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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14화 (114/150)

114화

“내가 바보 같았어. 어차피 언젠가는 들킬 일이었는데.”

한우주는 자기 비하로 가볍게 운을 뗐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과의 맥락에서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기껏해야 제 잘못된 판단과 부실한 행동에 대한 안타까움 정도나 담겼을 것이다. 얘기 좀 들어 달라더니, 첫 마디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의 미음 자도 찾아볼 수 없자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버렸으니까… 따져 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얌전히 한우주의 말을 기다렸다.

“핸드폰은… 네가 나랑 조현우가 어떤 관계였는지 몰랐으면 해서 그랬어.”

적어도 그때 알게 해선 안 됐다. 진실을 알게 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에 가까웠다며, 예측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게 두고 싶진 않았다고. 한우주는 지극히 덤덤한 어투로 덧붙였다.

“어차피 조현우 핸드폰은 낡기도 했고, 네 것도 아닌데 새로 하나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와… 너 진짜….”

“왜?”

이 자식 나한테 하나도 안 미안한 거 아니야? 그런 거 같은데? 토끼 머리띠라도 다시 씌워 놓아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정말로, 화가 끓어 넘칠 것 같으니까. 주섬주섬 바닥에 있는 토끼 머리띠를 주워 한우주 머리에 다시 씌웠다. 열이 잔뜩 오른 게 티가 난 건지 뭔지는 몰라도 한우주는 반항하지 않고 내 눈치만 흘끔 살폈다.

“이제 됐어. 계속 말해 봐.”

“……이러고 말하라고?”

“싫어?”

“…아니.”

한우주는 토끼 머리띠를 쓴 채로 말을 이어 갔다. 병원 진료실에 들어간 나는 핸드폰을 자리에 두고 갔고, 그 사이 허지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단다. 한우주는 그즈음엔 나에 대한 파악을 얼추 마친 상태였다. 조현우와 내가 완전히 다른 인간인 것, 내가 조현우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어쨌든 ‘조현우인 척’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까지. 이쯤 되니 슬슬 무서울 지경이라, 더는 참지 못하고 물음을 던졌다.

“한우주 너 뭐야?”

“뭐가?”

“내가 조현우가 아닌 걸 정확히 언제부터… 아니, 정말로… 도대체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내가 말 안 했나? 모르는 게 이상할 수준이었다니까.”

한우주가 팔짱을 끼며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곤 4월 1일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처음 한우주를 마주치고 인사를 건넨 순간부터 위화감을 느꼈다면서. 이런저런 말을 붙인 뒤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조현우가 미쳤거나,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 그날 저녁에 내가 갈 곳이 없다며 전화를 해왔을 땐 조현우 이놈이 얼굴에 철판을 깔더니 단단히 돌았구나, 싶어 화까지 났단다.

“솔직히 그땐 널 집에 들이게 될 줄 몰랐어. 내가 미쳤다고 조현우를 집에 데려오겠어?”

“…결국엔 공원까지 와서 데려갔잖아. 왜 그랬어?”

“글쎄, 직접 가서 보니까 역시 달라도 너무 다르더라고. 화가 다 가라앉을 정도로.”

“허지훈은 아니라고 했는데.”

“허지훈이 뭐?”

“걘 내가 기억 상실인 줄 알거든. 허지훈 말로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다르지는 않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가 보지. 아니면 엄청나게 멍청하든지, 눈치가 없든지.”

“……차라리 난 허지훈 쪽이 이해가 가.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걸.”

한우주는 인상을 미미하게 구긴 채 제 입가를 매만졌다. 그러다 갑자기 강아지 머리띠를 집어 들더니 내게 씌우려 들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짓이냐. 한우주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잠깐 가만히 좀 있어 봐.”

어째서 나까지 놀이공원에서도 안 쓴 머리띠를 쓰게 된 것인가? 토끼 머리띠를 쓴 한우주가 기어코 내게 강아지 머리띠를 씌우며 말했다.

“네가 강아지 분장하고 강아지 흉내를 낸다고 쳐. 그렇다고 네가 강아지가 되는 건 아니잖아. 강아지 같지도 않을 거고. 그거랑 비슷한 거야.”

그걸 굳이 강아지 머리띠를 씌우면서 설명해야 하나? 어이가 없다.

“강아지랑 나는 아예 종이 다르잖아. 조현우랑 나는 둘 다 인간이거든…?”

“너랑 조현우는 종이 다르다고 봐도 되지 않나 싶긴 해.”

“뭐?”

“생각해 봐. 조현우가 기억을 잃으면 뭐가 되겠어. 기억 잃은 조현우가 되겠지. 그런데 너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처럼 굴었다고. 그러니까….”

한우주는 시선을 내린 채 말이 없었다.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대충 알았으니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넘어가자는 말을 꺼내려던 때였다.

“넌…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

“…….”

“애초에 비교할 게 아니야, 너희 둘은. 이제 좀 이해가 돼?”

점점 더 모르겠는데…. 나는 조현우를 직접 겪어 본 적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한 건가? 혼란은 깊어졌고, 민망함까지 더해졌다. 한우주가 말하는 ‘사랑받고 자란 티’라는 건 또 뭘까. 궁금했지만 괜히 물었다가 낯 뜨거운 말을 듣게 될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더 파고들어 봤자 내 호기심만 충족되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본론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래…. 이유를 들어도 여전히 열받지만, 핸드폰에 대해선 알겠어. 네 눈치가 엄청 빠르다는 것도.”

한우주가 해야 할 이야기는 핸드폰뿐이 아닐 것이다. 서랍 안에는 다른 것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녹음기는 당최 이해가 안 가거든. 기껏 녹음한 거 왜 안 쓰고 서랍에 처박아 둔 건데?”

“…….”

“한우주? 왜 말을 안 해?”

“이건 말해도 이해 못 할 거야.”

이 자식이 지금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아, 그래. 그럼 볼일 끝났으니까 집에 가.”

“잠깐….”

지금껏 말 안 한 거 다 털어놓을 것처럼 굴어 놓곤 뭐가 어쩌고 어째? 말해도 이해를 못 할 거라고? 사람 화 돋우려고 작정했나? 생각해 보면 한우주는 여태 사과 한마디를 안 했다. 괘씸죄로 쫓아내도 모자라다.

“더 할 말 없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어?”

한우주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보려 했으나 이 자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히 내 힘만 뺀 꼴이다. 반면 한우주는 나를 아주 손쉽게 떼어 내는 바람에 자존심까지 상해 버렸다. 이젠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원래 몸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팔랑거리지는 않았을 텐데. 짜증이 치밀어 한우주를 몇 대 때렸다. 운동이 취미인 녀석이니 워낙에 튼튼해서 조현우가 몇 대 때려 봤자 간지럽기만 할 것이다. 와, 생각할수록 열받네?

“잠깐만. 알았다고….”

“뭐야. 이거 안 놔?”

한우주는 몇 대 맞아 주는가 싶더니 내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그러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뭐, 인마?”

“기분 나쁜데 어떡하라고?”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이건 또 무슨 적반하장이란 말인가? 기가 막혀 돌아가시겠다. 내가 좋아하는 놈 성격이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눈물이 날 것 같다.

“도대체 거기에 네가 기분 나쁠 게 뭐가 있는데?”

“…네가 그랬잖아.”

“내가 뭘? 뭐야, 지금 내 탓 하려는 거야?”

“아니, 네가….”

사람 답답하게 하려고 작정한 걸까? 한우주는 무언가 말할 듯 말듯 입만 움칠거렸다.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바닥을 찍은 뒤에야 한우주의 입이 열렸다.

“나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인하성한테 그랬잖아.”

“……뭐라고?”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내 귀를 의심하며 긴가민가해 하자 내가 그토록 기다려 온 말이 들려왔다.

“미안해.”

“…….”

“이해 안 갈 거 알아. 나도 날 이해 못 하겠으니까. 그런데 그때는 그냥… 그게 싫었어.”

머릿속으로 한우주의 말을 몇 번이고 되감고 나서야 한우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다. 학교에 녹음기를 차고 간 날, 내가 인하성에게 그런 말을 했었나 보다. 솔직히 그때 내가 뭔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한우주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스몄다.

“녹음본을 썼으면 훨씬 깔끔했겠지. 알아. 아는데 굳이 없어도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약을 생각해서 보관해 둔 거고.”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다. 한우주는 불안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기운 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야.”

동시에 손목을 움켜쥔 힘이 약해졌다. 그러나 나는 뿌리치지 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

“…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여러 생각이 녹아들고, 한 가지 궁금증만이 남았다. 나는 그 생각을 소리 내어 흘려보냈다.

“한우주 너 그때도 내가 좋았어?”

한우주와 내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내가 정말로 그랬다고 치자. 그게 기분 나쁠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데. 왜냐하면… 사실이잖아. 지금도 그렇고, 인하성의 일이 있던 당시에는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한우주가 그때도 날 좋아해서 유치한 질투심을 부린 게 아니라면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다.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무색하게 한우주는 말없이 나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황당했다.

“아니, 잠깐만. 진짜야?”

“…몰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모른다니까.”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 말에 왜 기분이 상해?”

“그럼 좋아했나 보지.”

“뭐?”

“좋아했을 수도 있는데, 그땐 진짜 몰랐어. 거짓말 아니야. 왜 기분이 나쁜지 몰라서 더 기분 안 좋았다고.”

“…허.”

“……많이 화났어?”

한우주는 말하며 조심스레 나의 눈치를 살폈다. …화났냐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한우주의 손을 떼어 내고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열기가 원망스러웠다. 잔뜩 심각해져 고개를 떨군 채 연신 이마를 문질러 대며 말했다.

“한우주. 너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 그러니까, 나 이전에…. 친구나 가족한테 느끼는 그런 거 말고….”

한우주는 즉답했다.

“아니.”

미치겠다.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혔던 분노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누군가 되찾아 줬으면 좋겠다. 답이 없을 정도로 가슴이 간지러웠다. 이게 정상인의 감정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젠 다른 의미로 한우주가 짜증이 났다. 얼굴에 오른 열은 가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쟤 왜 이렇게 귀엽냐? 와… 씨…. 개 짜증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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