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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99화 (99/150)

99화

***

‘시크릿이고 뭐고 내가 뭘 해서 무슨 호칭을 받았는지 정도는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간밤에 겪은 불면의 주범인 시스템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젯밤에 받은 호칭과 새로운 퀘스트를 확인하자마자 시스템 창의 모든 옵션을 꼼꼼히 확인했다. 한참을 봐도 별다를 게 없어 성질을 부리던 때였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했던가? 나의 섬세함이 무색하게도, <퀘스트>버튼은 메인 창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이젠 아예 정식 기능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퀘스트란의 ‘진행 중’ 탭에는 방금 받은 퀘스트가 있었다. ‘완료’와 ’실패’란도 존재했는데, 실패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완료란에는 지난번 서연준과 겪은 일이 친절히도 적혀 있더라.

아무튼… 타이밍이 절묘하지 않은가. 제대로 출력조차 되지 않는 텍스트가 찝찝하긴 하지만 쉬운 퀘스트라고 생각했다. ‘퀘스트-진행 중-특수: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라고 적힌 퀘스트를 터치했더니, ‘입력’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마도 이걸 누른 후 ‘???’의 정체… 아마도 이름을 입력하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떠오르는 이름을 한 치 망설임 없이 입력했다.

「조현우」

삑—.

「입력 사항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다시 시도해 주세요.」

…틀렸다고? 이게 틀릴 리가 있나? 나는 의아해 같은 답을 다시 한번 입력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같은 짓을 수차례 반복했을 때였을까? 새로운 안내 창이 떠올랐다.

「‘조현우’를 ‘21’회 입력하셨습니다. 입력 사항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20’회 이상 중복 입력으로, 다음 기능을 제한합니다. : ‘조현우’ 입력.

‘20’회 이상 오답 입력으로, 다음의 패널티를 부여합니다. : 입력 횟수 제한, ‘10’회.」

‘…….’

도대체 뭘 어쩌라고. 조현우가 아니면 도대체 누군데? 시스템 이거 돌팔이 아니야? 네가 뭘 알아. 넌 아무것도 몰라. 틀린 건 너라고. 내가 옳다고. …그렇게 허공에 대고 박박 우겨 대는 나의 모습이란. 어지간히 우스웠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봐. 내가 한우주에게 들은 것은 엄연히 고, 고백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정도면 헷갈릴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며 못을 박은 수준 아니냐고.

‘설마… 거짓말이었나?’

기어코 한우주의 마음을 의심하게 된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퀘스트의 입력 창에 조현우 아닌 다른 이름을 입력한 것이다.

「안태원」

내가 해 놓고도 미친 짓이구나, 싶었다. 이게 될 리가 있냐?

「입력 사항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거 자의식 과잉이야.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몸을 자비 없이 비틀어야만 했다. 그때였다.

「알 수 없는 데이터입니다.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조현우를 입력했을 때와는 다른 문구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데이터라고? 그야, 나는… ‘안태원’은 이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재확인이 필요합니다.’라는 문구는 어딘가 의뭉스러웠다. 고민 끝에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조금 다른 것을 입력해 보았다.

「플레이어」

짧은 알림음 뒤에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정확한 데이터를 입력해 주세요.」

미치겠네. 나랑 뭐 어쩌자는 거야. 혹시 몰라 ‘안태원’을 다시 한번 입력해 보았고, ‘재확인이 필요하다.’라는 문구가 뜨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실히 확인했다. 거기에 ‘플레이어’에는 ‘정확한 데이터’를 요구하질 않나….

조현우는 절대 아닌 것 같은데. ‘플레이어’의 정확한 데이터가 ‘안태원’인 걸 뭐 어쩌라고.

10번 중 3번의 기회를 사용했으니 남은 기회는 7번. 여기서 기회를 더 낭비하면 위험하다. 내 마음 급하다고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동안 어떻게든 옳은 데이터를 찾아내 입력해야만 한다. 결심한 뒤, 퀘스트 창을 다시 한번 훑으며 생각했다. 이번 퀘스트는 어떻게든 제대로 완수해야겠구나, 하고.

지난번 퀘스트의 패널티, ‘서연준 루트 삭제’도 파격적이었지만 이번 건 정체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무서웠다. 게다가 뭐, 달성이 불가능해? 이번 패널티가 엔딩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라도 하면 어떡하냐. 그런 위험성을 떠안을 수는 없다.

이 정도면 나의 답 없는 조급함에 대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걸 한우주에게 설명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사달이 났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아니, 의문은 집어치우고 얼른 대답해 봐.”

“아까 했잖아.”

“다시 해 보라고.”

한우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것이다. 만약 나라면 있던 마음도 식었을 것이다. 야, 사실은 나도 이런 질문 하고 싶지 않았어…. 사람이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나는 방금 버렸지만….

한우주는 무언가 고민하듯 허공을 응시했다. 그 행동에 애가 탔다. 다시 대답을 재촉하려 했을 즈음, 눈이 마주쳤다. 한우주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좋아한다는 말… 계속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

경악스러운 물음에 비명 같은 대답을 내질렀다.

“그런데 왜 자꾸 물어봐.”

“……사실 좀 안 믿겨서?”

“음….”

한우주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조금 흩트려 놓았다.

“우리 이러다 늦어.”

…허, 늦고 말고 하는 걸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성적 한 번 챙기더니 아주 모범생이 다 됐다. 오늘의 한우주는 아침 기상까지 깔끔하게 해내서, 겨우 이 정도 뭉그적댄 것 가지고 지각할 리도 없었다.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 가면 정말로 수상해 보일 것 같아 얌전히 굴었지만, 속은 쉴 틈 없이 구시렁대느라 바빴다.

그리고 여유롭게 집을 나설 즈음이었다. 나는 참을성을 잃고 기어코 한우주에게 또 물음을 던졌다. 문득 떠오른 궁금증 탓이었다.

“그런데 너는 어쩌자고 나한테 좋… 그런 말을 해? 어제 보니까 임도윤도 게이니, 뭐니 하면서 협박 같은 거 하던데.”

어디 소문이라도 나면 골치 아플 것이다. 그게 임 회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한우주는 현관을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나한텐 별거 못 할걸. 임도윤 배짱으론 고작 협박하는 게 최선일 거라.”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급하게 덧붙였다.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표정과 말투에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너한테는 혹시 모르니까. 실제로 전적도 있고, 웬만하면 걔가 너한테 접근할 빌미를 주긴 싫었어. 그냥 내가 걱정돼서.”

미안. 작게 덧붙이는 사과에 마냥 어리둥절했다. 처음에는 한우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으니까. 기억을 되짚고 또 되짚어 어제 한우주와 임도윤이 나눈 대화를 상기하고 나서야 겨우 이해했다. 아, 내가 불쌍해서 어울리는 거다, 뭐다… 했던가? 내겐 가물가물한 기억을 한우주는 아직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그건… 이제는 진짜 괜찮대도.”

분위기를 풀 겸, 한우주의 팔을 약하게 툭 치며 말했다.

“어쨌든 한우주 너도 참 이럴 때 보면 조심성 없어. 내가 임도윤같이 반응했으면 어쩔 뻔했어?”

“임도윤같이?”

“싫어하는 사람 많잖아. 같은 성끼리 뭐… 그런 식의 호감… 가지고… 어, 뭔지 알지?”

동성끼리 연애, 동성연애, 동성애. 충분히 대체할 말 많은 거 안다. 내가 말하려니 민망해서 돌려 말한다는 것이… 진짜 얼빠져 보인다. 그렇지만… 동성연애? 나랑 한우주가 연애를 하는 건 아니잖아. 동성애? 애는 사랑 ‘애’ 자잖아. 너무 깊어 보인다고. 속으로 시답잖은 고민이나 하고 있자니 한우주의 미간이 전보다도 좁아졌다.

그리고 더없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럴 사람 같았으면 애초에 안 좋아했어.”

이상한 말 그만하고 얼른 가자. 앞장선 한우주를 두고 나는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로.

입꼬리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가슴 깊은 곳이 간지러웠다. 생소하지만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나는 이 고양감의 원인을 굳이 시스템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야, 한우주가 나 좋다잖아. 뭐가 틀린 데이터라는 거야.

가슴 속에 기분 좋은 확신이 차올랐다.

한우주는 나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어찌 됐든 공략캐 ‘???’는 나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한우주가 인하성과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공략 대상에서 삭제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저 나와의 관계를, 발전 방향을 새로이 본 시점에서 새로운 공략 캐릭터로 추가된 것일 터이다.

‘솔직히 나 말고는 후보군이 없기는 하지….’

한우주가 만나고 다닌 사람이 없으니까….

어쨌든, 나는 이 퀘스트 창에 나의 존재를 제대로 입력할 방법만 찾으면 된다. 그래서 정식 공략캐릭터로 인정되면 어쩔 것인지에 대해선 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퀘스트, 그리고 제 마음을 표현한 뒤로 조금 더 감당하기 어려워진 한우주를 대하는 것만으로 벅찼으니까.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랬다.

***

기분 잡쳤다.

진로 상담인지 뭔지 하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학교에 낯선 어른이 많이 보이더라.

출석 순서대로 상담하는데 하필 이게 또 묘했다. 조현우, 한우주, 허지훈. 이렇게 셋이 나란히 붙어 버린 것이다. 셋이 있는 것까지는 어떻게 괜찮다고 치자. 문제는 내가 상담을 하러 들어간 뒤의 일이다. 한우주와 허지훈 둘이 덜렁 남아 버리면….

안 그래도 윤태현을 눈앞에 둔 것만으로 피곤한데 복도 사정까지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팠다. 덕분에 윤태현의 걱정만 사 버렸다. 괜찮다는 말을 몇 번 했더라? 다 됐고, 한우주는 절 좋아한다고 하던데요. 그러니 그냥 공략캐고 뭐고 목록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시면 안 될까요. 이름 볼 때마다 불쾌해서요. 윤태현이 성적과 나의 생활에 대해 말하는 동안 속으로 그렇게 구시렁대기나 했다.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네?”

“오늘따라 집중을 못하는 것 같네.”

“아, 네. 조금요….”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제 우주 좀 불러와 줄래?”

싫은데요.

……라고 대답할 뻔했다. 나는 고개를 건성 끄덕이곤 교무실 밖으로 향했다. 한우주한테 뭐든 말해 두려 했다. 윤태현이 하는 말의 99.9 프로는 헛소리니까 그냥 듣고 넘기라고.

교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때였다. 이상하다. 복도가 왜 이리 소란스럽지.

익숙한 목소리가… 다투는 건가….?

‘아 미친.’

한우주랑 허지훈. 그 둘을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선득했다. 곧장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허지훈이 한우주를 앞에 두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사람 헷갈리게 좀 하지 말라고,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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