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여러 이유로 기가 막혔고 또 창피했다. 물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며 서로 먼저 입 밖으로 나가겠다고 씨름을 했다. 거기에 ‘왜 그딴 걸 물어보려고 해? 촌스럽게.’라는 생각까지 껴들어 머릿속은 점점 더 엉망이 됐다. 나는 가까스로 가장 당황스러웠던 일을 추려 내 불만스레 말했다.
“왜… 왜 눈을 뜨고……. 보통은 감지 않아?”
물론 키… 아니… 입을… 맞출 때는 반드시 눈을 감으세요! 하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눈을 감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냥? 보고 있으니까 좋아서.”
“눈 감고 있는 모습 보는 게 뭐가 좋다고….”
“열중하는 게 귀엽잖아.”
“뭐?”
귀를 의심했다. 지금 누구더러 귀엽다고 하는 거야. 네가 만 배는 더 귀여울 거다. 답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면 한우주가 내리뜬 시선을 바로 맞추며 말했다.
“싫으면 이제부턴 눈 꼭 감을게. 그러니까.”
은근슬쩍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더 해도 돼?”
조르는 듯한 말투에 홀랑 넘어가 ‘그래, 전부 다 너 좋을 대로 해.’라고 말할 뻔했다. 영락없이 한우주에게 말려든 꼴이다. 좋아하는 사이에 몇 번 말려드는 것쯤 괜찮지 않나, 싶었지만 고작 몇 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정신 바짝 차리고 적당히 거절한다는 것이, 정신을 반쯤만 차리는 바람에 말을 이상하게 해 버렸다.
“오, 오늘 너랑은 더 안 해.”
와, 나 뭐라는 거냐. 어쨌든 거절의 의미는 전달되었으리라 위안하던 때였다. 한우주의 표정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순식간에 굳어 들었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니면 누구랑 하는데?”
“허.”
어떻게 거기서 꼬투리를 잡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거기서 다가 아니었다. 한우주의 질투심은 유치함을 넘어서 상상을 초월했다.
“허? 허지훈?”
여기서 허지훈이 왜 나와? 한우주 얘 진짜 미쳤나 보다.
“아니, 내가 걔랑 왜…. 누구랑도 아예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내가 옆에 있는데 왜 안 해?”
“…….”
기적의 논리에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순 억지뿐이다. 그러나 억지를 부리는 한우주의 모습에 짜증이 나기는커녕 몹시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니 별수 없었다.
“내가 졌다, 진짜.”
내쉬는 한숨에 웃음이 섞여 들었다. 나를 향한 한우주의 마음에는 의심할 구석이 단 한구석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우주를 좋아한다. 나 자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언제부턴가 돌이킬 수도 없이 깊어져 버렸다. 거기에 가슴에 벅찼다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함께 떠올라 심장이 뛰었다.
“이리 와.”
그러나 당장 눈앞에 한우주가 있으므로 불안감 따위에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다. 이상한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나와 조금 더 닿고 싶어 하는 한우주에게 화답하고 싶은 욕구가 훨씬 컸으니까.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한우주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크고 따뜻한 손이 내 두 뺨을 감쌌고, 그보다 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제대로 눈 감을게.”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장난 같은 행위는 점점 더 짙어졌다. 긴장감에 몸이 굳자, 한우주가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그에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한우주에게 휘둘리지 않고 주도권이라는 걸 한번 잡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 내어 혀로 한우주의 입술을 훑었다.
한우주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보라는 듯,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기다렸다. 그때부터 나의 욕구가 이상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우주의 여유를 무너트리고 싶다. 처음인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나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잖아. 여기서 문제는, 정말로 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키스하는 법이라도 미리 찾아볼 걸 그랬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혀끝으로 한우주의 다물린 입술을 툭, 건드리자 한우주는 기꺼이 제 입술을 열었다. 조심스레 혀를 한 번 얽은 뒤로, 나는 완전히 얼음이 되어 버렸다. 물컹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왜 굳이 사람들이 이런 걸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냥 뽀뽀… 만으로 충분한 것 같은데…?
그때, 한우주가 갑자기 몸을 뒤로 내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어리둥절해 무슨 일인가, 보고 있으니 한우주의 어깨가 사정없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잠깐만, 이 자식 지금 웃는 거냐?
“야!”
“미안. 그렇지만.”
“뭐가 그렇지만이야. 너 내가 웃겨?”
“아니야. 귀여워서. 귀여워서 그래.”
“…한우주 진짜 짜증 나.”
그대로 소파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나는 잘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나의 최선이 고작 이 정도라니, 분해서 죽겠다. 그러나 한우주는 나를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돌연 허리를 감싸 안아 제 쪽으로 당기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거 놔.”
“태원아, 화났어?”
“몰라….”
“내가 미안해. 화 풀어.”
애초에 한우주에게는 화난 적이 없다. 키스 한번 더럽게 못 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 거지. 만약 한우주에게 티끌만큼 화가 났더라도, 방금 한 말로 다 풀렸을 것이다. 게다가 저 얼굴. 한우주는 자기 얼굴을 너무 잘 써먹는다. 눈썹을 늘어트리며 살살 웃는 모습에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본능이 이성을 압도했다. 나는 결국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한우주에게 다시 입 맞췄다. 주도권이고 뭐고 모르겠다. 그냥… 좋으니까 어쩔 수가 없다. 젖은 소리만이 귓가를 메우고, 발끝부터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한우주가 키스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과감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과감함이 좋았다.
…뭐, 어차피 나랑만 할 건데. 내가 좋으면 그냥 된 거 아닌가? 그래, 한우주는 잘생긴 데다가 귀엽고 몸도 좋고 키스까지 잘한다. 세상에 한우주만큼 잘난 사람은 또 없을 거다. 한우주 생각에 비죽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아까부터 집중 안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한우주가 불만스레 속삭였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네 생각을 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랬더니 한우주는 왜 굳이 그렇게 집중력을 흐리냐며 내 생각 속 한우주를 질투했다. 나는 거기에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로. 사람이 이렇게 사랑스럽기도 쉽지 않을 거야.
***
전부 취소다. 한우주는 진짜 나쁜 놈이다. 난 나쁜 놈은 안 좋아할 거다.
“야, 이… 미친. 와, 이… 거짓말쟁이….”
배신감이 마구 치밀었다. 한우주는 약속을 안 지켰다. 또 나만 두 눈 꾹 감고 있었다. 열감에 달뜬 기분이 분노로 물들어 갔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비비며 한우주를 힘껏 노려봤다. 한우주가 황급히 말했다.
“오해야.”
“오해는 뭐가 오해야.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으음.”
“몰라. 나 집에 갈 거야.”
이젠 한우주가 무슨 짓을 해도 안 넘어갈 거다. 한우주를 밀어 내고 꾸물꾸물 소파에서 벗어나자, 한우주가 자리에서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네 집이 어딘데?”
“어디긴. 어제 너 왔던 곳이지.”
“거긴 조현우 집이잖아.”
“이번 달 월세는 내가 냈으니까 지금은 내 집이야.”
비록 게임 시스템에 의한 불로소득이기는 하다만 내 돈이 들어간 건 맞다. 그러니까 내 집이라고 주장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그게 아니라….”
한우주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그냥 다시 들어오면 안 되는 거야?”
“어딜?”
“여기.”
“야. 나 지금 너 얄미워서 나가려는 거거든? 게다가….”
나도 한우주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러나 오늘의 일을 상기하면… 차라리 이 집을 떠났던 게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오늘처럼 네 아버지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래. 혹시라도 마주치면 네가 제일 곤란할 거잖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볼게.”
“또. 또 알아서 한다고 그런다.”
어쩌다가 눈을 감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에서 주거 문제로 화제가 번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두 가지 문제 모두 의견이 갈리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그건 한우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한우주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은근슬쩍 내 손끝을 잡으며 말했다.
“네가 거기서 혼자 지내는 게 싫어서 그래. 혼자서 잘 챙겨 먹는 것도 아니고. 라면만 먹는다며.”
“…밥이랑 김치도.”
“그래. 라면이랑 밥이랑 김치만 먹는 거잖아.”
“가끔 햄이나 계란후라이도…….”
“…아무튼 혼자 있으면 대충 먹으니까.”
현실적인 걱정이 훅 치고 들어오자 할 말이 사라졌다. 분명 한우주와 함께 살 때에 비하면 삶의 질이 떨어지긴 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 삶이 비루하다기보다는 한우주와 함께 있을 때 과분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쉬며 누릴 거 다 누린 것에 가깝지 않은가? 속으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동안 한우주는 내내 나의 손을 조물조물하며 장난을 쳤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우주가 뭐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살살 풀려 버린다. 이내 한우주가 결정타를 날렸다.
“사귀는 사이에 이 정도 걱정은 당연한 거 아니야?”
“응?”
“왜?”
“어?”
“왜 그래.”
정신이 멍했다. 한우주가 그러니까… 방금… 어….
너무 놀란 나머지 생각보다 말이 먼저 불쑥 튀어 나갔다.
“우, 우리 사귀는 거야?”
“뭐?”
한우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니, 나는…. 어, 언제부터? 뽀뽀한 뒤부터 사귀는 거였나? 한우주가 피곤함에 절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귀는 게 아니면 뭔데. 넌 사귀지도 않는데 키스하고 그래?”
“…….”
물론 그건 아니지만. 머리가 어지럽다. 나도 한우주와 사귀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사이라고 생각하곤 있지만, 문제는 시스템이었다. 한우주와 내가 정말 사귀는 사이라면, 시스템은 왜 이렇게 얌전한 거지? ‘루트 추가’가 아니라 ‘루트 진입’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 말인데, 한우주의 오해를 단단히 사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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