. 이런 사람이 있긴 있구나. 이런 때에 남의 얼굴이나 구경하고 있는 나는 생각보다 더 그른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깍지 낀 양손 위로 이마를 받치며 바닥이나 봤다. 이토록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적 있던가? 물론 있지만, 사실 꽤 많지만, 당장 수치심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그리고 이 답 없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할 말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죄다 외모에 관한 것이라 실패했지만. 너 잘생겼다. 화보 촬영하는 것 같다. 넌 모델이든 뭐든 연예계 진출하면 바로 탑 먹을 거다. 망할. 그냥 생각을 말자. 이왕이면 말도 하지 말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조각상 같은 것이 돌연 말을 시작했다.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되더라. 네가 말하기 전까지는 이상한 줄도 몰랐어.”

한우주는 제 턱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이내 얼굴에서 손을 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뭐든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갔겠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나아.”

“…뭐? 그게 뭐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게 싫어. 피곤하니까.”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러니까 지금… 날 기다리는 게 피곤해서 아, 몰라. 이딴 식으로 나갔으니 다신 안 돌아오겠지. 생각한 거라고? 욱하고 치미는 마음을 토로하기 전에, 한우주가 말했다.

“게다가 넌 언제든 떠날 것처럼 굴었잖아.”

“…내가?”

“응. 못 떠나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는데. 나한테는.”

“…….”

오늘 낮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놀라움을 넘어서서 조금 무서웠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까. 날 그렇게 자세히 관찰했다고? 혹은 내가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티를 내고 다녔나? 순식간에 혼란해진 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대화는 이어졌다.

“그게 의아했어.”

네가 곤란할까 봐 묻지는 않았지만. 한우주는 자못 자랑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적어도 날 싫어하진 않잖아. 넌 싫은 사람한텐 가차 없으니까.”

“…나 안 그래.”

“아니. 너 그래. 미움받기 무서울 정도야.”

한우주는 웃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어느새 한우주의 시선은 오롯이 나를 향해 있었다.

“어쨌든, 날 이해 못하겠다고 했지? 그럴 만해. 오늘 일은 그냥…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그런 것 같아. 아마.”

개인적인 경험. 그렇게 짚어 말할 때까지도 나는 한우주가 곧 어떤 말을 꺼낼지 상상도 못 했다.

“홀연히 떠나서 안 돌아온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도 날 싫어하진 않았을걸.”

머리가 얼어붙었다. 이건 한우주의 어머니 이야기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 새삼스레 충격받을 리는 없다. 나는 그저 한우주가 제 입으로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우주는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직접 언급한 적 없다. 게임에서도 독백으로만 몇 번 나왔지. 그러니… 한우주가 어머니의 일을, 존재를 얼마나 괴롭게 여기고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런 얘기는 흔하잖아. 마찬가지로 나도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든 뭐든 됐나 보지. 오늘 일은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는데…. 이해가 좀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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