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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17화 (117/150)

117화

심호흡하며 아연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한우주를 흘끔 살폈다. 특별히 큰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한우주는 침착해도 너무나 침착했다. 평소와 같은 얼굴로 잠시 말이 없었다가, ‘말해 줘서 고맙다.’라고 한마디 한 게 다다. 그러곤 정말로 씻으러 가 버렸다. 나는 어쩐지 맥이 빠졌다. 이 정도로 별거 아닐 줄 알았으면 그냥 더 일찍 말할 걸 그랬나 보다.

게임 시스템 창에 ‘조현우’가 아닌 내 이름 ‘안태원’ 석 자가 들어간 걸 보자면 기분이 묘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벅찬 감정이 솟구치기도 했던 것 같다. 한우주 반응에 나까지 덩달아 침착해져 버렸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부러 생산적인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일반적인 미연시 게임의 흐름이 어떻게 되었더라? 공략 캐릭터와 호감도를 쌓고, 루트에 진입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 끝났던가? 연애 좀 하다가 끝났던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서 더 깊이 고민하고 있자 하니 점점 더 싱숭생숭해지기만 했다.

엔딩을 상정하고 누군가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 그런 건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긴 게임 속이잖아, 하고 생각하는 건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을 실제 사람과 다름없이 여긴 지도 꽤 되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우주는 물론, 지금껏 이곳에서 가까이 지낸 사람들 모두 가상의 것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했으니까.

“무슨 생각해?”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편한 옷차림의 한우주가 보였다. 그새 씻고 나왔나? 급하게 나온 것인지 머리카락이 덜 말라 젖어 있었다. 한우주는 나의 바로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파 가죽이 마찰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동시에 부드러운 바디워시 향이 훅 끼쳐 왔다.

이상할 정도로 공기가 어색했다. 나는 한우주의 물음에 대답할 때를 놓쳐 버렸고, 한우주는 그에 별 이야기 없이 허공만 응시했다. 오늘따라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그러고 보니 오늘 임도윤이랑 마주쳤거든?”

“…아.”

한우주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나는 임도윤과 있었던 일을 횡설수설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오피스텔 로비에서 마주친 것,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해 놓곤 날 버리고 도망친 것, 그리고 다시 찾아와 한우주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것.

“아무튼, 별 얘기 안 했어. 한우주 너는 임도윤이 하는 말 듣지 마. 뭐, 조용히 살라느니…. 들어 보니 전부 헛소리더라. 평소에도 너한테 그런 소리 자주 했어?”

“글쎄? 딱히 귀담아들은 적 없어서.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응. 앞으로도 귀담아들을 생각 하지 마.”

한우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왜 다들, 이 착한 애를 건드리지 못해 안달인 걸까. 이즈음부터 나는 한우주가 이 거친 세상 속에서 가진 거라곤 잘난 얼굴밖에 없는 연약한 아기 토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왜 하필 토끼인가, 하면 어제의 머리띠 사건이 뇌에 단단히 박혀서 그런 것 같다.

“아버지랑은 괜찮아? 갑자기 들이닥치신 거지?”

“음…, 응.”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셔?”

“임도윤이 말했나 보네. 대충 비슷해.”

“어떻게 할 거야?”

한우주라면 분명 싫다고 했겠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 법적인 보호자에 경제권까지 쥐고 있는 사람이 강요하는데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한우주는 답답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들어가야 할 수도 있어. 내키진 않지만, 안 그러면 여길 처분할 기세라.”

“처분?”

“응. 이 집.”

있을 곳을 없애서라도 제 말을 듣게 하겠다는 건가? 임 회장의 지독함에 기가 다 막혔다. 오래 지낸 곳인 만큼 한우주는 이곳에 대한 추억이 많을 것이다. 가령 어머니와 함께한 흔적이라든가. 임 회장이 그걸 모를 리 없다. 되레 알고서 이용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나는 일단 한우주에게 괜찮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우주가 나보다 한발 빨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야.”

한우주는 내 눈치를 살피며 이어 말했다.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

“…….”

도대체 뭘 해결할 수 있다는 걸까. 임 회장이 이 이상으로 고압적으로 굴면 한우주가 반항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한우주의 생활은 사실상 임 회장이 손에 쥐고 있는 셈 아닌가. 게다가 왜 한우주 쪽에서 나를 안심시키려 드는 거지? 지금 가장 불리한 상황에 놓인 건 한우주 아닌가? 내가 한우주를 걱정하는 건 맞지만, 그래 봤자 마음만 좀 불안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한우주는 자기 일상이 전부 달려 있잖아.

“한우주.”

“응.”

“내가 막,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거든.”

나는 혹여 한우주가 말을 가로채고 괜찮다며 사양할까 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편 들어 주는 거… 고작 그 정도가 다 이긴 해. 실질적인 도움은 못 될 거야. 그래도 어… 음, 나는 네가 걱정되거든. 널 걱정하는 게 귀찮거나 성가시지도 않고. 그냥 그게… 자연스럽다고 해야 하나….”

한우주는 내 걱정과는 다르게 아주 얌전했다. 오롯이 내게 집중하며 경청하는 모습이 예뻐서 곤란했다.

“오히려 네가 알아서 하겠다는 식으로 내가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으면 그게 더 섭섭하단 말이야. 내 욕심일 수도 있지만….”

결국 나는 시선을 한우주에게서 멀리 떨어트렸다. 말할수록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너 나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사람한텐 조금 의지해도 괜찮지… 않나…?”

그리고 이런 말은 솔직히 좀, 민망했다. 살면서 이렇게 낯 뜨거운 말을 입에 올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아니면 말고…….”

듣는 사람 처지도 민망하지 않을까. 괜한 말을 했나. 걱정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올라올 때였다.

“태원아.”

점점 땅과 가까워지고 있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이 얼마만의 일이지? 두 눈만 끔뻑이고 있자면 한우주가 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자리를 당겨 앉았다. 그러곤 말했다.

“해도 돼?”

“뭐, 뭘?”

“신체 접촉….”

뭐라고? 연달아 놀라서 더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한우주는 조심스레 나의 손끝을 잡았다가, 손가락을 얽혀 오며 나른한 목소리를 흘렸다.

“말없이 하면 불쾌하다며.”

불쾌… 불쾌?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인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한우주와 시선을 맞췄다. 이어 무언가에 홀린 사람같이 멍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우주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순간부터, 아예 넋이 나갔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짧은 순간 수없이 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되나? 아니면……? 아니면 이, 입을 벌려야 해? 얼마나? 일 센티? 그보다 조금 더? 미치겠다. 하나도 모르겠어.’

긴장감에 마른침을 몇 번 삼켰다. 그리고 왼쪽 뺨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응?’

눈을 뜨자 바로 앞에 한우주가 있었다. 어… 그러니까, 한우주 얘 방금 볼에 뽀뽀한 건가?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한우주가 물었다.

“…불쾌했어?”

그럴 리가. 나는 그냥…, 그러니까… 음……. 어떤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동시에 이런 생각을, 이런 말을 하려는 나 자신이 낯설고 변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변태 안태원과 싸우느라 한우주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우주는 긴장이 역력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다시 나를 불렀다.

“……태원아?”

“겨….”

그 순간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결판이 나고 말았다.

“겨우 뺨이야?”

변태의 승리였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냥 나는 변태다. 아니, 우리 사이에 뺨이면 됐지. 충분하지. 아닌가? 우리나라 문화는 아니지만, 지구 어디선가는 뺨에 입 맞추는 것 따위 인사처럼 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속에서 변명이 솟구쳤다.

그러다 한우주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봤을 땐, 그냥 땅을 파고 지구 내핵에 처박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고,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인정한다. 나는 적어도 뺨에 뽀뽀하는 것보다는 더한 걸 한우주와 하고 싶었다. 한우주도 진작에 눈치챘을 테고.

한우주의 몸이 기울었다가,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추었다. 한우주는 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전에 내가 불쾌하니, 뭐니 한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쑥스러워서 그런 건지… 뭔지는 몰라도 그냥, 한우주가 귀여웠다.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나는 한우주의 뒤통수에 손을 얹고 조심스레 내 쪽으로 당겼다. 한우주는 기꺼이 나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이내 한우주의 입술이 내 입술에 포개어졌다. 목이 탔다. 숨을 고르기 위해 떨어진 순간이 아쉬웠고, 혹여 이대로 끝나 버릴까 조급했다. 적극적으로 한우주의 목에 팔을 감자, 더욱 짙게 입술이 맞물렸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입술이 떨어졌다가 닿을 때마다 다소 민망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부끄러움을 잊고 한우주에게 집중했다. 어느새 몸은 기울어 등은 소파의 팔걸이에 닿았다. 가볍던 소리는 점차 물기에 젖어 갔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얼굴에는 잔뜩 열이 올랐다. 아마 지금 얼굴 엄청나게 붉어져 있겠지. 한우주가 중간에 눈을 뜨는 일이 없기를 바란 때였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열기 어린 것이 침범해 안쪽 살을 훑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한우주와 눈이 마주쳤……. 아니, 잠깐만. 이 새끼 왜 눈 뜨고 있어?

“읏, 잠깐. 저리, 떨어져.”

나는 황급히 한우주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한우주는 순순히 내게서 떨어졌다. 모자란 숨을 고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우주를 보고 있자면, 한우주는 당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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