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숨 막히는 적막이 맴돌았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이걸 어쩌면 좋지, 굼뜬 머리와는 다르게 실행력을 갖춘 몸이 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발이 복도에 닿기 무섭게 나는 다짜고짜 문을 닫아 버렸다. 인간이 너무 당황하면 답이 없을 정도로 용감해지나 보다.
“이봐!”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임 회장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아무튼 그는 내 시야 안에서 사라졌고, 나는 몸에 힘을 실어 문을 틀어막아 버렸다.
미쳤다. 이제 어떡하지? 쿵, 쿵. 등으로 요란한 진동이 전해 왔다.
“이 문 안 열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지, 진정하시면 열어 드릴게요.”
“진정? 지금 누구더러 진정하라는 말을!”
슬슬 겁이 났다. 이래도 되는 건가? 아니, 당연히 안 되지. 임 회장 같은 인물이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목덜미 잡고 쓰러지곤 하던데. 저러다가 혈압 올라서 쓰러지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문을 열자니….
‘모르겠다. 일단 하, 한우주한테 연락해야….’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아 손이 떨렸다. 핸드폰을 바로 잡고, 한우주에게 전화를 걸려던 때였다. 나는 전화를 걸기는커녕 핸드폰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 미치겠네.
“미친 게냐? 문 열라고 했어!”
“그… 저 우주 친구예요.”
“지금 누가 그딴 걸 물었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임 회장에게 된통 당하는 미래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미래는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임 회장의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 나를 문에서 떼어 낸 것이다. 그렇게 성난 황소 같은 임 회장이 세상에 풀려나고 말았다.
나를 죽어라 노려보는 임 회장을 보고 당황해서 그랬다며, 죄송하다고 빠르게 사과한 뒤 웃어 보였지만, 당연하게도 임 회장의 분노는 고작 그 정도로 풀릴 것이 아니었다.
임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비서를 향해 물었다.
“우주는?”
“자택에 계신다고 합니다. 곧 과외 일정이 있으시고요.”
“오늘 일정 취소하고 어디 못 가게 붙들어 놓으라고 해.”
“네, 회장님.”
“업체 불러서 여기 청소하고. 구석구석 꼼꼼히. 내가 나중에 직접 확인할 거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임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집에서 썩은 내가 진동한다 싶더니. 별 쥐새끼 같은 게….”
목소리는 싸늘했다. 모욕적인 말에 반응할 새 없이 임 회장은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잠시 멍하니 있자면, 임 회장의 비서는 나더러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하며 내 팔을 움켜잡고 임 회장의 뒤를 따랐다. 나는 거센 물살에 휘말린 것처럼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그대로 임 회장의 차 뒷좌석에 앉아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움츠러들어 있어야 했다.
머릿속에 온갖 안 좋은 상황들이 그려졌다. 초조함을 못 견딘 나는 몇 번인가 ‘저기….’ 하고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전부 무시당했다. 한우주에게 몰래 문자라도 보내려고 보니 핸드폰이 없었다. 맞다. 아까 떨어트렸었지.
…아무래도 진짜로 망한 것 같다.
***
한우주의 본가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했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 뒤, 매끄럽게 진입한 거리에는 고급 주택이 즐비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화려하고 거대한 주택. 한우주가 지낸다고 생각하려니 어쩐지 이질감이 드는 곳. 여기가 바로 임 회장의 집, 한우주의 본가라고 한다. 한우주가 재벌가 아들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피부로 와닿았다.
임 회장의 집은 예상과는 다르게 몹시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정성스레 가꾼 티가 나는 널찍한 정원에는 웬 커다란 리트리버 두 마리가 뛰놀고 있었다. …개를 키운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두 마리의 개는 낯선 이의 방문을 반기려다 곧, 임 회장의 손짓에 얌전히 길을 틀었다.
현관에 다다를 때까지 임 회장과 그의 비서로 보이는 사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물게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어색한 침묵을 깨어 냈다. 그때, 돌연 안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도련님, 잠시만요!”
문을 열고 뛰쳐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한우주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한우주는 잔뜩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금방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곤 현관을 막아선 채로 임 회장을 향해 말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모르는 척하는 게냐?”
“뭐가요.”
“한우주.”
한우주는 임 회장의 부름에 대꾸하지 않고 내 쪽을 한 번 흘끗거렸다.
“…오고 싶어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아버지, 이젠 사람도 막 끌고 다니세요?”
“적당히 해라, 한우주.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임 회장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한우주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괜히 내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한우주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돌려보내요. 저한테 볼일 있으신 거잖아요.”
“한우주!”
임 회장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네 어머니 방에 누군가 머무른 흔적이 있던데. 모른 척할 생각은 말아라!”
“모른 척할 생각 없어요.”
임 회장의 얼굴이 분노에 물들었다. 미래가 보인다. 임 회장이 열받아서 쓰러지는 미래가……. 나는 주뼛주뼛 말을 꺼내려 들었다. 뭐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진정시킬 말을….
“저, 저기…, 일단….”
“어디서 끼어들어!”
“왜 엄한 데 성질을 부리세요?”
“하, 한우주 제발… 조용히….”
“…….”
나도 모르게 흘린 말에 한우주가 정말 입을 조용히 다물어 버렸다. 이,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한우주 너, 네 아버지 말 잘 듣기로 한 거 아니었냐고. 아니나 다를까 임 회장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망할…. 임 회장은 나와 한우주를 한 번씩 노려보았다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밖에서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구나. 할 말은 많다만 일단 집에 좀 들어가서 하자.”
한우주는 어떻게든 이 요란한 현장에서 날 빼내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무리였다. 결국엔 전부 임 회장의 뜻대로 흘러갔다. 나는 천근만근 한 발걸음을 겨우겨우 떼어 냈다. 화려한 집이 당장이라도 날 집어삼킬 듯했다.
***
‘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을까….’
나는 방문 근처를 서성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임 회장이 말하는 ‘이야기를 할 대상’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았다. 나는 한우주에게 보여 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나는 저 둘 사이의 대화에 단 일 초도 끼지 못한 채 임 회장의 의지에 따라 어떤 방에 처박혔다. 대화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있으라는 것이다.
‘…내가 너무 방심했나 봐.’
한우주랑 사귄다는 사실에 들떠서, 한우주와의 일에 온 신경이 매몰돼서 임 회장의 존재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했지?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의미 없는 후회와 불안만 커질 즈음이었다.
“야.”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미친, 네, 네가 왜….”
“왜 이렇게 놀라? 뭐 훔쳤냐?”
“아니!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뭐? 너 웃긴다. 난 이 집 사는 사람이거든? 내 집에 내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인가?”
임도윤은 팔짱을 끼며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억울해져 곧장 받아쳤다.
“그게 아니라. 이 방에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났잖아.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여기 무슨 비밀 문이라도 있냐고….”
“…여기 옆 방이 내 서재고, 테라스가 이 방이랑 이어져 있어서 와 봤다. 비밀 문 없어서 실망했냐?”
“아…….”
임도윤은 혀를 한 번 차곤 말했다.
“너랑 한우주 때문에 난리 났잖아. 멍청하게 왜 들키고 지랄이야, 진짜. 정신없게.”
“…난리 났어?”
“그럼. 우리 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넘어갈 사람처럼 보여?”
“아니. 난 그냥…. 둘이 무슨 얘기 중인데?”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디 방에 들어가서 얘기하는 것 같더니만.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한우주 일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진짜.”
…한우주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면서, 나는 왜 찾아온 거지? 아무튼 겉만 화려하지, 실은 삭막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마주치고 보니 임도윤은 꽤 반가운 인물이었다. 아는 얼굴이라서 그런가? 정말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는 몰라도 내겐 잘된 일이기도 하다. 동아줄이 내려온 것만 같다. 이 동아줄이 썩었는지 어쨌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다.
“저기, 임도윤.”
“왜.”
“지금 여기 밖에… 누가 지키고 서 계시거든. 내가 여길 나갈 수가 없어.”
“어. 그렇겠지.”
임 회장은 날 있는 사람 취급도 안 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쾌해 보였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방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욕을 먹어도 좋으니 한우주의 옆에 있고 싶었다. 적어도 한우주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임 회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고 싶다. 나는 절박함을 담아 말했다.
“나 좀 도와줘.”
임도윤의 인상이 구겨졌다. 나는 임도윤이 뭐라고 하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 바보 같고 싫어서 그래. 네 말대로 멍청하게 들킨 마당에, 더 멍청하게 굴기 싫어서.”
임도윤은 미간을 좁힐 뿐, 대꾸하지 않았다.
“네가 나랑 한우주 질색하는 거 알아. 굳이 네 신경 건드리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진짜 미안한데. 당장 부탁할 사람이 너뿐이라서 그래.”
“…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그게 돕는 거야.”
“큰 거 바라는 거 아니야. 한우주랑 너희 아버지랑… 지금 무슨 얘기 하는지라도 알고 싶어. 나랑 관련 있는 얘기일 거 아니야.”
“뭐든 한우주가 알아서 하겠지.”
“그게 싫어.”
“뭐?”
“한우주한테만 따지고 묻고, 책임 묻고 하는 이 상황이 싫다고. 네 말대로 가만히 있는 게 가장 나은 길일 수도 있는데. 그런데… 상황을 알고 가만히 있는 거랑 모르고 가만히 있는 거랑은 다르잖아.”
“…….”
“이것도 주제넘은 생각이야?”
임도윤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두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다 ‘아이씨….’ 하고 작은 소리로 성질을 부렸을 땐 아무래도 그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도윤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짜증 나게 구네, 진짜. 따라와.”
“어?”
“따라오라고. 마음 바뀌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