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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07화 (107/150)

107화

꿉꿉한 공기에 불쾌감이 확 끼쳤다. 한우주가 그토록 싫어했다던 조현우가 지낸 곳이라는 걸 떠올리니 어쩐지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방 안 가득 찬 울적함을 조금이라도 몰아내고자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밤의 찬 공기가 들어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기침이 나왔다.

“야. 감기 걸려.”

허지훈이 다가와 창문을 반쯤 닫았다. 나는 그런 허지훈을 멍하니 쳐다봤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허지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전보다 더 많아졌다. 시선을 느낀 허지훈이 내 쪽을 돌아보며 눈썹을 좁혔다.

“왜 그러냐?”

“…아니, 그냥. 넌 여기 왜 있나 해서.”

“뭐야. 불편해?”

“그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네 집 가 있는 게 훨씬 편할 텐데.”

“아, 우리 집 가자고? 그것도 괜찮네.”

“아니?”

한우주도 그렇고 허지훈도 그렇고. 조현우가 좀…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싶은 관상인가? 다들 왜 이래?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늘의 나는 정말이지,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애먼 허지훈에게 성질내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기에, 솔직히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가려면 너 혼자 가…. 멀쩡한 집 두고 왜 여기 와서.”

“…새끼, 서운하게 굴기는.”

허지훈이 혀를 차며 아예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혼자 두면 질질 짤 것 같아서 그런다, 왜.”

“질질 짜기는 누가….”

부정하기도 지쳐서 말을 멈추고 방바닥에 대충 주저앉아 버렸다. 공기가 찼다. 무릎을 끌어모으자 허지훈이 인간이 도구를 써야지, 아예 미련 곰탱이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거냐며 핀잔을 줬다. 말하며 벽장 안에 담요를 꺼내 건네주는 바람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허지훈이 내게 잘해 줄수록 나는 점점 더 기분이 묘해졌다. 허지훈이야말로 날 조현우로 알고 잘해 주는 게 아닌가. 내가 조현우가 아닌 걸 허지훈이 안다면… 솔직히 큰일 날 것 같다. 조현우 내놓으라고 화를 내지 않을까? 그래도 몸은 조현우 거라 멱 잡힐 일은 없겠다. 쓸데없는 생각을 물리고, 나는 정말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허지훈.”

“왜.”

“너 진짜로 왜 여깄…어?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뭘 이런 데 이유를 따지냐?”

“따질 수도 있지. 솔직히 내가 너였으면….”

내 절친한 친구 녀석이 알고 보니 스토킹이나 저지르고 다녔다고 하면 솔직히 나는 계속 친구 못 할 것 같다. 그냥 관계 끊는 수준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다.

“신고했을 것 같기도 하고.”

“인마, 내가 널 왜 신고하는데?”

“허지훈…. 너 스토킹이 범죄인 건 알고 있는 거지?”

“누굴 바보 취급해?”

허지훈은 앉은 자리에서 턱을 괸 채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모르겠다.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거 실감할 때마다 존나…… 기분 이상해.”

속상함과 분노, 그 언저리의 감정에서 허지훈은 길을 잃은 듯했다. 그 와중에 나는 오늘 한우주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우주 보다는 허지훈이 조현우를 더 잘 알 텐데. 그런 허지훈은 날 보고 ‘기분이 이상한’ 수준에서 그치고 마는 걸까? 기억을 잃은 조현우라면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완전히 납득한 건가?

사실은 내가 조현우 흉내를 썩 나쁘지 않게 낸 걸지도 모르지. 한우주가 워낙에 유별나서 귀신같이 알아챈 거고…. 심란함에 참지 못한 물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허지훈. 나 말이야, 전이랑 그렇게 많이 달라?”

“…뭐?”

“다른 사람 같아 보일 정도로? 나… 많이 이상해?”

표정을 굳힌 허지훈은 잠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단호한 투로 말했다.

“아니.”

“…아니라고?”

“어.”

“나 솔직히, 내가 저지른 짓 생각하면 열받아. 그냥 내가 날 패고 싶을 때도 있어.”

“야.”

“혐오스러워.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개새끼. 상또라이….”

“그만해.”

조현우를 떠올리자 속에서 끓던 감정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여전히 조현우가 밉다.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무조건 편들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난… 허지훈 너도 이해 못 하겠어….”

“…….”

허지훈에게 성질부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됐다고. 좀처럼 감정이 주체되질 않았다. 몇십 분 전의 내가 걱정한 일을 그대로 하고 앉았다.

허지훈은 가라앉은 시선을 내렸다. 어딜 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그냥… 미안하다고, 내가 오늘 많이 예민한 모양이라고. 그렇게 말한 뒤 내보내는 게 맞겠다, 생각한 참이었다.

“사람 오래 살잖아. 한 번쯤 엇나갈 수 있는 거 아니냐?”

“……뭐?”

“또 안 그러면 되지 않냐고. 너 정신 차리게, 또 안 그러도록 내가 옆에서 봐 줄 테니까 자책 좀 작작 해.”

기가 막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러면 한우주는 뭐가 돼? 걘 가만히 있었는데, 살면서 어쩌다 한 번 엇나간 조현우가 저지른 짓에 휘말린 한우주는? 분에 차 반박하려던 때였다.

“한우주랑은 최대한 멀어지고. 너 오늘 한우주랑 뭔 일 있었지?”

확신하는 투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새… 한우주도 너 한 달 넘게 갖고 놀았잖아. 걔도 존나 정상은 아니야. 어떤 인간이 자기 스토킹한 놈 엿 먹이겠다고 옆에 끼고 다니냐?”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우주는 조현우가 아니라 날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걔 조현우 갖고 놀 정도로 할 짓 없지 않아.

……미치겠네. 나 왜 발끈하고 있지?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푹 숙였다. 찾아온 정적이 어색했다. 장판만 죽어라 노려보고 있자면 허지훈이 말을 건넸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가볍게 말하려는 티가 났다.

“그리고 뭐, 내가 이해가 안 간다고? 어이가 없네. 받은 거 돌려주려고 그런다. 왜.”

“뭔….”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허지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사고 쳤을 땐 네가 도와줬거든?”

“……사고?”

“어. 생긴 대로 막 지냈을 때.”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아연해 있었다. 허지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꺼냈다. 중학생 때, 조현우와 허지훈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내가 그때 가출하고 인생 포기한 새끼처럼 난리 쳤는데….”

“뭐?”

“야. 반응 너무 잘하지 말고 가만히 좀 들어 봐.”

허지훈은 예전 이야기를 꺼낼 때 유독 자주 웃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저 미소만 띤 채, 사뭇 진지한 얼굴로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아마 허지훈은 ‘나도 이런 때가 있었다.’라며 죄책감을 덜어 주려고, 또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조현우를 도우려 드는지 이해시키기 위해 꺼낸 이야기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들을수록 허지훈과 조현우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굳이 따지고 들 필요도 없이, 둘은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허지훈이 가출한 건 부모님 때문이다. 허지훈은 그 인간들 손이 참 가벼웠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허지훈이 폭력을 이야기하는 걸 알고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들은 허지훈이 집을 나간 걸 알고도 굳이 찾지 않았다. 허지훈은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보고 자란 게 있어서 그런지 주먹을 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자책감에 시달릴 때도 시비가 걸려오면 기꺼이 치고받고 싸웠다. 그런 식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풀었나 보다.

조현우는 허지훈의 사정을 굳이 깊게 묻지도 않고 멋대로 도움을 줬다고 한다. 쉼터를 소개해 주거나, 저의 집에서 머물게 해 준다거나. 언젠가 허지훈이 ‘왜 이렇게 도와주느냐.’라고, 나와 비슷한 질문을 던졌을 때 조현우는 ‘사람들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그러니까 비슷한 처지인 사람끼리 도와야지….’라고 대답했다고 했단다.

……아무튼, 방황하던 허지훈을 조현우가 도왔고, 고등학교 입학할 즈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외할머니가 허지훈을 데려갔다는 이야기다. 끝에 허지훈은 이렇게 말했다.

“와, 새끼.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나 보네.”

부러 가볍게 말하는 티가 물씬 났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허지훈은 말을 마치곤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제집처럼 이불을 펴고 드러누웠다.

밤이 늦어 나도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아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뜬 눈으로 천장만 쳐다보다가 문득 허지훈을 불렀다. 허지훈이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더러 바보니, 호구니 어쩌고 하더니. 네가 제일 바보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조현우의 일에 너무 힘들이지 말라고. 조현우가 네게는 좋은 사람인 걸 알겠지만, 한우주에게는 아니라고. 애초에 너희 둘… 조현우과 허지훈의 일은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많은 말들이 속에서만 맴돌았다.

“아니, 그냥… 잘 자라고.”

“뭐야, 새끼. 싱겁기는.”

밤이 깊어 갔다. 허지훈이 먼저 잠들었고, 나는 한참 뒤 깊은 새벽이 되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자꾸만 한우주 생각이 난 탓이다. 나는 가상의 한우주를 만들어 내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야. 허지훈은 내가 그냥 조현우인 줄 알아. 넌 진짜 어떻게 안 거야?

야. 조현우도 예전엔 꽤 좋은 일 하고 다녔다더라. 넌 상관도 안 할 것 같지만. 그냥 그렇대.

야, 한우주. 너 내가 널 좋아하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지? 진짜 얄미운 자식.

……야.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냐? 나 왜 이러고 있냐.

다 모르겠고, 전부 너 때문이라는 것만 알겠어.

끔뻑,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잠들기 직전엔 나도 모르게 한우주 걱정을 하고 말았다. 잠을 설치고 있는 건 아닐지. 아니, 취소다.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일을 겪고 아주 잘 자 버리면 그것도 꽤 열받는 일이다.

내가 원래 이렇게 꼬인 인간이었던가…. 아마도 아닐 텐데.

마지막의 마지막에도 나는 한우주 탓을 했다. 걘 진짜… 여러 의미로 나빴다.

한우주가 밉다.

***

꼭 학교에 가야 할까? 가면 한우주를 봐야 할 텐데. 어차피 봐야 하는데 뭐 어때, 싶으면서도 그냥 전부 피하고 싶었다. 아마 혼자였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조현우 집에서 뭉그적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허지훈은 내 생각보다 훨씬 성실해서, 무려 조현우 집에 교복까지 챙겨 오셨더라. 덕분에 나는 허지훈과 함께 등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우주가 오늘 학교에 안 나오거나, 지각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우주는 요즘 아침 일찍 눈 뜨면서도 침대에서 나오긴 싫어했다. 내가 꼭 방에 들어가 일어나라고 잔소리를 해야 일어났다.

‘오늘은 제발 일어나라고 재촉할 사람도 없으니… 역시 지각하려나?’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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