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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05화 (105/150)

105화

10. 등잔 아래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챙겨 둔 외장하드가 들어 있는 가방을 한 번 꾹 쥐었다가, 등에 멨다. 그리고 한우주에게 스쳐 가듯 말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차마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오늘 내내 이 상태였으니, 한우주도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겠지. 이런 때까지 나를 감추어 가며 연기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 시간 끌지 말고 얼른 해야 할 일을 마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뒷문을 통해 교실을 나가려는 한우주가 성큼 다가와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너 오늘 왜 그래?”

“…….”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없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러면 들어가서 쉬어야지, 어딜 가려고.”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의 시선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허지훈이 끼어들어 괜히 일이 커지길 바라지 않았다.

“한우주.”

겨우겨우 눈을 맞추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말했다.

“나도 개인적인 용무쯤 있을 수 있는 거잖아.”

한우주가 인상을 구겼다. 내게 화가 났다든가,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거겠지.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야.”

아주 만약에 허지훈의 말대로 네가 날 엿 먹일 생각이었다면… 걱정할 만한 일이긴 하지. 그런데 그런 거 아니잖아. 괜찮을 거야. 간절한 바람을 속으로만 읊었다. 한우주는 자리에 선 채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저녁에 보자.”

진심으로 던진 말이다. 나는 내가 저녁에 다시 한우주를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외장하드 안에 든 게 별것이 아니기를. 시계도, 핸드폰도… 전부 마땅한 이유가 있었기를. 한우주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기를.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나 자신이 호구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우주의 눈을 피했다. 한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면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를 걱정하는 말이 이토록 원망스레 느껴질 날이 올 줄이야.

“저녁에 봐. 기다릴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대로 나는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왔다.

***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한다 싶었건만. 허지훈에게서 온 메시지가 잔뜩이었다. 다음 메시지로 허지훈의 용건을 요약할 수 있겠다.

「허지훈: 너 괜찮냐?」

「허지훈: 어디야?」

「허지훈: 괜히 혼자 청승 떨지 말고. 옆에 있어 줘?」

나는 짧게 답장한 후 눈앞의 건물에 들어섰다.

「조현우: 나 괜찮아. 걱정 고마워.」

피시방은 하교를 마치고 온 학생들로 북적했다. 눈으로 주변을 훑은 뒤, 그나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구석 끝자리를 찾아 앉았다. 가까이 위치한 흡연실에서 담배 냄새가 새어 나와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사실 지난번처럼 오재영이나 강준희에게 신세 져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곁에 누군가를 두고 싶지 않았다. 저조한 기분 탓에 괜히 엄한 데 성질이라도 부릴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 둘은 내 태도가 이해가 안 가도 결국에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 주겠지. 그 순간에 느낄 자괴감을 견딜 자신이 없다.

‘그만 생각해.’

피시방 컴퓨터는 아까부터 켜져 있었다. 얼른 용건이나 마쳐야지. 가방에서 외장하드를 꺼내 본체의 USB 포트에 꽂아 넣었다. 컴퓨터는 금방 하드를 인식했고, 외장하드의 데이터가 표시된 창이 하나 떠올랐다.

그 안에는 단 하나의 폴더만 덜렁 놓여 있었다.

「새 폴더」

이름조차 손대지 않았구나. 어쩐지 한우주답다고 생각해 버렸다. …정신 차리자. 고개를 내저으며 폴더 위로 마우스 커서를 올렸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용기 내어 클릭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달칵, 달칵.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심호흡한 뒤, 겨우 눈을 떴을 때 나는 헛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달칵, 달칵.

손도, 눈도 쉴 새 없이 분주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수월했다. 나는 모니터에 떠오른 데이터를 빠르게 읽어 냈다. 한우주가 숨겨 둔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5분 만에 하드 속 데이터를 낱낱이 파악하곤, 외장하드를 꺼내 가방에 다시 넣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 …그럴 수밖에. 한우주의 외장하드 안에 있는 것들은, 내가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것들이니까.

담배 냄새가 풍기는 장소를 빠져나와 참담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우주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추측만으로 넘어가긴 싫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우주의 집으로 향했다.

***

“왔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우주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거실 테이블을 흘끔거렸다. 한우주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왜 제 방에 들어가서 하질 않고 거실에서 이러고 있나. 평소 같으면 ‘설마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하고, 우습기 짝이 없는 의미 부여를 하려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가방을 거실 테이블 옆에 내려놓고, 한우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침부터 계속 기분 안 좋아 보이네.”

한우주는 풀던 문제집을 덮고 테이블 구석에 치워 뒀다. 시선도, 말도, 전부 내게 집중하려는 듯이. 한우주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너 담배 냄새난다.”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내가 한우주를 좋아했다는 것을.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진짜 바보 같다.

“한우주.”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우주는 대답 없이 나를 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왜?”

피시방을 나오고, 한우주의 집에 걸어오기까지. 엘리베이터에 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입이 먼저 움직였다.

“네가 말했잖아. 일주일만 더 생각해 보라며.”

한우주는 내가 무얼 말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할 말도 예상했나 보다. 굳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해야만 했다.

“그거 그냥… 오늘까지로 하자.”

“…….”

“더 생각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조현우.”

“그 말 하러 온 거야. 솔직히….”

머리가 아파 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피가 몰린 것인지, 얼굴이 뜨거웠다.

“솔직히 우리 상황 좀, 많이 이상하잖아. 이런 거 이젠 그만하자.”

“도대체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시선을 들어 한우주를 살폈다. 보기 드물게 격양된 모습에 당황스러웠으나 나만은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해야 했다.

“한우주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제대로 좀 얘기해 봐.”

“……직접 말하게 할 거야?”

몇 마디나 나눴다고, 벌써 피로감이 확 끼쳤다. 한우주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가슴이 갑갑했다.

“나 네 서랍 봤어.”

“…뭐?”

“네가 서랍 안에 숨겨 둔 거 봤다고. 시계랑 핸드폰에 외장하드까지, 전부.”

“…….”

“이유는 굳이 안 물을게. 나도 잘한 거 없으니까.”

정확히는 조현우가 잘한 게 없는 거지만.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한우주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땅에 떨궜다. 그대로 테이블 옆 가방을 끌어왔다. 그 안의 외장하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래, 허지훈의 말이 맞았다. 이 외장하드에 든 것을 보고 확실히 알았다.

한우주는 조현우가 자신을 스토킹한 걸 알고 있다. 그냥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다.

조현우가 자신을 스토킹한 증거, 조현우가 찍은 사진들, 조현우가 쓴 글까지. 모든 것의 사본이 외장하드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우주는 그걸 제 방 서랍에 감춰 둔 채 조현우를, 조현우의 몸을 한 나를 제 곁에 두고 있던 것이다.

무던하게 넘기고 싶었는데. 닥쳐오니 눈가에 점점 열이 올랐다. 오늘은 더는 안 되겠다. 한우주 앞에서 이 이상 꼴사나워지고 싶지 않다. 애초에 무너진 자존심을 꾸역꾸역 지키려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웠어. 덕분에 그동안 잘 지낸 건 사실이니까.”

그대로 현관으로 향하려던 때였다. 한우주가 다급히 일어나 내 팔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혹감에 찬 검은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거 놔줘.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우주의 표정에 절박함이 비쳐 보이는 것은, 분명 나의 착각일 것이다.

“왜….”

한우주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했다. 전부 다 알고 나를 들인 것이라면… 떠오르는 이유는 한 가지뿐인데. 허지훈의 말마따나 조현우를 조롱하기 위해서, 거기에 재수 없게 내가 휘말려서. 그래서 이 꼴이 난 것 아닌가? 여기서 한우주가 느낄 감정은 기껏해야 통쾌함, 혹은 제 예상보다 일찍 눈치챈 나에 대한 유감 정도가 아니겠느냐고.

“왜, 네가 나가겠다는 건데? 뭐 때문에?”

“…뭐라고?”

머리도 좋은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설마 아직 날 놀리려 드는 건가?

“시계 때문에? 핸드폰 때문이야? 그건, 그건… 설명할 수 있어. 내가….”

한우주는 이제 말까지 더듬었다. 나는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한우주가 숨겨 둔 시계와 핸드폰. 분명 이유 중 하나는 되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우주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일단 팔을 붙든 한우주의 팔을 떼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떼어 내려 할수록 힘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나는 결국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말했다.

“한우주 너 왜 이래? 정말 내가 말해야 알겠어? 아니잖아.”

“…말해.”

“……스토킹.”

“…….”

“알고 있었잖아. 처음부터, 전부다. 그런데 모른 척 나를….”

한우주가 말을 끊고 들었다.

“모른 척한 적 없어.”

“뭐?”

“맞아. 조현우가 나 쫓아다닌 거 알고 있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어.”

한우주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조현우가’ 한 것을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게 왜?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곧 이어진 말에, 나는 디딜 곳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한우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향해 말했다.

“네가 한 짓도 아닌데 왜? 너… 조현우 아니잖아. 나랑 같이 지내는 동안 조현우였던 적…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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