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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16화 (116/150)

116화

‘아악, 이쪽을 보면 어떡해!’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헛수고였다. 나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자 한우주도 그제야 아차, 싶었나 보다. 안 그런 척 시침을 떼며 제 아버지를 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지만, 마음 놓고 귀여워할 때가 아니었다. 임 회장의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유독 느리게 보였다.

나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재빨리 몸을 돌려 가던 길을 향하는 척했다. ‘아는 사람이냐?’, ‘…그런 줄 알았는데. 잘못 봤나 봐요.’ 한우주와 임 회장의 대화 소리가 점점 작게 들렸다. 충분히 거리를 벌린 뒤에야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겼다. 멀리서는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구나, 싶었다. 할 수 있는 게 추측뿐인 상황이 답답했다.

“너 용케 빠져나왔다?”

“아씨, 깜짝….”

뒤쪽에서 임도윤이 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다. 하…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거냐…? 이 마음이 가난한 부자 새끼….

“너 진짜…. 아니, 너는 왜 숨어서 보는데? 넌 저기 껴들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러기 싫으니까 이러고 있지. 멍청아.”

저놈의 미운 입 한 번만 때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헛된 바람을 물리며 한우주와 임 회장을 조심스레 살폈다. 무슨 일인지 한우주에게 직접 묻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그때, 갑자기 검은 차가 나타나 한우주와 임 회장 앞에 멈춰 섰다. 임 회장이 먼저 차에 올랐고, 한우주는 불만에 찬 얼굴로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

“뭐야? 한우주 쟤 어디 가는 건데?”

나는 급한 대로 당장 곁에 있는 관계자…, 임도윤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이거 놓기나 해. 안 그래도 짜증 나니까.”

임도윤이 인상을 와락 구기며 팔을 떨쳐 냈다. …그래, 임도윤한텐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말자. 그렇다고 딱히 다른 의지할 구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태 연락 한 번 오지 않은 핸드폰만 초조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임도윤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부르더니 물었다.“너 도대체 한우주랑 무슨 관계냐?”

“…그건 왜.”

“봐서 쓸 만하면 써먹으려고. 너한테도 나쁜 얘기는 아닐걸.”

“뭐?”

“보아하니 한우주가 어떤 상황에 처한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알려 줄 테니 넌 한우주나 잘 구슬려 봐. 거래하자고. 내 입으로 말하기 징그럽지만 한우주가 네 말은 좀 들을 것 같거든?”

아마 본가인지 뭔지, 들어올 생각 못 하게 설득해 보라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굳이 내가 설득하지 않아도 한우주는 임 회장 집 들어가기 싫어할 거 같은데….

“이참에 확실히 좀 알아 두자. 너희 도대체 무슨 사이냐?”

사람 앞에 두고 한숨 푹푹 쉬어 대는 꼴을 보니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무슨 관계냐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임도윤의 물음에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한우주와 나의 관계를 정의할 말이 마땅히 없다는 걸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했다.

심각해질 필요 없이 대충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꺼.’라고 대답하려니 한우주와 나눈 어제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다. 정말로 그 어떤 사이도 아닐 때,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도 삐친 한우주인데… 지금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가 한우주 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봐 솔직히 두렵다. 그래서, 한우주와 나는 지금 어떤 사이인가?

“친구…보다는 가까운….”

연인보다는 먼……. 어디선가 들어본 문장이 스쳐 갔다. 꽤 정확한 표현이지만 차마 입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이다. 임도윤이 답답한 티를 내며 물었다.

“…가까운? 가까운, 뭐.”

“뭐가 더 있겠어. 가까운 사이…. 그냥… 가까운 사이라고.”

“…….”

임도윤은 의외로 더 캐묻지 않고 그쯤에서 화제를 돌렸다. 나는 아직 수락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임도윤의 목소리는 전보다 기운이 빠져 있었다.

***

해가 중천일 때 찾아왔는데 밖은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임도윤과 이야기를 마친 나는 오피스텔 근처를 서성이며 한우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쯤이 지나서야 한우주에게서 메시지 두 통이 왔다.

「한우주: 미안. 잠깐 일이 생겨서. 키 있으면 들어가 있어.」

「한우주: 아니, 그냥 조현우 집에 있으면 내가 찾아갈게.」

정신없는 와중에 급히 보낸 것인지, ‘오피스텔에서 기다리겠다. 몇 시쯤 올 것 같으냐.’는 나의 메시지에 한우주는 여태 답장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오피스텔의 거실 소파에 앉아 현관 복도 쪽만 애타게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졌다.

임 회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한우주가 오피스텔에 돌아오기는 할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라며, 어차피 이 정도는 너도 한우주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 않으냐고. 변명 같은 말로 시작한 임도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임도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중 내가 아는 소식은 없었다. 전부 처음 듣는 말들이었다.

-아버지 말엔 족족 반항하는 주제에. 참견하면 질색할 거면서 눈에 띌 짓은 왜 하는 거야? 분명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너는 아냐?

임도윤이 내게 한 말들은 한우주를 향한 욕과 하소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말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참아 냈다. 한우주가 처한 상황을 알고 싶었으니까.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 생각하지 말고, 어울리는 자리에 조용히 처박혀 있으라고 해. 아무것도 안 하고 쥐 죽은 듯이 있어도 먹고 사는 데엔 지장 없을 거라고, 그렇게 전해. 알았어?

결국엔 전부 같은 이야기였고 끝에는 분노만이 남았다. 한우주가 무기력하게 매사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던 것은 한우주의 천성, 성격 따위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참견이 싫어서, 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여러 이유로 숨죽이며 살아온 한우주에게 비로소 삶에서 바라는 게 생긴 것일 터이다.

그런데 그걸 단순한 돌발 행동, 눈에 띄는 짓 따위 취급하며 눌러 버리려는 임도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평소엔 방치하다시피 하다가 이제야 한우주를 찾는 임 회장도 미웠다. 임도윤은 나더러 한우주를 설득하라고 했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설령 임도윤이 주장하는 대로 한우주가 제 자리를 빼앗으려 드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기꺼이 한우주를 지지할 것이다. 그게 정말 한우주가 바라는 거라면… 내가 왜 말려야 하지?

소파에 반쯤 누운 채 속으로 연신 화를 냈다. 속이 아주 엉망이었다. 분노하다가도 한우주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연락도 받질 않으니 슬펐다.

그렇게 시들시들해 있는데 현관 쪽에서 도어 록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다잡고 엉거주춤하게 소파에 걸쳐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한우주가 있었다. 표정에서 지친 티가 나 안타까웠다.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어, 어서 와.”

한우주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띠었다.

“미안. 얼마나 기다렸어?”

“글쎄? 한… 10분?”

“…….”

“아니다, 20분….”

한우주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쳐다봤다. 이어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야.”

말하며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한우주는 숨을 한번 깊게 내뱉곤 몸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 좀 씻고 올게.”

“어? 어….”

묘하게 시무룩한 모습에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임 회장이랑 같이 있느라 많이 피곤했나? 욕실로 향하는 한우주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한우주. 잠깐만.”

한우주는 기꺼이 자리에 멈춰서 나를 돌아봤다. 단순히 직감일 뿐이지만, 지금 한우주가 시무룩한 게 임 회장 탓은 아닐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 고된 하루를 보냈을 한우주에게 작은 걱정거리나마 덜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음, 별거 아니고. 그냥….”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라는데도 한우주는 잔뜩 심각해져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나는 마음이 급해져 빠르게 할 말을 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네가 날 부르는 게 불편해 보여서?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야’가 편하면 계속해도 되긴 하는데.”

한우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곤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하나도 안 편해. 불편해 죽겠어.”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퀘스트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는 말해야지. 어떤 식으로 알려야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알리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렴 한우주가 불편하다는데 더 미룰 이유는 없었다.

“그러면….”

오랜만에 조현우 아닌 내 이름을 입에 담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입술이 어색한 모양으로 움직였다.

“그러면 그냥 안태원이라고 불러.”

말을 마침과 동시에 눈앞이 온갖 창으로 어지럽혀졌다.

「축하합니다! 조건A를 충족하여 다음의 퀘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퀘스트의 상세 내용이 공개 됩니다.」

「::특수 퀘스트::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내용: 공략 캐릭터 ‘???’의 정체를 밝혀내세요.

목표 달성 시 퀘스트가 완료되며, ‘???’의 정보는 자동으로 ‘인물 수첩’에 반영됩니다.

♥퀘스트 완료 조건: 다음 조건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해야 합니다.

A. ‘주인공’이 ‘???’의 존재를 온전히 인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B. ‘퀘스트 입력 창’에 ‘???’의 이름을 입력합니다.

올바른 이름을 입력할 시, 퀘스트가 완수되며 해당 정보는 자동으로 ‘주인공’에게 제공됩니다.

→ 조건A를 충족하였습니다.

♥완수 시 보상: ‘안태원’루트 추가」

미처 내용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또 다른 창이 떠올라 시야를 가렸다. 나는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며 떠오른 글자를 하나하나, 몇 번이고 속에 담아냈다.

「System:퀘스트를 완수하여 특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다음 루트를 추가합니다. ::‘안태원’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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