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22화 (122/150)

122화

“어차피 다 얘기할 거면서 왜 거짓말을 해…?”

“음….”

한우주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대답조차 안 하고 어깨만 으쓱였다. 어이가 없을 뿐 화는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가 얇게 입고 나간 걸 걱정해서 나온 주제에, 본인 옷차림은 돌아보지 않은 한우주가 신경 쓰였다. 한우주는 집에서 책을 읽다 바로 나왔는지 얇은 회색 티셔츠에 검은 바지만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입을 카디건만 챙겨 급하게 나온 모양이다. 나는 한우주의 손을 끌어 잡고 오피스텔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평소 따뜻하던 한우주의 손은 미지근했다.

“됐어…. 들어가서 마저 얘기하자."

혹여 한우주가 감기라도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한우주도 같은 마음으로 나를 걱정했을 걸 생각하면 웃음이 살며시 새어 나왔다. 오피스텔에 가까워질수록 어째서인지 임도윤에게 건넨 생각과 말에 확신이 더해졌다.

그래. 분명 내게 말 안 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하고.

***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우주를 소파에 앉히고 주방을 기웃거렸다. 따뜻한 차라도 마시게 해 주고 싶었는데, 웬 집에 마실 게 커피밖에 없었다. 괜히 커피 마셨다가 잠을 설칠까 싶어 한우주에게 따뜻한 물을 쥐여 줬다. 한우주는 고맙다고 짧게 인사하고는 온기 어린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숨과 함께 운을 뗐다.

“어차피 전부 시간문제였어.”

‘내가 알아서 할게.’보다야 낫지만 이 역시도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한우주는 서둘러 말을 이어 갔다.

“워낙 변덕스러운 분이시라. 저번에 집 이야기 했던 거 기억해? 아버지가 여길 처분하니 마니 했던 거.”

그사이 또 거주 문제로 무슨 말이라도 나왔던 건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응. 기억해.”

“불시에 당할 바엔 내 쪽에서 먼저 행동하는 게 낫겠더라고. 또… 그렇게 해야 아버지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기도 했어.”

“그랬구나…. 잠깐만, 어?”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었나? 한우주가 제 아버지의 기분에 맞추어 행동했다고 말하는 건가? 한우주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멋쩍게 제 목을 매만졌다.

“예전에는 아버지한테 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 사람이 뭘 어떻게 하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고, 또 굳이 상관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았는데….”

한우주의 시선이 방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이내 나와 시선을 바로 맞추며 말했다.

“……앞으로 너랑 해야 할 게 많잖아.”

“…어?”

“수험 생활 지나면 대학도 가야 하고. 그 뒤의 생활도 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아버지랑 불안정했다간….”

“응? 자, 잠깐만.”

나도 모르게 한우주의 말을 끊고 들었다. 갑자기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로 훅 치고 들어온다고? 당혹스러워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우주 너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한 거야?”

“뭐가?”

“나랑… 뭘… 어디까지….”

왜 네 미래에 당연하게 나를 두고 있는 것이냐고. 차마 그렇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냥. 이거저거 하지. 대학 얘기는 자주 하기도 했잖아.”

“그, 그렇긴 한데….”

말끝을 늘인 채 한참 말이 없자, 한우주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는 너는?”

“…….”

“태원이 너는 이런 거 생각 안 해?”

“나?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당장 한우주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형편없는 대답을 했다.

“나, 나도 하지….”

이런 어설픈 말에 한우주가 속아 넘어갈 리 없다. 한우주가 따져 물으면 어떡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상처 주지 않고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우주의 입이 열렸다.

“어쨌든, 본가에 가는 건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한우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한우주를 멀뚱히 쳐다보자, 한우주는 살며시 미소 짓고는 심호흡했다.

“말하려고 했어. 정말이야. 그런데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그 와중에 임도윤이 널 불러낼 줄은 더더욱 몰랐고. 덧붙이는 말에 양심이 아팠다. 임도윤이 부른다고 그렇게 바로 나갈 일이냐면서, 제게 물으면 되는 일 아니냐고 따질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언제 들어가는데?”

“이번 주 주말.”

“빠르다.”

“응. 그러네.”

“거기서 괜찮겠어? 아버지랑, 임도윤이랑….”

“나는 괜찮아. 그 집 사람들이 안 괜찮겠지.”

한우주는 정말로 괜한 걱정이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만 더 안 좋아졌다. 거기엔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을 텐데. 무심코 한 생각에 한우주에겐 어머니가 떠난 뒤부터 의지할 사람 따위 곁에 없었다는 걸 새삼스레 실감했다. 그래서 저렇게 덤덤할 수 있는 걸까? 한우주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내키면 여기서 마음대로 머물러도 돼. 나도 종종 올 테니까.”

“어? 여기 처분하는 거 아니야?”

“안 해. 하지 말라고 했어. 그런 조건으로 들어가는 거야.”

얌전히 아버지 말에 따르는 건 아니었구나. 그사이 아버지랑 거래까지 한 셈이다. 한우주는 여기서 매일 지내도 괜찮다고 말하며, 은근슬쩍 원룸은 빼는 게 어떻겠냐고 내게 권했다.

“여길 오래 비워 두긴 싫어서 그래.”

“왜?”

“그냥. 여러모로 추억이 많은 곳이니까.”

솔직히 한우주도 없는데 여길 올 이유가 있나? 생각하던 찰나에 이런 말을 들어 버리면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원룸은 못 빼도 매일 올게.”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한우주가 예쁘게 웃었다. 그러곤 시간이 늦었다며, 얼른 올라가서 쉬라고 재촉했다. 그래 놓곤 자긴 소파에 찰싹 붙어 있길래, 너는 안 잘 거냐고 물으니 책을 조금 더 읽어야겠다고 했다. 한우주는 벌써 5권을 읽고 있었다. 나는 아직 6권도 다 못 읽었는데.

“적당히 읽고 너도 얼른 자.”

“알았어.”

이러다 얘 해 뜨고 자는 거 아니야? 문득 든 걱정에 한우주에게 몇 페이지까지 읽고 몇 시에 잘 건지 캐물었다. 구체적인 대답까지 듣고 난 뒤에야 나는 만족스레 몸을 돌렸다.

“태원아.”

그때, 한우주가 나를 불렀다. ‘왜?’ 하고 대답하며 뒤돌자, 한우주는 웬일인지 뜸을 들였다.

“잘 자라고.”

“응? 아까도 인사했잖아.”

“또 하고 싶어서.”

한우주 한정으론 나도 눈치가 제법 늘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한우주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왜 그러냐고, 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문득 불안감이 치밀어 묻는 것을 관두었다.

“…너도 잘 자.”

당장은 별 의미 없는 인사밖에 건넬 수 없었다.

***

그 뒤로 한우주가 정말로 오피스텔을 떠나 본가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몇 날 며칠이고 한우주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심란해졌다. 더는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코앞까지 다가와 두려움을 낳았다. 한우주는 나와 크고 작은 미래를 그리며 자신을 바꾸고 있다. 제 오랜 고집을 물리면서까지 이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한다.

나는 한우주가 부담스러운 걸까? 한우주의 감정이 버거운 걸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 보면… 아니다.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그런 한우주가 좋았다. 이 감정은 별개로, 슬픔에 가까웠다.

나는 내 미래에 한우주가 당연히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탓이다. 애초에 나의 목적은 이 게임 속을 벗어나는 데 있고, 한우주와의 이별은 바꿀 수 없는 결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비참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러 피해 왔던 많은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한우주가 좋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나의 가족과 현실 또한 내겐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애초에 포기한다는 선택지도 없지 않은가? 게임까지 퀘스트를 던져 가며 엔딩을 볼 것을 종용하는 마당에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설마 이게 문제인가?’

한우주가 없는 오피스텔에 발을 들이며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시스템이 나를 ‘공략 캐릭터’로 인지하고 있다면, 나의 마음 역시 중요한 게 아닐까, 하고. 한우주를 좋아하면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이 상황이 루트 진입에 장애가 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거 봐, 결국 또 루트가 어쩌니 뭐니 하고 있잖아.’

결국 모든 건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것만큼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우주를 좋아하게 되고, 사귀고, 하는 것들은 전부… 수단일 뿐인 걸까?

멍하니 계단을 올랐다. 일단 옷을 갈아입고 씻고 싶었다. 그 뒤엔 한우주한테 연락도 해야 하고…. 오피스텔에 종종 오겠다던 한우주는 본가에 들어간 뒤로 급격하게 바빠졌다. 아마 이대로라면 한동안 못 오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서 볼 수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원래는 하루 종일 함께했다 보니 빈자리가 크다. 게다가 학교에선 단둘이 있을 기회가 없으니까….

‘아, 미친.’

얼굴이 홧홧했다. 얼른 씻기나 해야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손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뭐지? 분명 닫고 나갔을 텐데?

‘설마 한우주인가?’

집에 가다가 갑자기 스케줄이 비어서 온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들뜬 마음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환하게 웃으면 손님 방에 발을 들였다.

“한우주?”

반가운 마음에 이름부터 부르고 봤다. 그러나 무언가, 아니 그냥 대놓고 이상했다.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주머니 속 핸드폰을 꾹 쥐었다. 상대는 수트를 차려입고 있어, 도둑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리고….

“…아.”

“……너는 누구냐? 왜 여기에 있어?”

몸을 돌려 나와 바로 마주 선 뒤에야 상대방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다.

임 회장, 한우주의 아버지. 그가 나를 힘껏 노려보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