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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01화 (101/150)

101화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경직됐다. 당혹감에 머리가 느리게 돌아갔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 본인 아들 깎아내리면서까지 한우주 칭찬을 해야 해?’

슬쩍 눈을 굴려 서연준을 살폈다. 놀랍게도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러게요, 같은 맞장구나 치고 있다. 한우주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다들 이 상황에 익숙해져 이상하다는 의식조차 없는 것 같았다. 혹은 잘못된 걸 알면서도 개선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거나.

“에이… 절반 이상은 할걸요?”

“응?”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서빙 알바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최대한 사람 좋고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서연준의 아버지는 내가 갑작스레 저들의 대화, 아니 한우주 찬양 및 서연준 깎아내리기에 끼어든 데 불쾌함을 표하진 않았다.

이럴 땐, 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앞에선 지적은 금물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바보 취급을 당하더라도 헤실헤실하는 게 최고다. 이게 또 자식 둔 어른한테 효과가 꽤 좋았다.

“아뇨. 그냥… 연준이가 섭섭할 거 같아서요. 우주도 우주지만 연준이도 열심히 지내잖아요. 여러모로.”

서연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의 아버지도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바라봤다. 나란히 저러고 있으니 꽤 닮은 것이, 저 둘이 부자 사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아버지 쪽이 아들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내가 말을 좀… 그렇게 했나…?”

네. 누가 들어도 좀 그랬는데요. 속으로 구시렁댔다. 서연준네 가족은 서연준에게 유독 박한 면이 있다. 가만 보고 있자 하니 답답할 정도로 말이다.

“네? 아, 조금.”

얼결에 대답한 서연준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주 조금요. 근데 괜찮아요.”

별로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제 감정을 확인받는 게 익숙지 않은 것인지,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내놓은 답이 저거다. 문득 연서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큰일을 당연하게 서연준에게 맡겨 놓고 제 일을 보러 떠난 서연준의 부모님. 본인들이 야박하다는 자각도 없고, 서연준 역시 이를 문제 삼지 않으며 가족을 끔찍이 소중하게 여기기만 한다.

…본인이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살겠다는데 남인 내가 뭘 어쩌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연서가 사라졌을 때 당연하게 홀로 모든 걸 감당하려 들던 모습이, 불안을 못 이기고 서럽게 울던 서연준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니 딱 한마디만 더 할 생각이었다. 이들을 바꿔 놓을 만큼 거창한 것도 아니고, 그저 서연준에게 순간의 위로나 되고 말 것이었다. 막 입을 열려던 때였다.

“가끔 과하시긴 하죠.”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난 저런 말 하려고 든 적 없다. 황당해 입이 떡 벌어진 와중에 한우주가 나를 불만스레 흘겨보곤 말했다.

“반응하기 곤란해서 당황스러울 때도 꽤 있어요. 솔직히.”

그 뒤의 상황은 아주 깔끔하게 흘러갔다. 서연준의 아버지는 한우주가 던진 말에 펄쩍 뛰듯 반응했다. 자신이 배려가 없었다며, 사과까지 하셨다. 그마저도 ‘섭섭했을’ 제 아들보다 ‘당황한’ 한우주가 우선시 되었지만. 저보다 한참 어린 한우주에게 저렇게까지 굽실댈 일인가? 기이한 의문 끝에 한 가지 깨달음이 따랐다.

아마도 임 회장 때문이 아닐까? 그 앞에서 한우주를 떠받드는 것이 효과가 좋으니 입에 붙으신 거겠지. 방식이 완전히 글러 먹었지만 임 회장이 한우주를 아낀다는 말이 일견 사실이긴 한가 보다.

“아이고, 내가 주책이 심했어. 미안해요.”

한우주에게 퍼부은 칭찬만큼 과한 사과가 이어졌다. 겨우겨우 대화를 마무리할 무렵에는, 어쩐지 ‘맛있는 저녁을 사 주겠다.’라는 열렬한 권유를 받고 있었다. 차라리 한우주에게 권한 것이었으면 깔끔히 거절하고 넘어갔을 텐데…. 대상은 다름 아닌 나였다. 하필 연서 때의 일을 언급하며, 내게 아무것도 못해 준 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난 분명 부담스러워 거절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보니 학교를 마친 뒤 다 같이 식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있었다. 종례 때까지 기다리실 게 죄송스럽다는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기까지 10분이 채 남지 않았으니까…….

나는 ‘부담스럽다.’라는 본심 대신 ‘감사합니다.’를 웃으며 말하는 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아까부터 너무 웃어서 광대에 경련이 일 지경이다. 그래서 허지훈이 상담을 마치고 나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를 지켜보는 허지훈의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당시엔 발견하지 못했다.

***

“잠깐 나 좀 보자.”

갑작스레 팔이 당겨졌다. 우악스러운 힘이 강제로 나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이제 막 종례를 마친 때에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내 쪽에서 항변하기도 전에 한우주가 표정을 굳히며 다가와 허지훈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야?”

“넌 좀 빠져.”

“누구더러 빠지래. 얘 나랑 선약 있어.”

미친, 이게 다 뭐냐. 기 센 두 사람 사이에 껴 있자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게다가 아직 교실엔 윤태현이 있었다. 이 꼴을 발견하면 반드시 중재하러 올 것이다. 윤태현의 중재라니.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혹 교탁 있는 곳까지 들릴까 봐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야. 당사자 앞에 두고 너희 뭐 해? 허지훈 너는 내가 짐짝이야? 질질 끌고 다닐래?”

나의 말에 허지훈이 황급히 팔을 놓았다…. 그보다는 내팽개쳤다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어지간히 당황했나 보다.

“잠깐이면 돼.”

여기서 거절하면 또 실랑이를 벌일 게 뻔했다. 알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허지훈은 나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섰다. 어찌나 서두르던지, 한우주에게 ‘조금만 기다려 줘.’라고 말하려던 것을 ‘조’까지 밖에 못 말하고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래? 큰일이라도 생겼나? 작게 든 걱정은 금방 땅에 고개를 처박았다. 어디까지 가서 이야기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 밖으로 향하려는 게 아닌가? 게다가 인제 보니 허지훈의 손엔 내 가방까지 들려 있었다.

“허지훈 너 미쳤어?!”

끌고 다니지 말라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 요즘 왜 이렇게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건데? 이것들이 힘자랑하나? 아니면 조현우의 몸이 지나치게 팔랑거리는 걸까. 뿌리치려 해도 잘되질 않자 운동에 대한 욕구와 짜증이 치솟았다.

“아오, 좀 멈춰 봐! 아니, 손절당하고 싶으면 계속 가 보든지!”

허지훈이 자리에 멈춰 섰다. 어이가 없다. 협박이 통하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말도 없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허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앞장서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향했다. 정말로 손절당할 것을 염려하는 건지, 내 몸에 손은 못 대고 시선으로만 나를 재촉했다. 별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허지훈이 바로 본론을 말했다.

“약속 그거 가지 마.”

이쯤 되니 정말로 화가 나려고 한다. 겨우 이 말 하려고 날 여기까지 데려왔나? 끓는 속을 진정시키는 데 오늘치 기력 다 쓰게 생겼다.

“야… 너 진짜…. 나 한우주랑 둘이 가는 거 아니야.”

“알아. 아까 얘기하는 거 들었어. 한우주에 한우주 친구까지 얹혀 있겠지. 걔랑 친구 하는 놈이 멀쩡할 리가 있냐.”

“허지훈.”

허지훈은 서연준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엮어서 욕하는 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아까 내가 상담 시간 때 한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나?

“같은 말 두 번 반복하기 싫은데 너 진짜….”

얼굴에 열이 올라 눈가가 뻐근했다. 고개를 숙인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허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우주 그놈, 네가 한 짓 알아.”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뭔 짓을 했는데?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 허지훈과 시선을 맞췄다. 허지훈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했다.

“스토킹. 알고 있다고.”.

“…….”

말문이 턱 막혔다.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허지훈이 거짓말을 하는 건가? 내가 한우주랑 계속 어울리고 다니니까? 그게 싫어서?

공기를 가득 메운 침묵에 숨이 막혔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모, 모른다고 했잖아. 네가 분명…. 그때 내가 너한테 물어봤는데, 모른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허지훈은 이마를 짚은 채 말이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

대답은 단호했다.

“한우주가 모른다고 한 게 거짓말이었어. 지금은 아니야.”

“왜? 왜 거짓말했는데?”

“네가 이럴 거 알았으니까.”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정말로, 허지훈이 내게 뭐라고 하는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굳이 말 안 해도 될 줄 알았어.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뭘… 몰랐다는 거야.”

“……네가 이 정도로 한우주를 좋아할 줄 몰랐어.”

나는 멍청하게 두 눈만 끔뻑이고 말았다. 허지훈 쟤는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게 할 생각이지? 그런 거 아니라고.

네가 잘못 본 거야. 나 한우주 안 좋아해. 말했잖아, 한우주가 나 많이 도와줬다고. 그냥 친구로서 좋은 거야.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입만 몇 번 벙긋거리고 말았다. 바보같이.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해? 반면 허지훈은 그간 속에 눌러둔 이야기를 잘만 토해 냈다.

“조현우. 한우주 너 존나 싫어했어. 지금 저 새끼 하는 짓 너 엿 먹이려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고, 나한테는.”

그럴 리가 없다. 누가 이렇게 정성스럽게 엿을 먹여. 싫은 놈을 한 달 넘게 데리고 살 수 있냐고.”

“너 한우주한테 얘기한 적 있어? 네 기억 관련한 거.”

“…아니.”

“……그래도 워낙에 머리가 야비하게 돌아가는 녀석이니까.”

아까부터 한우주를 안 좋게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지훈이 이야기하는 한우주와, 내가 아는 한우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쩌면 진작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이건 내 추측일 뿐이지만….”

허지훈은 나의 표정을 보곤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더욱 갈피를 잃고 말았다.

“……늦게 말해서 미안하다.”

진심이 담긴 무거운 말에, 나는 차마 허지훈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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