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나 도와주려고?”
“너 진짜 사람 열받게 한다.”
임도윤은 툴툴대며 말하곤 테라스로 향했다. 나는 긴가민가하며 그 뒤를 따랐다. 테라스로 연결된 옆 방은 임도윤의 말대로 서재이자 공부방으로 쓰이는 듯했다. 온갖 책과 문제집, 책상, 컴퓨터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임도윤은 목을 가다듬으며 내 주의를 끌고는, 핸드폰을 내밀며 대뜸 번호를 달라고 했다.
“번호는… 왜? 꼭 필요한 거야?”
“바보냐. 연락하면 받으라는 거 아니야.”
“어, 음….”
“아직도 이해 못 했어? 도와주겠다고. 연락할 일 있을 수도 있으니까 번호 달라고. 하나부터 백까지 설명해 줘야 알아?”
“아니, 네가 뭘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나 핸드폰이 없어.”
순간 임도윤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어, 어? 어… 그, 그러냐?”
“응?”
“미, 미안하다? 네가 그 정도로, 아니. 씹….”
잠깐만. 얘 아무래도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씨, 진짜.”
미처 항변하기도 전에 임도윤은 내 손에 제 핸드폰을 쥐여 주며 말했다.
“그럼 이거 들고 있든가. 난 서브폰 있으니까.”
임도윤은 속사포로 말했다가 잠시 인상을 구기며 내게 신신당부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문자 보내면 나와.”
그러곤 그대로 서재 방을 빠져나갔다. 곧, 문 너머로 임도윤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여서 뭘 못 하겠네. 언제까지 여기 서 계실 건데요?”
“그, 죄송합니다. 회장님이 시키셔서요.”
“아버지가? 아, 뭐. 그건 그거고요. 당장 내가 신경이 쓰여서 죽겠거든요. 덕분에 공부를 못 하겠다는 말이에요.”
임도윤은 옆방 문 앞을 지키고 계신 분께 말 그대로 진상을 부렸다. 자신이 고등학교 3학년인 점과 올해 수능까지 들먹이며 ‘재수하면 당신 탓’이라고까지 하는데 억지도 저런 억지가 또 없었다. 졸지에 재벌가 도련님의 갑질 피해자가 된 사용인분께 죄송스러울 지경이다.
결국, 사용인분께선 ‘도련님이 회장님께 잘 말씀해 주세요….’라고 이야기하시곤 자리를 떠나셨다. 이어 손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와.」
임도윤에게서 온 것이었다. 주뼛거리며 밖으로 나서자, 임도윤은 영 찝찝하다는 얼굴로 한마디 했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엄한 사람한테 화를 다 내고….”
넌 원래 숨 쉬듯이 화내는 거 아니었어? 불쑥 떠오른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자, 임도윤은 미간을 좁힌 채 ‘알면 됐어.’라고 말하곤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임도윤이 보여 준 의외의 모습에 놀랄 새도 없이 열심히 그 뒤를 쫓아야만 했다.
***
저택은 조용했다. 덕분에 임 회장과 한우주가 있는 방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신 건지 이해가 안 가네요. 빈방에 사람 한 명 들였을 뿐이잖아요.”
“한우주. 몇 번이고 말했지만, 거긴 네 어머니 방이야.”
“어머니 방이었죠. 예전에는. 지금은 완전히 떠나셨고요.”
“한우주!”
이렇듯 간간이 울리는 임 회장의 성난 외침을 쫓다 보니 구석진 곳에 있는 방 앞에 도달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틈새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임도윤은 망을 보고 있겠다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임 회장의 언성이 높아지자 내 옆자리를 차지하곤 함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이 시간엔 사람 없으니까 괜찮거든.’ 하고 괜한 변명까지 덧붙이면서. 아무렴 상관없었다. 한우주의 격양된 목소리가 나의 온 신경을 앗아가 버렸으니까.
“제가 틀린 말 했어요? 벌써 오 년이에요. 진작 떠난 사람이라고요. 어머니 삶에는 아버지도, 나도 없단 말이에요.”
한우주가 내뱉는 말들은 분명 제게도 상처가 될 것이었다. 속상함을 억누르고 있을 한우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임 회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쯤 해라, 한우주. 네가 누구 덕분에 이 모든 걸 누리고 있는지 생각하고 말해.”
한우주가 헛웃음을 뱉었다. 임 회장이 이어 말했다.
“너라서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도대체 영리한 녀석이 웬 변덕인지 이해가 안 가는구나. 혼자 지내는 게 그렇게 무료했느냐? 네 공간에 아무나 막 들일 만큼?”
“…….”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수준을 가릴 줄 알아야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녀석을….”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긴장감에 몸이 경직되고,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임 회장의 무례한 언사 때문이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한우주를 신경 쓰는 것만으로 벅찼다.
한우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라도 나와의 관계를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예전의 한우주라면 아버지의 모욕을 받을 일 따위 없었을 텐데. 그 자리에 있던 게 나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서연준 정도 됐으면 임 회장이 저렇게 성을 내진 않았겠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내 팔을 조심스레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고 보자, 임도윤이 급히 손을 떼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그. 이런 거 무리해서 듣고 있을 필요 없지… 않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임도윤은 잠시 안절부절못하다가 낮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우리 아버지가 원래 흥분하면 말을 좀 막 해.”
그 말엔 웃음이 나왔다.
“별로 신경 안 써. 너한테도 비슷한 말 들어봤는데, 뭘.”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나는 임도윤이 내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거나, 신경질이라도 낼 줄 알았다.
“……그땐 내가… 아씨, 미안했다.”
“뭐?”
“미안했다고. 막말해서.”
임도윤이 뭘 잘못 먹었나?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 뜨고 보자, 임도윤은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멍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속삭였다.
“…아니, 나야말로. 지금 너한테 할 말은 아니었는데. 미안.”
임 회장 때문에 날이 서 있다 해도 그렇지, 날 돕고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사과를 듣고 속 시원해할 줄 알았는데, 임도윤은 되레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임도윤이 원래 이런 애였나?’
지금까지 접한, 특히 게임 속에서의 임도윤은 주변을 배려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한우주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모습을 보면 또 달랐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든가, 자기 행동을 반성한다든가…. 전부 ‘내가 아는’ 임도윤과는 거리가 있었다.
“방금 뭐라고?”
이내 나는 임도윤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 회장이 또다시 큰소리를 낸 탓이다. 한우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시든 태….”
한우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침착하게 이어 갔다.
“……현우는 제 친구예요. 아무나 들인 게 아니라, 친구라서 그런 거라고요.”
…슬슬 자리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우주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임 회장이 화내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상대는 임 회장이 끔찍이 아끼는 막내아들, 한우주니까. 정 한우주와 나를 떼어 놓고 싶거든 금쪽같은 아들보다는 내게 수를 쓰겠지. 살면서 접한 재벌물의 흐름을 생각하면 그쪽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이 순진하기 짝이 없게 느껴질 정도로, 임 회장이 차갑게 말했다.
“한우주. 감히 내게 반항할 생각은 말아라. 그까짓 놈 때문에 지금….”
“그까짓 놈이 아니라….”
“어디서 말을 잘라먹어!”
“…….”
“그간 좀 풀어 줬다고 잊은 모양인데, 한우주 넌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무슨, 방금 임 회장이 뭐라고 한 거야?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주, 생각해 봐라. 어머니조차 버린 너를 거두어 준 게 누구지? 지금 널 돌봐 주고 있는 사람은?”
한우주는 침묵했다. 임 회장은 그 침묵이 만족스러운 듯, 한결 풀어진 투로 말했다.
“나는 널 은혜도 모르는 녀석으로 키우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욕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우주 너랑 언성을 높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내 말은, 너도 슬슬 주변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야 내가 널 계속 봐 주지 않겠니. 임 회장이 부드럽게 건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영리하게 굴어야 한다. 네게 정말로 필요한 게 뭔지 잘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해.”
임 회장 이 망할 놈.
저게 어딜 봐서 한우주를 아끼는 거냐? 속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자기 위치를 이용해서 한우주를 매어 두고, 주변까지 통제하려 들 뿐이잖아. 협박까지 해 가면서.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임 회장과 한우주를 떼어 놓고 싶었다. 차마 그럴 수 없는 현실이 괴로웠다.
“아버지.”
한우주가 긴 침묵을 깨어 내고 드디어 입을 연 때였다. 임도윤이 곁에서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야. 슬슬 가야겠다. 곧 사람 올 것 같아.”
“잠깐만… 한우주가.”
“이 정도 들었으면 됐잖아. 얼른.”
임도윤이 초조하게 말했다. 도움받는 처지에서 고집을 부릴 수도 없어, 마지못해 발걸음을 뗐다. 등 뒤에서 한우주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어떡하죠. 제가 원래 주제 파악을 잘 못 하는데. 앞으로 자주 속상하시더라도 참아 주셔야겠어요.”
아니, 한우주 너….
어쩌자고 그런 말을……?
나조차도 입이 떡 벌어지는 발언에 임도윤은 혀만 한 번 차고 말았다. 그리고 금방 날 원래 위치에 되돌려 놓는 것에 집중했다. 곧, 복도에는 임 회장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