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04화 (104/150)

104화

지금 이놈의 게임이 나한테 F랭크를 준 거냐?

‘아니, 아니지. 쓸데없는 데 흥분 좀 하지 마.’

지금 중요한 건 랭크 따위가 아니다. 난이도가 내려간 건 달가운 소식이다. 새로운 기능이 해방된 것도. 기어코 F랭크를 받은 네게 친히 도움을 주겠다는 시스템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 내가 지금 자존심 세울 처지냐.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시스템 창을 켰다. 새로이 생성된 ‘HELP’ 버튼을 확인한 뒤 망설임 없이 눌렀다. 그리고 바로 앞에 기다란 글이 펼쳐졌다.

「:: HELP :: 기능을 해방하셨습니다.

♥ 해당 기능에는 사용 횟수 제한이 있습니다. 주 1회 사용 가능하며, 사용 가능 횟수는 매주 일요일 초기화 됩니다.

♥ 해당 기능을 통해 게임 진행에 관련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HELP’ 기능은 만능이 아닙니다. 요청하신 사항을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릴 뿐이며, 사안에 관한 결과는 오롯이 플레이어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 사용을 원하시면 ‘HELP’ 버튼을 터치 후, 요청 사항을 말씀해 주세요.

♥ 시스템 해방 기념으로 금주의 ‘HELP’ 기능을 ‘1’회 더 제공합니다.

:: HELP 2/2」

타이밍이 좋았다. 진전 없이 갈팡질팡하던 내게 금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다. 이걸 어디에 써야 할까. 지금 내게 필요한 것들을 메모장 어플에 하나씩 적어 내렸다. 주에 한 번 도움을 준다고 했으니 미리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퀘스트 관련한 건… 화요일까지도 해결이 안 되면 부탁하자.’

도움을 구하고 싶은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당장 알고 싶은 것이 명확했기에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게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왜? 하는 의문에 거부감이 들었을 뿐이지.

나는 한우주가 정말로 조현우의 스토킹에 대해 알고 있는지, 그렇다면 왜 내게 잘해 주었는지, 좋아한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걸 해소하지 못하면 내 머릿속은 진창이 되어 앞으론 그 무엇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긴장감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HELP’ 버튼을 누른 뒤, 메마른 입술을 떼어 냈다.

“한우주의 속내를 알고 싶어. 스토킹에 대해 알고 있는지…. 정말로 날 그, 곤란하게 만들 생각인 건지.”

아니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숨을 들이켠 순간, 알림음이 들려왔다.

디링-.

「요청이 승인되었습니다. 다음의 힌트를 제공합니다.」

「한우주의 방, 책상 옆 두 번째 서랍」

「금주의 HELP 잔여 횟수: 1」

…웬 서랍? 서랍 안에 힌트가 될 만한 게 있다는 소리야? 그러면 내가 직접 한우주의 서랍을 뒤져 보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불안하다. 서랍을 살펴보라니. 이래서야 정말로… 한우주가 내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잖아.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한우주에게 무례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고. 기껏 얻은 힌트를 흘려보내는 건 미련한 짓이다. 그러나 한우주에 대한 의심과 불안보다는 믿음이 컸기 때문에 서랍에 관한 건 잊으려 했다.

그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정 알고 싶다면 대화를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운을 뗄지는 고민 좀 해 봐야겠지만.

일단 오늘은 잠이나 자자. 개운한 정신으로 다시 생각해 보는 게 낫겠어.

‘…….’

망했다. 여전히 잠이 안 온다.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 잡생각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도대체 한우주는 새벽의 적적함을 어떻게 버티고 지낸 걸까?

‘한우주는 자려나? 요즘 일찍 일어나는 걸 보면 자고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문득 떠오른 한우주 생각에 먼지 한 톨만큼 있던 잠기운마저 달아나 버렸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로 옆방인데 직접 확인하면 되잖아? 동시에 철없는 생각이 스쳤다. 혼자 있기 심심하니까 한우주도 안 자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방문을 열고 나섰다. 몸을 틀자마자 바로 옆의 한우주 방이 보였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한우주?”

문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린 뒤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쩐지 공기가 서늘했다.

“……한우주?”

욕실 쪽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아까 방에 들어간 걸 본 것 같은데. 그새 어딜 간 거지? 거실 불도 꺼져 있고…. 이 밤에 어디 나갔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챙겨 온 핸드폰으로 전화라도 한 통 해 보려 했다. 그때였다.

달칵, 드르륵—.

“아, 씨. 미친. 깜짝이야. 뭐야, 누구야?!”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적막이 다시 한번 공간을 메웠다.

“한우주 너야?”

대답이 없다.

“야…, 장난치는 거면 화낸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이쯤 되니 울고 싶다. 귀신 같은 거 아니야?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게임 속엔 있을 수도 있지. 아, 좀 닥쳐 봐. 속이 시끄럽다. 아주 난리가 났다. 살살 발걸음을 옮겨 전등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어두운 방에 불을 밝혔다. 눈꺼풀 너머로 쏟아지는 빛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역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지레 겁먹어서 환청을 들은 건가? 그보다 한우주 얘는 진짜로 어딜 간 건데? 방을 천천히 훑으며 다시금 핸드폰을 확인하려던 때였다. 어떤 것이 시선에 확 꽂혀 들어왔다.

…책상 서랍.

한우주의 책상 오른편에 있는 서랍장의 두 번째 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어쩐 일이지? 한우주는 주변 정돈을 소홀히 한 적 없다. 서랍을 열어 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깐, 설마 아까 그 소리가….’

서랍이 열리는 소리였나? 혹시… 힌트에 이 상황까지 포함되는 거야? 난 이미 시스템을 이용해 한우주를 파헤칠 생각 따위 접었는데. 그저 한우주를 보러 왔을 뿐인데. 시스템의 적극성에 칭찬해야 할지 욕을 해야 할지…….

이렇게 되면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잖아. 저거 안 닫으면 한우주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 같이 사는 건 나뿐인데 당연히 날 의심하겠지. 멋대로 들어와서 남의 서랍 멋대로 뒤진 뒤 닫아 두지도 않은 놈으로 보일 거 아니야. 환장하겠네.

한숨이 나왔다. 별수 없이 서랍을 향해 다가갔다. 닫기만 하자. 고개 돌리고, 닫은 뒤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방을 나가는 거야. 그리고 한우주가 어디에 갔는지 알아봐야지.

손끝에 원목 서랍장이 닿았다. 그리고, 비껴간 시선의 끝자락에 익숙한 실루엣이 담겼다. 나는 당혹감에 고개를 돌려 서랍 안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한 물건이 맞는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

이걸 왜 한우주가 가지고 있어?

당혹감에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으로 낯설지 않은 물건을 집었다. 금속의 찬 기운이 피부에 스몄다. 나는 손안의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금방 조작법을 익혔고, 구석에 자리한 버튼을 눌렀다.

[끝까지 사람 빡치게 하시네요.]

……마지막으로 이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더라. 기억 한편에 얕게 묻혀 있었는데.

[항상 그런 표정이더라. 왜요? 내가 쥐어 패기라도 할 것 같아요?]

왜 지금, 이런 식으로 다시 듣게 되는 걸까.

[그,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듣기 우스웠다. 아니, 지금 내 꼴이 더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잊고 싶은 기억의 조각이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윤태현과 서연준이 들어오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인제야 깨닫는다. 아, 이 녹음기. 화장실에 떨어트렸었구나.

나는 멍하니 자리에 선 채 아직 작동하는 시곗바늘을 들여다보았다.

…녹음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시계를 들어 올렸다.

한숨 소리.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의 것.

한우주의 한숨 소리를 끝으로, 녹음은 끝이 났다.

……왜?

처음부터 한우주가 가지고 있었던 거야? 왜 내겐 아무런 말도 안 했지? 내가 찾아다니는 거 알았잖아. 날 돕기 위해 건네준 물건을 잃어버린 게 미안했고, 또 그 물건이 인하성의 손에 들어갔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한우주가 인하성에게 보복을 한 것도, 애초에 내가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애석하게도 서랍 안에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계를 도로 내려놓고 발견한 것에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하, 하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나는 서랍 속의 낡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 역시 내가 잃어버린 물건이다. 아마도 허지훈에게 연락하려고 했을 때, 금이 간 팔이 미처 아물지 못했을 때. 병원에서 사라졌던 것이 아닌가.

한우주는 알 것이다. 치료와 재활 때 거의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꼬박꼬박 핸드폰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한우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비싼 핸드폰을 사서 내 손에 쥐여 줬을 때는? 한우주에게 폐만 끼친다는 사실에, 부채감에 어쩔 줄을 몰랐을 때는?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켜지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서랍 안에 있었을 테니 방전되었겠지. 숨을 크게 들이키며 핸드폰을 도로 서랍 안에 두었다.

눈앞이 흐렸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지? 소매로 눈을 짜증스레 비볐다. 화가 나서 우나 보다, 싶었는데 달랐다. 화가 난 게 아니다. 그냥…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났다.

가까스로 눈물을 멈춘 뒤에야 서랍 안, 마지막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외장 하드. 이 안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외장 하드를 챙겨 들고 서랍을 닫았다. 달칵, 소리가 나며 서랍이 잠겼다. 애초에 잠겨있던 서랍이구나. 내게 숨기려고 한 게 맞았어. 시스템이 아니었으면 영영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이게 답인가? 한우주의 속내에 대한 답이 이거냐고.’

그래서 뭐야? 한우주는 나를 엿 먹이려는 게 맞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부정하고 싶었다. 손안의 외장 하드를 꼭 쥐고, 한우주의 방을 나서 손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직, 아직은 모르는 일이야.”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합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우주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우주인데.

이 와중에도 나는 한우주가 사 준 핸드폰을 쥐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 밤에 말도 없이 사라진 한우주가 여전히 걱정된 탓이다.

「조현우: 어디야?」

발송 버튼을 눌렀다. 머리가 저릿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많은 것들이 휘몰아쳤다.

이런 때마저 한우주를 걱정하는 것. 모든 걸 부정하고서라도 믿고 싶은 것. 함께 한 기억들. 우스꽝스러운 테스트. 그 끝에, 시기가 그릇된 깨달음이 따랐다.

……설마, 나도 한우주를 좋아했나? 그래서 이렇게 간절한 거야? 제발 아니었으면, 한우주가 내 앞에서 한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이 아니었으면, 하고.

젖어 든 뺨은 마를 줄을 몰랐다.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좋아하고 말고 무슨 상관이야. 아무렴 이제는 관련 없다.

정말 그랬더라도, 내가 한우주를 좋아했더라도… 이제는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미치고 싶지 않으면, 그래야 한다.

이제야 겨우 존재감을 드러낸 감정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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