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같이 덤덤한 말투였다. 내가 ‘이해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제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평생 꺼내지 않았을 것처럼. 트라우마라는 심각한 단어를 내뱉은 주제에 지독히도 무심한 태도를 취한다. 이제는 필요 없는 케케묵은 감정과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이….
얌전히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한우주를 보자 두통이 몰려왔다. 이해됐느냐고? 그래, 이해했다. 곤란할 정도로 깊게 말이다. 괜히 좋…아한다는 말 피한다고 날뛰다가 늪에 빠져든 꼴이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나 보다. 한우주는 ‘조현우.’ 하고 부르더니 눈을 맞추며 웃었다. 조금 전의 무심한 태도도, 지금의 웃음도, 작위적으로 느껴져 마음이 안 좋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토해 내면 좀 나을 텐데. 묵혀 두면 썩어 갈 뿐이라는 걸 아는 녀석이 이래? 불만 섞인 생각이 떠올랐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욕심에는 끝이 없다더니, 내가 아주 배가 불렀구나. 분명 한우주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드러낸 것일 터이다. 적어도 나만은 한우주의 노고를 알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모를 테니까. 솔직히 나 역시 이전에 죽어라, 게임을 해 둔 게 아니었으면 한우주의 심정 같은 거, 가늠도 못했을 것이다.
“…이해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무언가 더 말해 주고 싶은데 쉽지 않다. 온갖 상투적인 표현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중 그나마 나은 것을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에는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쑥스러움, 고마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 또, 한우주가 애써 숨긴 과거의 일까지 모두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처지에서 비롯한 죄책감…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때,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직전과는 달리 정말로 즐거운 듯 웃는 한우주가 보였다. 이 상황에 왜 웃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누구는 심란해 죽겠는데…. 그 와중에 역시 한우주는 웃는 게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으로 흡족한 기분이 들 정도로.
“사실은 부담 주려고 한 말이야. 어느 정도는.”
“뭐?”
내 흡족함 도로 회수하련다. 쟤 방금 뭐라 했냐?
“이렇게라도 해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 덧붙인 말에서 들뜬 기색이 읽혔다. 나는 그새 한우주가 회복을 마치고 나를 놀리는 건 아닌가, 싶어 미간을 와락 좁혔다.
“다시 생각해 봐. 나랑 지내는 게 죽도록 싫은 게 아니라면야…….”
놀리는 것치고는 진중한 투였다. 이제는 나도 내 감정을 모르겠다. 한우주가 나랑 뭘 어쩌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나는 또 어쩌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와, 나 아는 게 없네.
“아니, 싫어도 다시 생각해 봐. 일주일만 더 머무르면서 고민해 보고 그래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한우주가 내게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한우주가 또다시 웃었다. 듣는 내가 낯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이어 눈썹 사이에 닿은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꼬깃꼬깃 구겨진 미간을 피려는 것처럼 살살 문지르기에 괜한 반항심이 들었다. 그래서 좀 유치하게 굴었다. 근육이 떨릴 만큼 힘을 주자 한우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웃어라. 앞으로 특기란에 ‘고집부리다가 본전도 못 찾기.’나 써야겠다. 겨우 잦아든 웃음 뒤에 뜻밖의 말이 따랐다.
“……그땐 나랑 다시 얘기해.”
나는 그제야 눈을 뜨고 한우주와 시선을 맞췄다. 미간에 닿아 있는 손을 슬며시 떼어 놓으며 말했다. 보통 이런 때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나?
“그게 뭐야. 나가도 좋다, 붙잡지 않겠다. 이런 게 아니라 다시 얘기하자고?”
“내가 왜 그런 말을 해? 나가도 좋다는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여러모로 낫잖아. 너 혼자 지내면서 일까지 하면 공부할 시간이 남아나긴 해?”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갑자기가 아니었지, 참.’
낮에 한우주가 내 성적표를 본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말도 안 될 정도로 급등한 한우주의 성적도.
어떡해. 한우주 얘 진심인가 봐. 나랑 대학 갈 생각하는 게 맞나 봐. 당최 이해가 안 간다. 왜 당연하게 자기 미래에 나를 껴 놓고 있는 건데? 입으로 소리 내 물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뭐라고 대답할지 알 것도 같다.
좋아해서…라고 하겠지…?
왜? 왜 좋아하는데? 얼마나 좋아해야 의식주 책임지고 같이 대학 갈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거야? 점점 더 혼미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지 못한 채, 나는 기어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야, 한우주. 진짜 이건 혹시나 해서,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거든…?”
“뭔데?”
“너… 나 조, 좋…….”
“좋아한다고?”
“…그래, 그거.”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숨을 크게 들이삼켰다.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냥 친구로서 너무 좋아서… 그래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 이런 뜻…인 건가? 아, 아닌가?”
한우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
“…….”
한우주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어 댔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데도, 한우주는 굳이 말로써 말뚝을 박았다.
“그런 거 아니야.”
고작 몇 초 사이 말도 안 되게 지쳐 버린 모습에 ‘이 정도로 기복이 심한 한우주는 또 처음 보네. 별일이다, 진짜.’하고 생각했다. 그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응, 아니구나. 그랬구나. 알았어.”
대답 한번 잘한다, 진짜. 올해의 얼간이 시상식 같은 게 있다면 난 대상 탔을 거다. 찾아온 침묵이 어색했다. 괜히 물었다는 생각만이 빠르게 부풀어 갔다.
자취방, 일주일, 공부, 대학, 좋아한다는 말.
이것저것 재고 따질 만큼 차분한 상태는 못 되었다. 그러니 내가 한우주의 제안, 일주일만 더 머무르며 생각해 보라는 제안을 승낙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렇게 믿으련다. 그래도 끝에는 한우주가 착각하지 않도록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갈 거야.”
나의 선전포고에 한우주는 대답 대신 뜻을 모를 미소만 지어 보였다. 무어라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관뒀다. 조용히 가방과 쇼핑백을 챙겨 들어 조현우의 자취방 아닌 2층의 손님방으로 향할 뿐이었다. 한우주가 쇼핑백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표해서, 더더욱 행동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에 선물을 건넸다가 한우주의 착각을 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난 그저 한우주의 상태가 신경이 쓰여서, 또 미안한 마음에…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챙겨 줄 생각이었단 말이다.
한우주와 인사 몇 마디를 나눈 것 같긴 한데, 뭐라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제는 손님 방이라 부르기엔 양심에 찔리는 공간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숨통이 좀 틔었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는 가방과 쇼핑백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정하기 위해서, 한우주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뭐라도 하려고 든 것인데….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까, 뭐야…. 한우주가…….’
한우주가 날 좋아한단다. 그런데 또 친구로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미친… 그게 가능한가? 공략캐들은 어쩌고 나한테 이러는 거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공략캐 외의 인물이랑 연애해도 게임 진행이 가능한가?
아니, 아니지. 나는 또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냐. 만약 그렇다면 어쩔 건데. 지금 한우주랑 연애라도 하겠다는 거야?
속에서 온갖 욕이 날뛰었다. 동시에 쇼핑백에 든 책들을 한 권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망할, 속으로만 맴돈 욕설을 육성으로 내뱉을 뻔했다. 호수의 주인 1권과 6권에는 죄가 없다. 죄 있는 책은 따로 있었다.
아까 길거리에서 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한 책 한 권이 나의 정신을 강타했다.
「연애 길라잡이: A부터 Z까지, 솔로인 당신을 위한 지침서」
집어 들어 표지를 확인하자마자 또다시 내던질 뻔한 걸 겨우 참아 냈다. 안태원 이 미친 새끼. 내가 이걸 왜 샀지? 게임 진행이 지지부진하니 나라도 연애가 뭔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가? 와, 도대체 누가 연애를 책으로 배울 생각을 해?
……환불하자. 영수증을 소중히 챙기고, 책은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오늘 내가 많이 혼란스럽긴 했나 보다. 이런 쓸데없는 충동구매까지 하고.
고작 하루 만에 폭풍이 여러 차례 지나갔다. 수면욕이 이렇게 앞선 적이 또 있던가. 샤워한 뒤 일주일 뒤면 작별할 소중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생각이든 뭐든 자고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하자. 기껏 한 결심은 곧 발에 챈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디링—.
「시크릿 도전과제 달성!」
「도전과제 달성! ‘플레이어’에게 다음의 호칭을 지급합니다: ‘지금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플□이어’ □■□ □??□?□■■?」
잠들려는 순간 나타난 시스템 창은 어딜 봐도 평소와는 달랐다. 소름이 돋았다. 저 깨진 텍스트는 도대체 뭐지? 정체를 가늠하기도 전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특수 조건을 충족하여 다음의 퀘스트를 부여합니다.
::특수 퀘스트::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내용: 공략 캐릭터 ‘???’의 정체를 밝혀내세요. 목표 달성 시 퀘스트가 완료되며, ‘???’의 정보는 자동으로 ‘인물 수첩’에 반영됩니다.
♥완수 시 보상: □■■ □□ □□ □□□ □□□□□■
♥실패 시 패널티: ‘■■□ □□: ■■ ■■’의 달성이 불가능해집니다.
♥기한: 05/22(Thu) 23:59
※ 해당 퀘스트에는 기간 제한이 있습니다. 표기된 기한 안에 완수하지 못할 시 실패 처리되오니, 유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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