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응? 어, 왜?”
서연준이 깔아 둔 멍석 위에 제대로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사실은 이유 따위 묻고 싶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이 가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나의 입을 때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실은 현우 너랑 단둘이 오고 싶었거든.”
“…….”
어느새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관람차의 창밖으로 어두운 밤을 밝히는 조명들의 향연이 화려하게 빛났다. 불길했다. 이 조명, 온도, 습도. 무언가 수상하다. 보통 로맨스물에서 이런 순간에 중요한 이벤트가 나오곤 했던 것 같은데…. 본능이 사이렌을 울렸다. 하필 지금 서연준과 단둘이라고? 이거… 뭔가 좀…?
“티켓도 남은 게 아니라 그냥, 네 생각나서 산 거야.”
“여, 연준아.”
“응.”
서연준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내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 서연준의 말을 멈추고 봤지만 달리 할 말이 있던 것은 아니라 곤란했다.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질 즈음에 관람차는 지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는 반색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우주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미안. 지금 전화가….”
“한우주야?”
“응. 우리 찾고 있는 거 같은데.”
“…잠깐 받지 말아 볼래?”
기꺼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나의 손이 멈춰 섰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관람차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서연준 얘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곁눈질로 서연준을 살폈다. 미소를 거둔 진중한 표정을 보자 핸드폰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연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그 전화 받으면 한우주가 정말 미워질 거야.”
“무슨….”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거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은 단호하게 굴어야 할 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서연준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서연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뒤로 내빼려 하자 서연준이 내 왼쪽 뺨을 감싸 쥐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그저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 어린아이의 호기심 어린 장난과 다름없는 행위라고….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 같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또렷이 보고 말았다. 잔뜩 긴장해 꿈쩍도 못 한 채 굳은 서연준을, 꾹 감은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머리로는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마주하기엔 버거운 마음이 파도처럼 덮쳐 왔다.
아연한 채로 그저 휩쓸릴 수는 없었다. 가슴팍을 짚어 살짝 밀어 내는 것만으로 서연준은 순순히 내게서 떨어졌다. 바로 조금 전에 대범한 짓을 저질러 놓고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곤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에 무어라 할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침묵이 시간을 집어삼키고 우리가 탄 관람차가 지상에 온전히 닿을 즈음에야 서연준이 겨우 입을 열었다.
“……현우 네가 한우주 좋아하는 거 알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목부터 정수리까지 열이 오르는 듯했다. 부정의 말을 뱉으려 했건만 좀처럼 뜻대로 되질 않았다.
“왜, 어? 아니…. 그건 왜, 어떻게?”
‘어떻게’라니. 이건 긍정이나 다름없는 말 아닌가. 연달아 벌어진 일에 머릿속은 완전히 백지장이 되어 버렸고, 말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마구 튀어 나가려 했다. 서연준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애써 만들어 낸 미소엔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냥… 보이던데.”
“그, 그냥? 그렇게 티가 났다고?”
서연준의 충격적인 발언에 당혹감이 말에 섞여 맥없이 흘러나왔다. 서연준은 그제야 평소처럼 밝게 웃어 보였다.
“응. 현우 너 엄청 티나. 뭘 해도 다 티가 나.”
“…….”
“그래서 네가 좋은가 봐.”
서연준이 말하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창밖을 한 번 흘겨보곤 이어 말했다.
“곧 내려야겠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서연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너무 놀란 걸까. 혹은 받아 줄 수 없는 마음에 대한 미안함일까.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관람차는 지상에 닿았고, 나는 급한 대로 사과를 하려 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일인가, 묻느냐면 그건 절대 아니지만… 서연준의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으니까. 거절을 에둘러서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미안.”
그러나 서연준은 거절의 말까지 내게서 앗아 가 버렸다. 나는 바보같이 ‘아니야.’라고 대답해 버렸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관람차에서 내린 뒤 바로 한우주와 합류했다. 서연준은 평소와 한 치 다름없이 굴었다.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수다스럽게 굴었다. 나는 멍하니 있느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한 사람분의 빈 소리를 서연준이 메꿨다. 한우주는 애초에 말이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거의 서연준만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
내가 제대로 인사를 했던가. 두 사람과 헤어진 후 뒤늦게 나의 행보를 돌아보았지만 헛고생이었다. 관람차에서 내린 뒤부터의 기억이 흐릿했다. 발걸음은 기계적으로 조현우의 집을 향했다. 심란함은 구체성을 갖추지 못한 채 깊어져만 갔고, 덕분에 나는 드문드문 한숨이나 내쉬었다. 그렇게 바짝 다가온 발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나 보다.
“야!”
뒤에서 누군가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익숙한 목소리와 종이가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이어 바로 옆 골목에서 오토바이가 튀어나와 앞을 스쳐 갔다. 놀란 심장이 벌렁거렸다.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야구공이었던가….
한우주는 오토바이가 사라진 골목을 노려보며 욕을 짓씹었다. 내 양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눈길에는 여유가 없었다. 나보다 더 놀란 듯한 모습에 되레 나는 점점 침착해졌다.
“나 괜찮아. 네 덕분에….”
“왜 정신을 놓고 다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나는 한우주가 그렇게 말을 빨리하는 건 처음 봤다.
“전화도 안 받고. 내 전화 받기 싫은 건 알겠는데, 주변이라도 잘 살피든가. 자꾸 멍하니 있고 사람 걱정시킬 거야? 너 방금 진짜, 하마터면….”
한우주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말을 멈췄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시선을 떨구곤 내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떼었다.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야. 잘못은 방금 그 새끼가 했지. 나는 그냥…….”
“…미안.”
무척 위태롭고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다른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미안했다. 한우주가 나 때문에 속상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매번 한우주를 속상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한우주는 늘 괜찮았는데. 무엇에든 무던했던 애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전화 일부러 안 받은 거 아니야. 전화한 줄 몰랐어. 정신 놓고 다닌 건, 그냥… 좀 피곤했나 봐.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차마 서연준과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없었고, 말해서도 안 될 것 같아 피곤하다는 말로 대충 때울 수밖에 없었다. 한우주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한우주의 눈을 피하려다 문득 바닥에 시선이 닿았다. 종이 쇼핑백과 그 안에 담겨 있었을 무언가가 아스팔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뒤늦은 의문이 따랐다. 한우주가 왜 나를 따라온 거지? 답은 바닥에 있었다. 심각한 상황인 걸 알면서도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갔다.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우주. 너 설마 이거 때문에 온 거야? 아니… 도대체 이건 언제 사 온 건데?”
“……지금 웃어?”
“아… 미안. 진짜 미안한데 네가 웃게 하잖아.”
한우주는 한숨만 푹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쇼핑백에 주워 담았다. 한우주가 바닥의 물건을 줍다니. 나도 서둘러 곁에 쪼그려 앉아 한우주를 도왔다. 그 와중에도 웃음이 자꾸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바람에 한우주의 눈총을 샀다. 마지막 물건을 담고, 나는 한껏 기대하며 한우주에게 물었다.
“이거 쓴 거 보여 주려고 나 쫓아왔어?”
“…….”
한우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하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겨우 한마디 뱉었다.
“밖에서 쓰긴 싫었어.”
한우주가 어릴 적엔 아주 수줍었다는 서연준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이 크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머릿속에 껴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거두어지고 기대감이 차올랐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잠깐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여기선 조현우의 집이 훨씬 가까웠다. 밖에서 쓰기 싫다는데 아무렴, 그 정도 투정은 들어줘야지.
“그럼 들어가서 보여 줘.”
나는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한우주는 대답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속상한 마음이나 이런저런 고민거리보다도 당장 눈앞에 놓인 달콤한 것이 마음에 크게 와닿아서, 차마 마다할 수 없었다.
한우주가 잔뜩 들고 온 것은 다름 아닌 머리띠였다. 토끼, 강아지, 개구리, 양, 리본… 내가 권했던 것들이 전부 들어 있었다. 머리띠 써 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들어 보니 관람차 줄을 이탈한 것도 기념품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얼른 사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단다. 거길 돌아가 혼자 머리띠를 잔뜩 계산했을 한우주를 상상하니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너랑 서연준은 없고….”
조현우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한우주는 내게 말 못 한 것들을 털어놓으며 한껏 칭얼거렸다. 그 모습이 내겐 마냥 귀여워 보여서,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문득 이거 정말 큰일인데, 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모르겠다. 일단 한우주가 머리띠를 쓴 모습을 마음껏 감상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한 시간쯤 늦게 생각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나 자신에게 변명했다. 조현우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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