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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11화 (111/150)

111화

사람이 사람과 친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음식 궁합이다. 서연준은 누구와 다르게 거리에서 파는 추로스를 아주 잘만 먹었다. 게다가 카페에 와선 나와 같은 음료인 복숭아 에이드를 시켰다. 내가 먼저 메뉴를 골랐다면 다소 꺼림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먼저 메뉴를 주문한 사람은 서연준이었다. 추로스, 복숭아 에이드, 또 과일 와플까지 어엿한 서연준의 취향인 것이다. 그래, 일단 서연준과 나는 음식 취향이 비슷했다.

“한우주 너는 왜 고집을 부려서는….”

“내가 뭘.”

서연준은 말하며 생크림과 베리류의 과일을 잔뜩 얹은 와플을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냈다. 그러곤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순간 몰려온 민망함은 금방 물러났다. 서연준에게는 그 어떤 의도도 없었다. 그저 동생 많은 장남의 버릇인 모양이다. 나머지 두 접시의 와플도 예쁘게 자른 뒤 테이블 적당한 자리에 배치하는 게 아주 노련해 보였다.

“단 거 잘 안 먹잖아.”

“무슨 소리야? 나 음식 안 가리거든. 애도 아니고.”

“…푸흡.”

한우주가 날 선 시선을 던져 왔다.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렇지만…. 세상에서 음식 제일 가려서 먹을 것 같은 녀석이 음식을 안 가린다고 박박 우겨 대니 안 웃고 배기냐고.

한우주는 아까부터 조금 이상하게 굴었다. 정확히는 서연준과 내가 같은 메뉴를 시킨 순간부터 그랬다. 자긴 아무것도 안 먹을 것처럼 무심하게 있던 녀석이 갑자기 나와 서연준과 같은 것을, 복숭아 에이드에 과일 와플을 시켜 버린 것이다. 졸지에 셋이 와서 같은 메뉴를 셋씩이나 주문한 기이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서연준의 말마따나 한우주가 고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자리에 앉자마자 복숭아 에이드를 한 모금 마신 뒤 아메리카노를 새로 주문해 버렸으니 백 프로다.

“이거 되게 맛있는데?”

나는 그런 한우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복숭아 에이드는 정말로 맛있었기 때문이다. 서연준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과육 식감도 좋고. 연아가 추천해서 시켜 본 건데 생각보다 더 괜찮네.”

“아, 연아가? 너희 둘은 입맛 비슷한가 보다.”

“아무래도 가족이니까? 우리 가족은 전부 복숭아 좋아해. 복숭아 들어간 거면 거의 다 잘 먹을걸.”

“와… 부럽다.”

“뭐가?”

“가족끼리 입맛 비슷한 거. 아니, 우리 집은 왜 안 그러지? 뭐 좀 같이 먹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어.”

“진짜?”

“응. 특히 누나…….”

누나와 나는 좋아하는 과일이 겹치는 게 없다. 한껏 풀어진 경계심에 그대로 흘려 말할 뻔했다. 한우주와 서연준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나는 목이 마른 척 에이드를 느리게 빨아 마시며 이 상황을 대충 넘길 수 있기를 바랐다.

“누나? 현우 너 누나 있었어?”

망할…. 글렀다. 돌겠네. 곧장 아니라고 말하려 했는데 말이 잘 안 나왔다. 어쩔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있는 가족을 없다고 부정하긴 싫었다. 차곡차곡 누적된 그리움이 이런 데서 발목을 잡는다. 에이드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고, 얼음이 잔에 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어색한 공기 위로 떠돌았다.

…어떡하지? 역시 시침을 떼야 하겠지?

“누… 누나? 갑자기 누나가 왜?”

“방금 현우 네가 가족 얘기하다가… 누나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

“아닌데?”

“응?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제발 적당히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서연준 쟤도 참 적당히를 모르는 녀석이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떠오른 말을 아무렇게나 뱉었다.

“아니, 눈… 눈알이 아프다고….”

“어?”

“가족 생각하면… 눈가가 뜨겁고… 눈알이…… 막, 그래.”

“……아.”

서연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들었다. 아, 어떡하냐. 분위기 싸해졌다. 목이 타 음료를 빨아 마시려 했지만, 유리컵에 남은 것은 얼음뿐이었다.

“서연준 뭐 하냐.”

내내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한우주가 대화에 껴들었다. 한우주는 아까 전 한 모금 마시고 만 복숭아 에이드를 내 쪽으로 슬쩍 밀어서 건네며 말했다.

“빨리 먹기나 해. 이러다 해 지겠네.”

비약이 심했다. 카페에 온 지 이제 십오 분쯤 되었던가? 갑작스레 타박을 받은 서연준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한우주가 내 장단에 맞춰 준 것 같아 뭐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그 뒤로 나는 또 말실수할까 싶어 최대한 입을 다물었다. 서연준이 간간이 소소한 대화거리를 던져 왔지만, 어쩐 일인지 전부 한우주가 받아쳤다. 그 모습이 나를 배려하려 드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아마도 나의 착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냥… 한우주가 저러니까… 괜히 마음이 복잡하다. 카페를 나설 즈음 내 빨대는 완전히 넝마가 되어 있었다. 언제 저렇게 씹어 댄 건지 나도 모르겠다.

***

이후, 걱정과는 다르게 놀이공원에서 보낸 시간은 꽤, 어쩌면 아주 즐거웠다. 한우주는 바이킹이나 자이로드롭 같은 걸 왜 타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내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게 참… 묘했다. 좋아하지 않는 걸 억지로 하는 티가 났기 때문이다. 서연준과 내가 한껏 즐기며 웃을 때마다 한우주의 얼굴엔 점점 더 그늘이 졌다. 아무래도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건 나와 서연준뿐인 게 분명했다.

나는 그런 한우주를 배려하여 귀중한 휴식 시간을 선사했다. 놀이기구 없는 안전한 기념품 가게에 가자며 둘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냥… 장난삼아서 한우주에게 토끼 귀 머리띠를 씌우려 했다가 경멸 어린 시선만 받아 버렸다. 나름 그보다 무난한 리본 머리띠, 강아지 머리띠, 개구리 머리띠, 양 머리띠 등등을 권해 봤지만 전부 퇴짜 맞았다. 한우주는 결국 질린 얼굴을 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해야 하는 건데?”

“어? 그냥 재밌으니까….”

“별로 재미없어.”

“그, 그런가. 그럼 말고. 미안.”

“…….”

순순히 사과하자 한우주는 눈을 좁혀 뜨며 무어라 말할 듯 입을 움칠거렸다. 이어 시선을 피하곤 작은 한숨만 내뱉었다. 역시 머리띠 같은 건 안 써 주려나 보다. 그래, 뭐. 나도 억지로 씌울 생각은 없었다. 약간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으니까.

그 뒤에 범퍼카에서 나와 서연준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꼼짝도 못 하는 한우주가 너무 웃겨서 섭섭한 마음 따위 전부 잊었다. 게다가 기껏 놀러 와서 시무룩해 있으면 내 손해이기만 하잖아.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둠에 잠길 무렵, 야외 공연을 알리는 알림 방송이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우주의 눈치를 살폈다. 나야 구경하고 싶지만, 야외 공연만큼 사람이 붐비고 소란한 건 또 없을 텐데. 한우주가 즐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 관람차나 타러 갈래?”

고민 끝에 권한 것이 관람차다. 관람차라면 사람도 적고, 높은 곳에서 야경을 구경하며 오늘의 여운을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서연준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공연 안 봐도 괜찮아?”

“음… 응. 조금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내가 관람차를 좋아해서 그래.”

서연준과 내가 마지막 일정을 정하는 동안에도 한우주는 별말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재미없나…. 역시 한우주가 놀이공원에 온종일 붙어 있는 건 무리였나 봐. 관람차 줄에 가만히 서 있자 문득문득 걱정이 들었다. 그때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한우주의 것이었다.

“나 잠깐 자리 좀 비울게.”

“어? 어디 가려고?”

“그냥.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한우주는 대답도 안 듣고 뒤돌아 가 버렸다. 나는 한우주가 못 참고 집으로 탈출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관람차의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됐다. 주변을 두리번 살폈지만 한우주의 그림자도 없었다.

“일단 우리끼리 탈까?”

서연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사이에 한우주가 오면 어떡하지.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낫지 않나…?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아까부터 내가 한우주 생각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가 차고 여러 의미로 열이 올랐다. 머리 비우려고 놀러 온 건데, 한우주가 기어코 쫓아와서 내 기분을 어지럽힌 게 아닌가?

“그래, 타자.”

관람차를 안 타면 아쉽기도 하고, 한우주 생각에 소모한 에너지가 아깝기도 하고…. 사실은 반쯤 오기로 관람차 위에 올랐다. 결연히 고개를 들자, 서연준이 나를 보고 맑게 웃었다.

***

“많이 피곤해?”

나른한 몸을 늘어트린 채 지상과 천천히 멀어지는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연준이 말을 건네 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신나게 논 것치고는 괜찮은데? 음, 그냥….”

“한우주 신경 쓰여서 그래?”

“뭐? 아니? 내가 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펄떡 뛸 뻔했다. 착각인가? 관람차가 내 쪽으로 조금 기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무서워졌다. 서연준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예전에 지금보다 많이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이랑 한우주까지 껴서 놀이공원 온 적이 있거든.”

서연준은 내가 한우주를 걱정하느라 창밖에 정신이 팔린 거라고 혼자 결론지은 모양이다. 그런 거 진짜 아닌데.

“그때도 잠깐 자리 비운다고… 그때는 어리니까 부모님이 혼자는 안 된다고 말렸거든. 그런데 기어코 몰래 빠져나가서 숨어 있던 거야. 놀이기구 타기 싫어서. 우리 부모님만 발칵 뒤집혔지.”

“어…, 진짜? 한우주면 그냥 타기 싫다고 말했을 것 같은데.”

“한우주 어릴 땐 지금보다 좀 더… 음… 수줍었어.”

“…….”

“진짜야….”

어리고 수줍은 한우주. 어른한테 놀이기구 타기 싫다고 말 못해서 숨어 버린 한우주. 생각만으로 웃음이 나왔다. 서연준은 전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덕분에 놀이공원까지 와서 숨은 한우주 찾느라 시간 다 보냈지. 갑자기 어디선가 멀쩡한 얼굴로 나왔을 땐… 안도했지만 어린 마음에 좀 밉기도 했어.”

한우주가 밉다니. 서연준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별개로 이해는 갔다. 지금 서연준 부모님 하는 것만 봐도 제 자식보다 한우주가 우선인데…. 처음부터 그런 부모님의 태도에 의연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우주도 부모님도 밉고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겠지. 나는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며 말했다.

“너 되게 섭섭했겠다.”

“응?”

“아니, 솔직히… 좀… 그렇잖아. 연준이 너 보니까 오늘 되게 잘 놀던데?”

“그, 그랬나?”

“응. 그런데 그땐 한우주 일로 아예 못 논 거 아니야. 한우주가 길을 잃은 것도 아니고, 그냥 숨어 있던 거라고…. 나 같으면 한우주 때렸어.”

물론 어린아이가 사라지면 혼비백산하며 찾는 것이 맞는 반응이긴 하다. 그렇지만 얼마 전 연서 일을 떠올리면 기분이 묘했다. 그때는 연서보다도 한우주, 정확히는 임 회장의 비위를 맞추는 걸 우선시했으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상기하고 있자면 서연준이 소리 내 웃었다.

“맞아. 섭섭했어. 진짜로 섭섭했어.”

서연준 얘는 섭섭했다는 말을 왜 이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하냐…? 피곤한 건 내가 아니라 서연준인 거 아니야? 밝은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서연준이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그땐 그게 섭섭한 건 줄 몰랐어. 그냥 한우주 잠깐 원망하다가… 다들 다행이라고 하니까,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지.”

서연준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말 나온 김에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도 한우주가 조금 미웠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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