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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19화 (119/150)

119화

어쩌면 내가 ‘한우주와 사귄다.’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 나 한우주랑 사귀는 거구나!’ 하고 자각한 지금도 시스템은 잠잠하기만 했다. 원작 게임을 돌이켜 보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수준만 돼도 루트 진입이 됐던 것 같은데….

“태원아.”

“어, 응?”

“왜 대답이 없어.”

“음, 그게….”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이게 생각이 필요한 문제야?”

“아니,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너 지금 생각 엄청 많아 보이거든.”

아, 이걸 어떡하지. 이럴 때면 속이 답답했다. 한우주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미연시가 어쩌고, 시스템이 저쩌고. 이야기해 봤자 믿어 주지 않을 거야, 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한우주는 뭐든 믿어 줄 것 같다. 한우주가 내가 조현우 아닌 아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걸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믿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 않나? 네가 사는 세계는 진짜가 아니며, 반드시 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우주의 심정을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전부 털어놓고 싶다는 마음은 나의 욕심이다. 말하지 않는 게 나은 사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때, 돌연 한우주가 손가락을 얽어 오며 내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한우주를 봤다. 한우주는 방금 한 귀여운 행동과는 상반된, 짜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덜컥했다. 시스템에 대한 의문과 이런저런 걱정들은 일단 제쳐 둘 수밖에 없었다. 이건… 비상이다. 한우주 먼저 어떻게든 달래야 한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한우주 기분이 풀릴까? 고민할 시간 따위 없었다.

“사, 사귀자.”

“……뭐?”

“한우주 너… 나랑 사귀자고.”

살면서 사귀자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하나도 안 멋있고, 로맨틱하지도 않다. 그러나 지금은 멋을 따질 때가 아니다.

“내가 좀 촌스러운 건가? 사귀자는 말을 안 하면 사귀는 것 같지 않아. 그래서 그래….”

“…….”

“그러니까, 응? 지금 이렇게 하잖아.”

한우주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조금만 더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 나는 깍지 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민망함은 마음 한구석에 치워 둔 지 오래였다.

“우주야. 나랑 사귈래?”

…성공했다. 분명히 봤다. 한우주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한우주는 엉뚱한 곳으로 고개를 틀며 딴청을 피웠다. 웃기는 녀석. 인제 와서 튕겨 봤자 귀엽기만 한데. 한우주를 따라 몸을 기울이자, 한우주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기울이면, 또 피하고. 하찮은 장난이 몇 번 반복되자 한우주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좋아.”

***

배가 터질 것 같다. 사귀자는 말과 승낙이 오간 뒤 한우주가 한 일은 다름 아닌 ‘밥 먹이기’였다. 그걸 식사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방적인 식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우주는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어디선가 먹음직한 음식을 잔뜩 꺼내 와서는 내게 먹이고, 또 먹였다. 라면 먹고 다닌다는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그렇지만 나 라면 좋아하는데…. 아무튼 이건 정도가 지나쳤다. 웬만하면 한우주에게 맞춰 주려고 했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나 이제 못 먹어.”

“아니. 더 먹을 수 있어.”

“못 먹는다니까?”

“알았어. 그러면 조금만 더 먹어 봐.”

“진짜 못 먹는다고….”

한우주는 턱을 괸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무 말랐는데…….”

그래. 좀 마르긴 했지. 처음 뼈에 금 가고 병원 갔을 때는 영양실조라는 말도 들었고. 그런 걸 생각하면 조현우에게도 동정심이 일었다. 나는 식기를 내려놓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마르긴 했지. 조현우가.”

한우주는 흥미로운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원래 너는 안 말랐어?”

“나? 나는 딱히 마르진 않았는데? 건강해.”

“…그건 다행이네.”

한우주는 무언가 더 말할 것처럼 굴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검지로 제 입가를 몇 번 두드렸다. 조현우, 그리고 원래의 나에 관한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잘된 일이다. 아무래도 조현우 아닌 ‘원래의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엔 불편함이 있었다. 원래 세상, 나, 가족에 대해선 생각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별거 아닌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며, 우리는 식사를 정리했다.

***

한우주 집의 안락함이 새삼스럽게 피부로 와닿았다. 한우주의 원성에 못 이긴 나는 오피스텔에서 묵고 가기로 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방에 발을 들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과 다름없이 잘 정돈된, 보는 것만으로 편안해지는 방이다. 그런데 못 보던 것이 하나 있었다.

책상 위에 웬 책이 두 권 올려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익숙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호수의 주인’ 1권과 6권이다. 이전에 허지훈이 일하는 서점에서 발견하고 사 온 그 책 말이다. 이 방 책장에 꽂아 놓곤 그간 정신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한두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빼곡한 활자들을 죽 훑었다. 애초에 읽으려고 든 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책이 있어 한 행동일 뿐이라곤 해도, 내용이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았다.

‘이게 왜 책상 위에 있지?’

분명 책장에 꽂아 놓았을 텐데. 한우주가 가져다 놓은 건가? 별거 아닌 생각들이 모이고 뭉쳐 짐작과 걱정을 낳았다. 어…, 혹시 책장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나? 여기 책들, 그러니까… 한우주 어머니의 책들은 딱 봐도 각별한 느낌이 든다. 그런 책들 사이에 웬 못 보던 책이 꽂혀 있으니 빼 둔 건 아닐까, 하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책 페이지를 찢어 버릴 뻔했다. 나는 서둘러 책을 덮었다.

“한우주?”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자 한우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우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우주는 가까이 다가오며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왜 그래?”

“뭐가?”

“방금 시선 피했잖아.”

“내, 내가 언제….”

슬금슬금 옆으로 자리를 옮겨 책이 안 보이게 가리려 했다. 한우주의 눈치가 얼마나 좋은지 간과한 탓이다. 되레 눈에 띄는 짓을 해 버렸다. 한우주는 내 팔을 붙잡고, 상체를 기울여 정확히 책상 위를 확인했다.

“아, 저거. 못 보던 책이길래. 네 거 같아서 따로 빼놨어.”

불쾌하거나 곤란한 기색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정말로, 괜한 걱정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한우주는 의아한 듯 눈썹을 까딱였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건 아니고….”

“별거 아니어도 말해줘.”

한우주는 아주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려 했으나, 한우주의 집요함만 자극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한우주에게 내내 지는 날인가 보다. 그렇다 해도 한우주 앞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심스러운지라, 머뭇대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여기 네 어머니 쓰시던 방이잖아.”

“…그게 왜?”

‘그러게.’라고 대답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냈다. 방금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생각보다 더 한우주 어머니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하긴, 방 안이 그분의 흔적으로 가득한데 무의식적으로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실컷 편하게 지낸 주제에 인제 와서 이런 말 하기 웃기긴 한데…, 혹시 네 어머니 물건… 그러니까, 책장 건드린 게 불쾌했나, 싶어서…….”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 수 있었다. 한우주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가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안 그래. 너 갖다주려고 따로 빼놓은 거야. 여기 두는 게 좋으면 도로 꽂아 놔도 상관없어.”

“응…. 그렇다면 다행이네.”

“혹시 이 방 쓰는 게 부담스러웠어?”

한우주가 대뜸 물었다. 말없이 눈만 끔뻑이자 한우주는 말을 고르듯 눈가를 찌푸렸다.

“그럴 필요 없어. 돌아오실 일은 없을 테니, 정말로 빈방일 뿐이야.”

“……아.”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우주는 내게 ‘사정이 있어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는다.’ 정도만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어머니와의 사정을 거의 알고 있지 않은가? 혹여 한우주가 내게 이야기하지 않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까 조심스러웠다. 한우주는 그런 나를 무어라 생각한 것인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괜한 생각 할까 봐 말하는데, 돌아가신 건 아니야.”

“…그래?”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응하려 애쓰며 한우주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한우주는 내 오른손을 잡아끌더니 제 무릎 위에 올리고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냥, 말 그대로 갑자기 떠나셨어.”

한우주의 어머니에 대해선 원작 게임에서조차 길게 언급된 적이 없다. ‘몇 년 전, 한우주를 두고 모습을 감춘 뒤로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수준의 간단한 문장만 한두 줄 서술되어 있을 뿐이었다. 본래 한우주가 이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 어떤 공략 캐릭터에게도. 나는 당혹감을 가까스로 감추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떠났다니. 너한테 말도 안 하시고?”

한우주는 시선을 내린 채 잠시 말이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둘러 덧붙이려던 때에 한우주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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