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08화 (108/150)

108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한우주와 눈이 마주쳤다. 한우주는 나 보다도 먼저 등교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를 향한 한우주의 눈길이 옆으로 옮겨 갔다. 나는 교실에 선뜻 들어서지도 못하고 한우주와 시선만 주고받았다. 그러나 허지훈은… 아주 당당했다. 한우주가 저를 보자 대놓고 인상을 구기더니 보란 듯 나를 붙잡고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할,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미치겠다. 나는 재빨리 허지훈에게 붙어 속삭였다. 절대 싸우지 마. 대답은 듣지 못했다. 한우주는 그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잠깐 비켜 줄래.”

한우주가 허지훈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폭풍전야 같은 건가? 허지훈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한우주의 웃는 얼굴에 면역이 없는 것 같았다. 저 화사한 웃음에 당장이라도 퇴치당할 것 같은, 질린 표정이다. 이내 허지훈은 고개를 내저으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왜. 뭐 하려고.”

“아… 혹시 둘이 뭐 볼 일 있어?”

“……아니?”

“난 볼 일 있어서 그런데…. 별건 아냐. 돌려줄 게 있어서.”

“…그러냐?”

“응.”

“……그래라?”

한우주는 얼굴에서 미소 한번 거두지 않았다. 무려 허지훈과 대화하면서 말이다. 나까지 소름이 돋았다. 허지훈은 불안하게 나를 흘긋 보고는 제자리에 찾아가 앉았다. 세상에, 이건 진짜 뭐… 퇴치당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얼떨떨하고 황당해 자리에 굳어 있자, 한우주가 내 손을 잡아 손가락을 폈다. 그리고 핸드폰을, …조현우의 핸드폰을 그 위에 올렸다.

“충전해 놨어.”

“어?”

“돌려 달라고 했잖아.”

“…그, 그랬지.”

한우주는 얼빠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또 한 번 웃어 보이곤 자리에 돌아갔다. 내가 꿈을 꾸나? 한우주 어디 아픈가? 한우주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갔나? 여러 추측이 머릿속에 어지러이 떠다녔다.

한우주의 앞자리에 앉아, 돌려받은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할 즈음이었다. 톡톡, 뒤에 앉은 한우주가 검지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우주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한우주의 고운 얼굴을 마주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착하게 굴면.”

한우주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한 겹 그림자를 드리우며 팔랑거렸다.

“다시 날 좀 봐 줄까 싶어서.”

말을 마치자, 한우주는 순순히 몸을 뒤로 뺐다. 나는 바로 몸을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건 또 무슨 고문이지? 한우주의 속을 알 수가 없다.

그날 수업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한우주를 좋아해선 안 돼. 바보같이 넘어가지 마.’ 이 말만 속으로 수백 번을 읊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우주를 좋아하고 있고, 넘어갈 여지가 충분하다 못해 넘쳤기 때문에 나 자신을 세뇌라도 하려고 든 것이다.

이런 일상이 꼬박 이틀간 반복됐다. 허지훈도 차마 뭐라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우주는 말 그대로 너무나 ‘착하게’ 굴었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우주를 대놓고 피해 다녔다. 대화를 적게 하고, 가끔 뒷자리에서 자고 싶어 하는 같은 반 애랑 자리도 바꿔 앉았다. 이것이 한우주에게서 나를 지키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역시 답은 아니었다. 한우주와 나 사이의 합집합을 고려하지 못한, 부실한 대응이었다.

***

“현우야.”

손깍지를 낀 채 책상 앞에 앉아 한우주에 대한 분노를 상기했다. 처음부터 전부 다 알면서 모른 척한 사실을, 시계와 핸드폰을 숨겨 온 것을. 최근에 위험한 생각이 든 탓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한우주가 왜 시계와 핸드폰을 숨겼을까? 굳이 그 이유를 들어 주고 싶어진 것이다.

“현우야?”

나는 분명 화가 났었다. 슬펐고, 배신감이 들었고… 상처받았다. 그로부터 고작 사흘이 지났는데. 믿을 수가 없다. 그 모든 강렬한 감정들이 이렇게 금방 무뎌질 수 있는 것이었나? 나는 언젠가 반드시 한우주를 떠나야 할 것이고, 한우주가 상처받을 가능성을 떠올리면 그나마 있던 분노도 침잠했다. 요즘은 이렇게 억지로라도 기분을 억눌러야 했다.

“현우야!”

“으, 응?!

퍼뜩 고개를 드니 서연준이 날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연준은 부쩍 어색해진 한우주와 내 사이를 자주 걱정했다. 지금은 한우주가 자리를 비우고 없으니 서연준의 추궁은 오롯이 나에게 쏟아졌다.

“역시 무슨 일 있었던 거지?”

“뭐, 뭐가?”

“이상하잖아. 요즘 한우주랑….”

“…딱히?”

“한우주가 혹시 불편하게 해?”

정곡을 찔린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그런 거….”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같잖은 변명이 쏟아졌다.

“그냥 내가 요즘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만사 다 귀찮고, 사람 못 믿겠고. 무력하고 가끔 슬프고 화도 나고…….”

“현우야.”

“응?”

“그거 심각한 거 아니야?”

“……응? 아니, 아니야. 안 심각해.”

나는 방금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요즘 이렇게나 정신이 없다. 흘끔 서연준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후회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서연준의 표정이 더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내 내게 던진 질문들에서 나의 정신 상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말겠다는 어떤 결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대답을 회피하고 또 회피하다가 그냥 말 말고 몸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간절한 바람을 실현시키기 직전이었다.

“아, 이 답답한 놈아! 너 때문에 내가 아주—!”

복도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다름 아닌 임도윤의 것이었다. 임도윤은 요즘 자주 한우주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끝에 가선 늘 임도윤이 분노해 한우주에게 무어라 소리를 질러 댔다.

“미안, 현우야. 나 가서….”

“응. 얼른 가. 제발 좀 말려.”

“또 보자.”

그리고 수습은 꼭 서연준이 했다. 흥분한 임도윤을 말릴 수 있을 만큼 친분이 있는 이는 학교에서 서연준이 유일할 것이다.

하여간에 요즘엔 임도윤 쪽도 신경 쓰여 죽겠다. 이벤트 갱신이 없는 걸 보니 한우주와 임도윤의 개인적인 일보다는… 가정사가 얽혀 있는 것 같았다. 얼핏 듣기론 임도윤이 아버지의 전령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듯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팍팍한 일상이었다.

‘…….’

아니, 좋은 일이 하나 있긴 했다. 남은 ‘HELP’ 기능을 사용해 월세를 해결했다는 것. 이놈의 시스템은 정말로 내 일상에 필요한 정도로만 도움을 주더라. 천만 원, 일억 원을 요구하면 입을 싹 닫더니… 월세라도 내게 해 달라고 비니까 그제야 말을 들어줬다.

이게 좋은 일인가? 돌이켜 보니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

바로 다음 날인 23일 금요일, 서연준이 또 반에 찾아왔다. 요즘 서연준은 이 정도면 그냥 반을 옮기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우리 반에 자주 찾아온다. 가끔은 귀찮았지만, 이번에는 몹시 반가웠다. 마침 한우주가 내게 말을 걸려던 때에 등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현우야.”

…이번에도 날 찾아온 거구나. 나의 본래 목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서연준은 정말로, 한우주에게 연애적인 관심이 한 톨도 없었다. 단 한 톨도. 웃는 것으로 대신 인사하자, 한우주가 인상을 구겼다. 한우주는 벌써 ‘착하게 구는 것’에 한계가 온 것인지, 가끔 이렇게 표정 관리에 실패한다. 서연준이 한우주에게도 가볍게 인사했다. 한우주는 인사를 받는 듯 마는 듯 건성건성 한 태도를 보였다. 미치겠다. 저러니까 서연준이 한우주를 안 좋아하지…….

둘은 서로에게 연애적인 관심이 없으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얼마나 성의 있게 하느냐 따위에 신경 쓸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그런 둘을 지켜보며, 내가 살면서 쓰레기를 무단 투기한 적이 있던가. 초등학생 때 분실물 함에 있던 지우개를 훔친 게 문제였나. 사실은 전부 나의 문제인가, 하고 업보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서연준이 내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놨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혹시 내일 일정 있어?”

“어? 없는데…. 왜?”

“잘됐다. 현우 너 요즘 기운 없었잖아. 같이 놀러 가면 좋겠다 싶어서. 기분 전환도 되고.”

“응? 뭐?”

“마침 티켓이 생겼거든.”

티켓… 무슨 티켓…? 어리둥절해 내려다보니 놀이공원 자유 이용권 두 장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서연준 얘 지금 나랑 놀이공원을 가자고 드는 것인가?

“네 동생이랑 가.”

한우주가 서연준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한우주 저거 진짜… 차라리 자기도 껴 달라고 해라. 서연준은 한우주의 냉담함에 얼마나 익숙해진 건지 타격 없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동생들은 이미 다녀왔어. 티켓이 남아서 그래.”

“그걸 왜 굳이 쟤랑 가려고 해.”

“아… 현우가 저번에….”

서연준은 말하다 말고 돌연 내 얼굴을 살폈다.

“그냥.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러곤 웃으며 얼버무렸… 뭐라고?

“뭐라고?”

한우주가 정확히 같은 말을 했다.

“같이 가고 싶어서. 안 되나?”

“안 되지, 그럼.”

“왜 안 돼?”

“그냥 안 돼.”

황당했다. 왜 내가 놀이공원에 가고 말고에 대한 이야기를, 나를 제외한 한우주와 서연준 둘이서 하고 있는가? 한우주가 언제부터 내 입 역할을 했던가? 어이없고 분한 마음에 한 마디 지르고 말았다.

“갈게.”

“뭐?”

“진짜?”

한우주는 이제 착하게 굴겠다는 말은 완전히 잊었나 보다. 저거, 표정 봐라. 저러다 누구 한 명 패겠다. 나는 부러 한우주 쪽을 보지 않고 서연준과 마주 보며 말했다.

“응. 어차피 주말에 할 것도 없어. 놀이공원 안 간 지도 오래됐고….”

서연준은 반색하며 이따가 메시지로 어디서 언제 만날지 정하자고 실컷 떠들어 댔다. 그러다 종 칠 때쯤 한마디 덧붙였다.

“다행이다. 한우주는 사람 많은 곳 싫어하니까…. 누구랑 가나 싶었는데.”

뭐야, 한우주도 후보에 있긴 했던 거야…? 사실 한우주 연애에 가장 방해가 되는 건 나 자신이 아닐까. 서연준은 남의 마음을 복잡하게 해 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서연준이 떠나기 무섭게 한우주가 말했다.

“가지 마.”

“…어딜.”

“놀이공원.”

“왜?”

“그냥 가지 마. 재미도 없고, 사람만 많고.”

“난 사람 많은 곳 좋아해. 그리고 재밌거든.”

“……야.”

요즘 한우주는 둘만 대화할 땐 나를 조현우라고 부르지 않는다. 덕분에 야, 야 소리만 계속 듣고 있는데…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묘했다. 나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한우주를 흘겨보곤 말했다.

“착하게 굴겠다고 했으면서. 하나도 안 착해.”

“…….”

“거짓말쟁이.”

한우주는 그날, 더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어쩐지 얼굴에 그림자가 한 겹, 아니 두 겹은 더 드리운 것만 같이 어두운 낯을 하고선 한숨이나 쉬다가, 어김없이 찾아온 임도윤에게 불려 나가기만 했다.

한우주는 정말 바보스럽다. 요즘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내일은 한우주 생각 하나도 안 하고 실컷 놀아야겠다. 미연시… 뭔… 플레이어 같지도 않은 거… 하루 파업하련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