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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20화 (120/150)

120화

“어릴 때였는데, 이상하게 새벽에 갑자기 눈이 떠졌어. 복도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 봤거든.”

한우주는 지극히도 덤덤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한우주가 내게 어떤 말을 들려 주려는지 바로 알지 못했다. 바닥에 머물던 한우주의 시선이 어딘가로 옮겨 갔다. 한우주는 책장을 보고 있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어머니였어. 커다란 가방을 들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시더라고. 이 밤에 어딜 나가려는 건가, 싶어서… 불렀지. 뭐 하시냐고.”

나는 그제야 한우주의 말속에 억눌린 괴로움을 눈치챘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때 분명 눈이 마주쳤었는데.”

한우주는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바로 마주했다. 찰나의 침묵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나는 어쩐지 그 순간을 버티기 힘들었다. 다행히도 괴로운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금방 서둘러 가 버리셨어. 그 이후로 연락이 닿은 적도 없고, 소식 들은 것도 없어. 그게 다야.”

어머니가 떠나는 모습을 한우주가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한우주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될 날이 오게 되리라는 것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분명 상처받았을 텐데. 어디에도 편히 말하지 못하고 오래 묵혀 두었을 것이다.

이런 순간마저 차분한 한우주의 태도가 도리어 안타깝게 느껴졌다. 한우주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지만, 아마도 겉보기와는 영 딴판이지 않을까. 바람 잘 날 없는 소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한우주는 언제부턴가 장난을 멈추고 얌전히 내 손을 쥐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한우주가 마음껏 속을 털어놓았으면 했다.

“어머니가 원망스럽지는 않아?”

한우주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당연히 원망스럽지. 날 떠났잖아.”

“…….”

그러나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차마 더는 무언가를 물을 수도,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내가 과연 위로를 건넬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한우주는 자신이 반응하기 곤란한 주제를 꺼냈다고 생각한 것인지, 화제를 돌렸다. 네 책은 왜 1권과 6권만 있느냐며. 보통 1, 2권이나 5, 6권처럼 연달아 사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멋쩍게 답했다.

“아 저 책…. 1권은 너 읽으라고 사 온 거였는데 말하는 걸 잊었어.”

“…나 읽으라고 산 거라고?”

“응. 내가 좋아하는 책인데, 그냥. 너 보면 항상 같은 책만 읽는 것 같길래.”

한우주는 말이 없었다. 거기에 괜히 어색해진 내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 혹시 판타지 소설 싫어하나? 그러면 안 읽어도 되고…. 어쩌다 보니 산 거라.”

“아니야. 읽을게.”

그리고 한우주는 몹시도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멍하니 한우주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울렁였다. 한우주를 좋아하는 만큼 정체 모를 불안감이 함께 쌓여 갔다. 나는 내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한우주의 손에 ‘호수의 주인’ 1권을 쥐여 주었다. 한우주는 다 읽고 감상평까지 이야기할 것을 약속하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책이나 읽을까, 생각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잘 안되었다.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디링-.

「System: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메인 퀘스트:: 내 사랑은 누구?!

♥내용: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의 루트에 진입하세요.

♥완수 시 보상: 특별한 호칭과 두근두근 새로운 시스템!

♥실패 시 패널티: ‘베드 엔딩’에 진입합니다.

♥기한: 30일

※ 해당 퀘스트에는 기간 제한이 있습니다. 표기된 기한 안에 완수하지 못할 시 실패 처리되오니, 유의 바랍니다.

※ 남은 기한은 퀘스트 창에 표기됩니다. D-30」

***

수업 따위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필 오늘은 2교시 연속 수학 시간이라, 윤태현의 얼굴을 보기 싫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나는 턱을 괸 채 창가나 바라봤다. 운동장에선 야구부 연습이 한창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 안에 인하성은 없을 것이다.

‘베드 엔딩이라고…?’

차마 귀마개를 꽂을 수는 없어 들려오는 윤태현의 목소리, 야구부를 보니 떠오르는 인하성, 그리고 얼마 전 마주한 퀘스트까지. 심란할 수밖에 없다. 그래, 원작 게임에선 벌써 루트에 진입하고도 남았을 시기이다. 아니면 게임 오버 당해서 처음부터 다시 하고 있겠지. 그런데 여태 루트 진입 하나를 못 했으니 시스템이 닦달하는 것도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우야.”

그렇지만 베드 엔딩이라니. 베드 엔딩이면… 뭔데? 아직 루트 진입도 안 했는데 베드 엔딩은 무슨…. 게임 오버를 말하는 걸까?

“현우야?”

솔직히 많이 억울하다. 시스템에는 ‘안태원 루트’가 버젓이 존재하고, 또… 한우주랑 사귀기까지 하는데. 이쯤 됐으면 루트 진입하고도 남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놈의 게임은 패널티가 베드 엔딩인 퀘스트나 띄우고 있다.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베드 엔딩도 엔딩 아니야?’

게임 종료의 조건이 엔딩 달성이었으니까. 게임 오버라고 표현하지 않고 굳이 ‘베드 엔딩’이라는 말을 갖다 쓴 걸 보면, 이 역시 엔딩으로 취급해 주는 거 아닐까? 그러면 나… 한 달 뒤에는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나? 생각은 줄줄이 이어졌고, 나는 확실치도 않은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아니, 별로 행복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게임의 주인공은 한우주니까, 한우주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라면 나의 행복이랑도 거리가 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마음만 끝없이 복잡해졌다.

“현우야!”

“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윤태현이 있었다.

“문제가 잘 안 풀리니?”

“…아, 아니요.”

윤태현이 나의 책상 위를 흘끔 쳐다봤다. 아무 페이지나 막 펼쳐둔 데다가 내내 창밖을 보고 있었으니, 대놓고 수업을 듣지 않았다고 광고하는 행색이었다.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자, 윤태현이 따라 웃었다. 뭔… 이 양반이 미쳤나?

“음… 잘 안 풀리는 것 같은데? 그럼 질문을 해야지, 현우야.”

“……아하하.”

제발 나 좀 가만두고 수업이나 해라. 생각하며 주위를 슬그머니 둘러봤다. 아무래도 방금 수업을 얼추 마치고 문제 풀이를 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태현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게 무엇이 제일 어렵냐며, 때아닌 집중 교육을 하려 들었다.

“선생님.”

그때, 바로 뒤쪽에서 윤태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윤태현의 시선이 동시에 한우주를 향했다. 한우주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저 모르겠어요. 안 풀려요.”

“아, 잠깐만. 선생님이 현우 먼저 봐주고….”

“걘 질문 안 했잖아요.”

“응?”

“저는 질문했는데요. 그럼 제가 먼저 아닌가.”

한우주… 쟤 미묘하게 말이 짧다? 윤태현은 용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내게 말했다.

“그러네. 현우야, 우주 먼저 봐주고 올게.”

“아, 네.”

나로선 썩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다. 윤태현이 한우주의 곁을 어슬렁거리는 거나, 나한테 참견하는 거나. 둘 다 비슷하게 싫다. 윤태현은 한우주에게 무엇이 궁금해서 불렀냐고 물었고, 한우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

“아, 그거는.”

“부터 저기까지 다요.”

“…응?”

무슨 상황인가 싶어 슬쩍 뒤를 돌았다. 한우주는 교재를 스무 페이지쯤 집어 윤태현 앞에 당당히 보였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 뒤로 윤태현이 한우주에게 이해했느냐고 물을 때마다 한우주는 고개를 젓거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그저 웃겼다. 그러나 윤태현이 수업 시간이 지나고, 다음 쉬는 시간까지 한우주에게 붙잡혀 있자 슬슬 짜증이 났다. 윤태현이 다음 수업을 하러 가야 한다며 급하게 교실을 빠져나간 뒤, 나는 뒤돌아 한우주를 보고 말했다.

“진짜 몰라서 물은 거야?”

“…글쎄?”

“야, 한우주.”

“왜?”

“나 수학 잘해.”

한우주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나는 아랑곳 않고 내 불만이나 털어놓았다.

“윤태현이랑 너랑 같이 있는 거 보기 싫다고. 물론 선생보다야 못하겠지만 웬만한 건 풀 수 있으니까 물어볼 거면 나한테 물어봐.”

“그런데 시험을 그렇게 못 봤어?”

한우주가 또 시험 성적 가지고 툴툴거렸다. 귀여워서 어이가 없다. 나는 의자를 길게 빼고 한우주 쪽으로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그건 조현우 성적에 맞추느라 그런 거지.”

“굳이 그렇게까지? 그러다 너….”

“대학 못 간다고? 걱정하지 마. 갈 거니까.”

한우주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태원아.”

“응? 아니, 너….”

밖에선 태원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뽀뽀하고 싶다.”

“뭐?”

“뽀뽀하고 싶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미친.”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구석 자리고, 워낙에 작게 말해서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우주 이놈이 조심성 없게.

“왜? 하면 안….”

결국, 손으로 한우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우주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가, 손바닥 위로 입술을 눌렀다. 나는 불에 덴 사람처럼 서둘러 손을 뗐다.

“미쳤어?!”

“아니. 이따가 집에서는 해도 되지?”

“와, 한우주 너 진짜….”

이런 구제 불능을 봤나.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짜증 난다. 한우주가 뽀뽀 얘기하니까 나도 하고 싶어졌다.

이래서 다들 연애를 하나…. 상대가 미친 짓을 해도 귀여워 보이니 답이 없다. 한우주도 답 없이 행동하는 걸 보면 나를 꽤,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게 분명할 것이다. 생각이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왔다.

왜 루트 진입이 안 되는 걸까? 이런 식으로 질질 끌다가 베드 엔딩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조건이 걸려 있는 건가, 싶어 ‘Help’ 기능으로 시스템에게 물어보고자 했지만 알려 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렇게 별다른 수확도 없이 며칠이 지나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다름 아닌 한우주가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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