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한우주는 멀뚱히 있다가 내가 ‘얼른.’ 하고 재촉하고 나서야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대로 한우주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체격 차이 탓에 내가 한우주 품에 파묻힌 꼴이 되어 버렸지만.
“내가 이런 일로 왜 너한테 화를 내.”
나는 목소리에 스민 웃음기를 미처 지우지 못한 채 이어 말했다.
“난 널 좋아하잖아. 언제든 네 편일 텐데.”
그런데도 불안했어? 가볍게 건넨 물음에 한우주는 대답 대신 나의 어깨 위에 고개를 떨구었다. 천천히 이마를 비비는 움직임에 옷자락이 피부를 스쳤다. 귀도, 어깨도 간지러웠다.
“뜬금없는 말이긴 한데….”
나는 문득 떠오른 말을 한우주에게 건넸다.
“나 너보다 한 살 더 많은 거 알아?”
“…뭐라고?”
한우주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어깨 위의 기분 좋은 묵직함이 사라지자 어렴풋하게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한편 눈앞의 한우주는 대놓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져 물었다.
“말한 적 없나?”
“없어. 왜 지금껏 말 안 했어?”
“그야 굳이 말할 필요를…. 아니다. 그전에 말하는 걸 까먹었어.”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했나? 말하지 않아서 서운한 걸지도 모르겠네.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한우주를 유심히 살피며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유독 동생 같아서.”
한우주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물었다.
“……그래서 형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했던 거야?”
“어? 내가 언제?”
“그랬어. 좋아했어, 분명.”
그랬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우주가 형이라고 부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좋아했다고…?
“둘이 있을 땐 형이라고 부를까?”
“뭐?”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와중에 솔깃한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나 진짜로 형이라는 말 좋아하나? 나 설마… 꼰대인가?
“됐어. 뭘 인제 와서 새삼스레…”
고개를 살살 저으며 건넨 말에 한우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 뭐야. 쟨 또 왜 웃냐?
“알았어. 형이라고 부를게.”
“아니, 됐다니까?”
“싫으면 안 하고.”
“……싫은 거랑은 다른데.”
굳이 할 필요 없다는 거지, 누가 싫다고 했나? 세상이 어떻게 좋은 거 싫은 거 딱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어. 한우주 인제 보니 참 극단적이야. 대충 이런 말을 중얼거렸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한우주의 웃음만 더 돋구는 꼴이 되어 버렸고 나는 점점 더 민망해졌다. 그런 감정도 곧 아무렴 상관없어졌지만.
“알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태원이 형.”
한우주 덕분에 새로운 걸 알아 간다. 나… 형이라는 말 좋아하나 보다. 열이 올라 머리가 핑 돌았다.
“낯 간지럽게 무슨 존대까지 해.”
“그동안 형 나이도 모르고 너무 편하게 대했으니까요.”
“한우주. 형 놀리지 마라.”
“놀리는 거 아닌데.”
웃는 게 딱 놀리는 상인데 어디서 발뺌이야.
…내가 귀여워서 봐준다.
놀리고 싶으면 놀리라지, 뭐. 어쨌건 이전보다 한껏 풀어져 편안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근데 진짜 너 편한 대로 부르면 돼. 난 진짜로 네가 형이라 부르든 이름으로 부르든 크게 상관없거든. 한 살 차이밖에 안 나기도 하니까 괜한 부담 갖지 말라고….”
한우주는 조용히 내 말을 듣더니 다시금 내 어깨에 뺨을 살포시 기대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
태원아, 하고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 다른 이라면 어색하게 느껴졌을 시간조차 상대가 한우주라면 마냥 안락했다.
“고마워, 태원아.”
“…….”
나는 한우주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벅차올랐다. 이 대화에 특별한 게 있었던가? 아니, 오히려 평범했던 것 같다. 한우주와 쌓아 온 평범한 시간이 자아낸 행복을, 그 가치를 새삼스레 실감했다.
그 뒤로 우리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자주 웃었다. 실컷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늘의 일 역시 특별한 것 없는, 금방 지나가고 말 작은 불행이 되어 있었다. 딱 그렇게 느껴질 만큼만 서로 투정을 부렸다. 그러던 중 한우주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한참을 웃기만 했던 한우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 봐야겠다.”
벌써? 놀라서 묻고 보니 벌써가 아니었다. 거의 한 시간을 떠들기만 했다. 오지 말라고 할까, 말까 고민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즐기고 말았다. 한우주는 연락하겠다, 또 보자고 말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겨우 떼어 냈다.
한우주가 떠나자 주변이 휑했다. 우스운 말이다. 이 좁은 원룸이, 한우주가 있다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넓어 보인다니.
헛헛한 기분에 괜히 시스템 창을 켜서 이것저것 살폈다. 내게 주어진 퀘스트를 거듭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한우주에게 ‘나 이제 집인데. 뭐 해?’라는 메시지가 왔을 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루트고, 베드 엔딩이고. 뭐가 어떻게 되든… 같이 있는 동안에는 그냥, 한우주한테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그게 한우주는 물론이고 내게도 가장 좋은 방향일 것이다. 내가 한우주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한우주의 아버지나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답 없는 퀘스트 따위를 고뇌하느라 시간을 쓰는 건 아깝지 않은가?
신기했다. 한우주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는데 한우주와 함께한 덕분에 어느새 생각이 말끔히 정리됐다. 나는 불확실한 것보다 확실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한우주를 좋아하고, 한우주 역시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한우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따가 통화돼?」
답장이 오기까진 일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 우주: 한 시간 정도 뒤에. 왜? 무슨 일 있어?」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리고 거의 삼 분간 답장이 없었다. 민망한 감정이 들 즈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우리 우주」
한우주에게서 온 전화였다. 뭐야, 얘. 일 있는 거 아니었어?
기분 좋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 내가 좋아하는 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
“내가 올해는 인복이 좀 없나 봅니다. 당최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긴 한 건지….”
임 회장은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며 검지로 책상 위의 낡은 핸드폰을 두드렸다. 톡, 톡…. 짧은 손톱과 액정이 마찰하는 소리는 방 안에 긴장감을 팽배하게 했다. 서재의 가운데 선 남자는 성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에 임 회장의 심기가 더욱 상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역겨워서 더는 참기 힘들었다.
“선생님. 제가 드린 게 부탁 같았습니까?”
“하하, 부탁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지금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남자의 능글맞은 대꾸에 임 회장이 혀를 찼다. 임 회장은 서랍에 채워진 잠금을 풀곤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꺼냈다. 이어 책상 위에 내팽개치며 턱짓했다.
‘젠장, 갑자기 불려 와선 왜 이런 취급을….’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의 주먹이 분노에 잘게 떨렸다. 그러나 참아야만 했다. 남자는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세우며 책상에 가까이 다가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남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윤태현 선생님, 잘 좀 합시다. 내가 굳이 이렇게 따로 불러서 얼굴을 붉혀야겠어요?”
“…….”
“내 아들의 담임 되는 분께서 이런 사람이었다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예?”
방금 저 늙은이가 뭐라고…, 아들의 담임? 그렇다면 설마 한우주가…?
‘망할.’
윤태현은 욕을 뱉지 않기 위해 입 안을 짓씹어야 했다. 서류에는 익숙한 이들의 신상이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 윤태현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이건 단순한 경고용일 뿐이다. 임 회장은 윤태현에 대한 조사를 마쳤으며, 그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전부 알고 있다.
이게 밝혀지면 윤태현의 교사 생활은 끝이다. 아니,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으면 다행인가.
임 회장이 윤태현을 찾아온 게 벌써 몇 주 전의 이야기다. 아마 그가 막 담임을 맡게 되었을 때였나. 임 회장이 ‘한우주를 지켜보고, 특별한 사항이 있으면 보고하세요.’라고 말했을 때, 윤태현은 고작해야 한우주가 임도윤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을 거라고만 짐작했다. 그 둘은 얼핏 보기에도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한우주가 임 회장의 아들이었다니. 젠장,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게다가 그때 언급한 이름…, ‘조현우’에 대해 가벼이 여겨선 안 되었다. 조현우는 윤태현 개인이 흥미 있게 보고 있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고작 자신의 흥미 때문에 미루어도 될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사태의 심각성을 윤태현은 이제야 알았다.
임 회장은 윤태현의 반응에 만족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USB 사본을 하나 내밀었다.
“나는 오래 참아 줬어요. 이걸로 선생님 선에서 알아서 처리합시다. 알겠습니까?”
“…처리라면?”
“방금 알아서 하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떠먹여 줘야 한다니. 아둔한 것들은 딱 질색이다. 솔직히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싫었다. 그렇지만 더 두고 보기엔 조현우라는 녀석이 지나치게 거슬렸다. 그렇다고 함부로 본인이 직접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슷하게 하찮은 것들끼리 알아서 처리하게 두는 게 나았다. 마침 윤태현이라는 하자 있는 인물이 담임이라는 위치에 있었으니, 이용하기엔 더없이 적절했다.
“그래요. 그럼 가정 방문은 이쯤에서 마치시죠. 내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임 회장은 용무를 마치자마자 윤태현을 바로 물렸다. 인생을 내다 버린 녀석이 아니라면 이번엔 일을 제대로 하겠지.
‘…더는 신경 쓸 일 없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