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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13화 (113/150)

113화

낡은 빌라 앞에 선 한우주의 눈이 샐쭉거렸다. 나는 한우주가 집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금세 말짱한 얼굴을 하고선 조용히 내 곁에 서 있기만 했다. 아마도 ‘이게 사람 사는 곳이냐.’는 맥락의 말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한우주가 가까스로 참아 냈을 말을 가늠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조현우가 사는 원룸은 한우주의 오피스텔 손님방보다도 훨씬 좁았다.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을 모시고 말았다는 생각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 어서 와. 내 집은 아니지만. 아, 혹시 전에 와 본 적 있어?”

“아니. 내가 조현우 집에 왜 와?”

가라앉은 목소리에 새삼스레 실감했다. 한우주 얘 조현우 진짜 싫어하는구나….

“으응, 그러네. 대충 편한 데 앉아. 미안한데 딱히 내올 건 없다…? 라면 먹기는 싫을 거 아니야.”

한우주는 ‘대충 편한 곳’이 어딘지 당최 모르겠다는 듯 방황하다가 나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너 라면만 먹고 지내?”

“……밥이랑 김치도 먹어.”

한우주의 낯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나는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며, 한우주를 방의 중앙 즈음에 억지로 앉혔다.

‘데려오지 말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따랐다. 머리띠에 정신이 팔려 한우주가 살아온 삶과 가치관을 고려하지 못했다. 한우주… 반지하 방 처음 와 보는 거 아니야? 충격받은 건 아니겠지. 얼른 용건 마치고 집에 보내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장소는 한우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문득 가슴이 답답했지만 애써 넘기며 한우주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쇼핑백 안의 머리띠를 하나씩 늘어놓으며 말했다.

“뭐부터 쓸래?”

“…아무거나.”

“아무거나? 그럼 이거?”

내가 고른 건 깜찍한 분홍색의 토끼 머리띠였다. 놀이공원에서도 가장 먼저 집어 들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당시엔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지금 보니 진심으로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한우주야 워낙에 인물이 좋으니까…. 안 어울리는 걸 찾기가 더 어렵겠다.

“뭐 해? 안 쓸 거야?”

한우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만 끔뻑거리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네가 씌워 줘.”

“뭐?”

“직접 쓰려니 민망해.”

참나…,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인가? 본인이 직접 쓰는 건 민망하고, 남이 씌워 주는 건 안 민망한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라고, 속으로만 딴지를 걸었다.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만은 눈감고 들어주고 싶었다. 나는 한우주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토끼 머리띠를 씌워 주었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손에 부드럽게 감겨 왔다. 가슴께가 간지러운 기분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한우주는 내게서 눈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득 눈이 마주치자 낯이 뜨거워져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한우주와 토끼 머리띠의 조합은 내 생각보다 훨씬 어울려서,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변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황급히 입가를 가렸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한우주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이런 게 좋아?”

인제 와서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러게, 나 이런 거 좋아하나 봐. 생각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한우주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나머지 머리띠들을 내게 건넸다. 진짜로 한 번씩 전부 써 줄 생각인가? 한우주 얘 정말 마음먹고 왔구나. 이런 데서 감동하는 나도 좀 웃긴 것 같다. 나는 결국 한우주가 귀여워서 소리 내며 웃음을 터트렸고, 한우주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어떻게든 제자리를 지켰다.

하나하나 머리띠를 씌우고, 웃고, 또 씌우고, 웃고. 한우주가 중간에 그만 좀 하라며 항변했지만 나는 거기에 또 웃고 말았다. 한우주는 이내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얌전해졌다. 사랑스러운 리본 머리띠를 빼고 개구리 머리띠를 씌울 즈음에야 한우주가 입을 열었다.

“……야.”

“응? 개구리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 불편해?”

“아니. 서연준 얘기인데.”

“아……. 응. 연준이가 왜?”

한우주가 갑자기 서연준 얘기를 왜 할까. 관람차에서의 일이 떠올라 멈칫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개구리 머리띠나 씌워 줬다. 개구리야말로 마냥 웃길 줄만 알았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매력 있고 귀엽다. 초록색 개구리 머리띠를 쓴 한우주가 말했다.

“서연준이 너한테 무슨 말 했어?”

“어… 글쎄? 너 어릴 때 되게 수줍었다고?”

“뭐?”

“……별말 안 했어.”

“거짓말한다.”

“아닌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서연준이랑 관람차 탄 뒤로 넋 놓고 다녔잖아. 나 그때부터 머리띠 들고 다녔는데 신경도 안 쓰고.”

명백히 삐친 투라 말문이 막혔다. 그때 당시에 한우주 손에 뭐가 들렸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 이유를 말 못 하겠다. 입만 꾹 다물고 있자 한우주가 미간을 좁혔다. 개구리 머리띠에 달린 눈에 한우주까지. 두 쌍의 눈이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통에 심적 부담이 막심했다. 개구리 머리띠는 씌우지 말 걸 그랬다.

“서연준이 너 좋대?”

“……어?”

“그럴 거 같더라. 나 빼놓고 관람차 타더니.”

“아니. 나 대답 안 했어. 어떻게 확신하는데?”

“너한테 놀이공원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잠깐, 한우주 너 알고 있었어?”

“뭘.”

“연준이가 나 조, 좋아하는 거?”

“그걸 왜 몰라. 대놓고 티를 내는데.”

“도대체 언제? 한우주 너 인간이야?”

“그럼 개구리겠어?”

얘 지금 농담한 건가? 아니, 한우주는 모르는 게 뭐야? 나 역시 이전부터 서연준에게서 이상한 낌새는 느꼈지만,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날 좋아하는 줄은 몰랐을 거다. 한우주는 도대체 언제부터, 뭘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거절했지? 얼결에 알았다고 한 거 아니야?”

“누가 그런 대답을 얼결에 해?”

“혹시 모르잖아. 너 서연준한테는 은근히 잘해 주니까. 꼬박꼬박 연준이라고 부르질 않나.”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나는 성 붙여서 한우주라고 부르면서.”

“잠깐, 잠깐만.”

“난 네 이름도 모르고. 물어봐도 안 알려 주고.”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됐지? 정신이 혼미하다. 얼른 집에 보내야겠다. 머리띠도 개구리가 마지막이었으니까.

“하, 한우주. 시간 늦었다. 피곤할 텐데 이만 돌아가.”

“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 네 용건 끝났으니까 나가라고? 너만 실컷 즐겨 놓고?”

어이가 없다. 즐긴 적 없다며 시침을 떼기에는 머리띠를 씌우는 내내 지나치게 히죽대는 바람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고. 게다가 그럼 뭐야, 목적 있어서 머리띠 써 준 거야?”

“응.”

“와, 한우주 음흉해.”

“맞아. 나 음흉해.”

진짜 사람 할 말 없게 만든다. 머리띠 다 써 놓고 인제 와서 목적이 있었단다. 이거 엄연한 사기 아닌가. 도대체 뭘 바라기에 자존심 버리고 그 싫다는 머리띠를 하나하나 써 준 거지? 불길한 기운이 피부에 스몄다. 본인 입으로 음흉하다고 할 정도면… 도대체 뭐지? 오늘 서연준과 있었던 일 때문인지 상상력이 이상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개구리 머리띠를 바닥에 내려놓는 한우주에게 다급히 말했다.

“뭔진 몰라도 말 좀 미리 하고 할래?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은 좀 그게, 별로더라고.”

“…뭐라고?”

“응?”

“신체 접촉은 무슨 신체 접촉이야.”

미친. 음흉한 건 한우주가 아니라 나였나 보다. 아니다. 이게 다 서연준 때문이다. 오늘 그런 일만 없었어도. 아니, 그보다 이걸 어떡하지. 물은 이미 엎질러졌는데. 한우주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설마 지금 서연준 때문에 이래?”

한우주의 눈치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저 정도면 초능력으로 제보해도 되지 않을까.

“진짜야?”

“아니…….”

한우주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다. 그냥, 속으로 확정 지어 놓곤 믿기지 않아 굳이 되물은 것이다. 솔직히 내가 누구랑 어디서 뭘 하든 한우주가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그렇다고 알려서 좋을 일은 아니었다. 한우주가 헛숨을 뱉었다. 고개를 숙인 채 제 미간을 몇 번 주무르다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그게 다야.”

“…….”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가 자꾸 날 피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그냥…… 부탁하려고 한 게 다라고. 이야기 들은 뒤에 판단은 네 자유니까…….”

“으, 응. 미안. 내가 오해했다. 얘기해.”

“그런데 서연준이 고백만 한 게 아닌가 봐?”

“하, 한우주. 연준이는 됐으니까 네 할 말 해.”

“한우주? 연준이?”

“아니, 야… 입에 붙어서 그래. 이름 부르는 데 별 의미 없어.”

“누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한우주가 낮게 말했다. 눈가를 꾹꾹 누르다가 마른세수를 하는 모습이 몹시도 피곤해 보였다.

“다 알고 있어. 나도 이렇게 유치하게 굴기는 싫은데….”

고개를 든 한우주의 눈빛에 원망이 뒤섞였다.

“네가 나보다 서연준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들려서 짜증 나.”

깊은 한숨 끝에 묵직한 한마디가 뒤따랐다.

“넌 날 더 좋아하잖아.”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확언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가볍게 부정하며 넘어가기엔 한우주가 너무나 심각해 보였다. 누군가가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이토록 가슴 아리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다더니. 한우주의 귀여운 머리띠 쇼를 구경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바보처럼 어쩔 줄을 모르다가 ‘안 피하고 다 들어 줄게. 오늘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가.’라고 말해 버렸다. 한우주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긴장하고 있자면, 한우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은 머리띠를 써 가며 들어 달라 한 이야기는, 다름 아닌 시계와 녹음기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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