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다 큰 녀석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거였어? 원래 누굴 좋아하면 다 이렇게 되나? 사랑은 미친 짓이라는 말이, 누굴 좋아하게 되면 정말로 미쳐 버리기 때문에 생긴 말이었던가? 지금 이 상태라면 한우주가 내가 모르는 다른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귀여우니까.’ 하고 넘어갈 것 같다.
아, 진짜 안 되겠다. 당장 눈앞에 한우주가 있는 이상 뭐, 정상적인 생각을 못 하겠다. 나는 정말로, 몹시 아쉬운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한우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오늘은 이만 집에 가라는 나의 애원을 들은 한우주의 표정이 불안에 물들었다.
“왜? 나 뭐 실수했어?”
말로써 나를 열받게 했느냐는 뜻의 물음이라면 맞다. 한우주가 귀여운 바람에 아무렴 상관없어진 게 문제지.
“그런 거 아니야. 많이 늦었으니까 다음에 마저 얘기하자고….”
“…다음이 있기는 해?”
눈치도 빠른 녀석이 왜 이런 때에는 둔하게 구는 것인지. 지금만큼은 그냥 내 마음을 읽어 줬으면 좋겠다. 다음도, 그다음의 다음도 있을 거라는 걸 말로 표현하기엔 낯간지럽지 않은가. 나는 어떻게든 덜 민망한 언어를 찾아 말했다.
“내일. 내일 또 보면 되지. 내가 찾아갈게.”
“……. 내일?”
“그래. 날 밝으면 다시 얘기해…. 내가 너희 집으로 갈 테니까.”
한우주는 내게 두세 번 같은 것을 묻고, 같은 답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지나치게 서두르며 밖으로 나서려 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다. 집에 가라고 한 건 나인데, 또 얼른 가 버리려는 모습을 보니 섭섭했다. 나는 섭섭하지 않은 척, 어디까지나 걱정하는 척하며 신발을 신는 한우주에게 말을 건넸다.
“한우주, 뭘 그렇게 서둘러? 그러다 넘어진다…?”
내가 뭐라 하든 말든 한우주는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멀끔한 얼굴로 자리에 섰다. 그리고 시선을 바로 맞춘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내일이 와야 또 볼 거 아니야.”
“…….”
한우주 누구 좋아해 본 적 없는 거 맞아? 의외로 연애 경험 풍부한 거 아니야?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막 나오는 민망한 말에 엉뚱한 의구심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대로 깔끔하게 인사하고 떠나려는 한우주의 뒷모습을 보다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야, 하, 한우주! 너, 머리띠!”
“…아.”
한우주도 지금 상태가 멀쩡하지는 않은가 보다. 급하게 머리띠를 벗는 한우주를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뒤, 정말로 한우주를 집으로 보낸 뒤에야 생각했다. 오늘 놀이공원에서 머리띠 안 써서 다행이다. 저 귀여운 모습을 본 사람이 세상에서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누군가 지금의 나를 보면 아주 지랄한다. 꼴값을 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 역시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부글부글 끓던 속은 한우주의 해명에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식어 버렸다. 단순히 식기만 했으면 다행이지, 분노가 애정으로 변모한 것처럼 속에서 마구 날뛰었다.
…내가 나를 이해 못 하겠다. 안태원 이건 진짜 뭐 하는 새끼일까? 이렇게 금방 풀릴 거면서 왜 화를 냈지? 안태원 너는 임마, 한우주가 그렇게 좋냐?
……그래, 좋다. 좋으니까 화가 났던 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동시에 오랜 기간 날 농락해 온 것 아닌가. 그런데 제 행동에 대한 해명이 또 고백으로 이어지고, 화 풀라고 머리띠도 쓰고, 아무튼 이건 내가 줏대 없는 게 아니다. 나는 문제가 없다. 이건 다 한우주가 귀여운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한우주가 보고 싶었다.
‘아…, 몰라. 아침이나 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내 생애 가장 소란한 밤이 참 길게도 이어졌다.
***
‘아직도 자는 건가?’
일요일 오후 1시, 한우주도 나처럼 밤잠을 설쳤다면 아직 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벨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푹 잠들었나….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한우주의 이름이 떠오른 액정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한우주는 벌써 네 통째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속으로 여러 변명을 했다. 어차피 얼마 전까지 같이 살았잖아. 보통 이 시간까지 자고 있으면 내가 깨우곤 했으니까.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한우주와 함께 걷곤 했던 길을 걸으며 늦잠을 자고 있을 한우주를 생각했다.
‘……오피스텔 키 안 돌려줘서 다행이네.’
나갈 때 돌려주지 않아 처치 곤란했는데.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이걸 다시 쓰게 되는구나. 삑, 소리와 함께 오피스텔의 정문이 열렸다. 로비로 들어선 뒤, 거주자용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보였다.
“넌 여길 왜 왔어?”
아니, 의외의 인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임도윤은 요즘 자주 한우주를 찾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임도윤이 오피스텔 로비에 얌전히 있는 것은 이상하다. 임도윤이라면 로비에서 기다릴 게 아니라, 한우주의 집에 바로 쳐들어 갔겠지.
“야. 왜 왔냐고 묻잖아.”
“…한우주한테 볼일 있어서. 됐고, 이것 좀 놓지?”
“지금 한우주를 보러 간다고?”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잖아.”
임도윤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너 한우주랑 같은 반이던데. 야. 나 한우주보다 형이거든?”
“응. 대충 알아. 그게 왜?”
“내가 형이라니까? 이게 어디서 계속 반말이야?”
……어이가 없어서. 지금 나더러 반말한다고 뭐라고 하는 것인가? 워낙에 자존심이 센 녀석이니 언젠가는 짚고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오늘같이 기분 좋아야 할 날에 임도윤의 꼰대 같은 지적을 받자니 배로 불쾌했다. 내가 미쳤다고 임도윤을 연상 취급하냐. 따지고 보면 진짜 연상도 아닌데. 난 임도윤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내가 알 바야.”
“아, 이게 진짜. 야. 너 어디가!”
임도윤 이놈 오늘 진짜 왜 이래?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려 하자, 임도윤은 또다시 나를 붙잡아 저지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다.
“한우주랑 약속 있다니까?”
“야. 하, 씨. 내가 충고하는데 지금 가지 마라. 너 하나 때문에 일 커지는 꼴 보기 싫거든?”
“……무슨 뜻이야?”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임도윤씩이나 되는 녀석이 주말에 로비를 서성이는 것이. 도둑도 아니고 아까부터 눈치를 살피며 엘리베이터를 흘끔대는 것이. 임도윤은 내 팔을 꽉 쥐고 있는 와중에도 엘리베이터를 잠깐 노려봤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도 그제야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여기서 소란을 피웠다간 꼼짝없이 쫓겨날 게 분명했다. 임도윤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야. 잠깐 나와 봐.”
임도윤은 그대로 앞장서 오피스텔을 나섰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쯤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임도윤의 뒤를 따랐다. 임도윤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다. 오피스텔 정문을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는 대뜸 내게 말했다.
“지금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만 알아 둬. 나한테 고마운 줄 알아.”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건가? 어이가 없어 말을 못 잇고 있자 이 건방진 부자 도련님이 물음을 던졌다.
“그래, 어쩌면 넌 알겠지. 한우주 요즘 왜 저러는지 좀 알자.”
“…뭔 소리야. 한우주가 왜.”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서 내게서 뭘 알아 가겠다는 거지?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러나 한우주의 이야기엔 흥미가 들었다. 한우주가 왜 저러냐니. 잘 지내는 애한테 무슨 말이야….
“왜 갑자기 학교를 멀쩡히 다니느냐고.”
“……뭐?”
아니, 뭐야. 너무 잘 지내는 게 문제였나? 임도윤이 혀를 찼다.
“지금껏 죽은 듯이 지내던 녀석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사람 여럿 피곤하게 만들고…. 됐다, 어쨌든 저놈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아냐고 물었어.”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한우주가 성실하게 사는 게 문제가 돼?”
“그래. 엄청나게 큰 문제라는 것만 알아 두고, 더는 묻지 마.”
임도윤 치고는 고분고분하게 군다 싶었더니 아니었다. 역시 임도윤은 싸가지가 없다.
“그냥 네가 가서 한우주한테 전해. 일 복잡하게 만들 생각 하지 말라고. 그 자식이 네 말 들으면 그것 나름대로 불쾌하긴 한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쟤가 본가 들어가는 건 너도 싫잖아. 아니냐?”
“뭐?”
“나는 너보다 백 배는 더 싫거든. 한 지붕 아래서 지낼 생각 하면 끔찍하다고.”
“아니, 갑자기 무슨 말이야.”
“……뭐야, 너 몰라?”
임도윤이 짜증스레 인상을 구겼다. 내 얼굴이 보기 싫은 건지 뭔지, 그 와중에도 임도윤의 시선은 내내 나의 어깨 너머 어딘가에 머물렀다.
“아… 너 생각보다 한우주한테 별거 아닌가 보다. 됐다, 됐어. 시간만 낭비했네….”
“…….”
“아무튼 넌… 아, 망할.”
임도윤은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홀로 허겁지겁 어디론가 향했다. 너무 순식간이라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멀뚱히 서 있는데, 정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멋대로 결정하지 말라고 몇 번 말해요.”
“멋대로 구는 건 너지. 다 널 위한 일인 걸 모르지는 않을 거 아니냐.”
“전혀 모르겠는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우주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임 회장도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속에서 불쑥 욕이 나왔다. 임도윤 이 자식, 비겁한 놈.
한우주와 임 회장이 신경 쓰여서 몰래 살피려고 여기까지 온 거였나? 그래서 대화하는 내내 자꾸 엉뚱한 곳을 흘끔거린 거구나. 임 회장과 한우주가 오피스텔에서 나오는지, 아닌지, 계속 살피다가 결국엔 날 오피스텔 앞 대로변에 버려두고 간 게 분명하다. 와, 나쁜 자식.
여기서 임 회장이 날 알아보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자연스럽게, 행인인 척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른
다. 재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적은 거리 위에서 어색한 걸음을 내디디며 어떻게든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때, 임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우주. 집중 안 해? 아까부터 자꾸 어딜 보는 거냐.”
따가운 시선이 뺨에 닿았다. 불안한 마음에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다가 흘끗 정문 쪽을 살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를 보고 있던 한우주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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