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들 녀석의 변덕에 이게 웬 고생인지. 여태 얌전하던 녀석이 뒤늦은 반항기라도 온 건가? 임 회장은 설령 아끼는 아들이라 한들 제게 반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반항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빌미들을 하나씩 치워 버리면 그만이다.
일단 그 조현우인지 뭔지 하는 녀석부터 떼어 두면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임 회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요즘의 한우주를 알 수가 없어 화가 났다. 웬일인지 제대로 살아 보려는 것 같기에 집 안에 있을 곳을 내어줬더니 이상한 일이나 벌이고 있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한우주.’
임 회장은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나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한우주는 임 회장의 기대를 산산조각 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
「WARNING」
수요일 아침, 평화로워야 할 등굣길에 웬 붉은 글자가 눈앞에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이게 뭐야. 경고? 아니, 뭔 놈의 경고 메시지를 이렇게 띄워?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잖아.
‘갑자기 무슨 경고야?’
시스템 창을 힘껏 노려보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떠나세요.」
“뭔….”
등줄기가 오싹했다. 설마 주변에 괴한이라도 있는 건가? 몸을 숨기라니, 어디에 어떻게 숨으라는 거야? 그 와중에도 한우주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한우주에게 연락을…. 그런데 뭐라고 하지? 느낌이 싸한데 좀 도와 달라고 해? 한우주라면 그렇게 말 해도 기꺼이 와 줄 것 같긴 하지만…. 아니, 나 지금 위험에 빠진 것치고는 되게 한가로운 생각 하는 거 아니야?
“여기 서서 뭐 하냐?”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내 뒤에 서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칠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안심했다.
“아…,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
“아니 그냥…. 너 혹시 오면서 수상한 사람 못 봤어?”
“엉? 아침 댓바람부터 뭔….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니, 특별히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괜찮은 거 맞지?”
“음…, 응.”
허지훈이 눈을 좁혀 떴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학교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단순 오류였나?’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경고를 해 온 적은 없었는데.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고 넘기기엔 꺼림칙했지만, 허지훈 말마따나 지금은 사방이 훤한 아침이지 않은가. 등교하는 학생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길목에서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허지훈까지 만났으니… 괜찮겠지.
‘괜히 사람 불안하게 만들기나 하고.’
나는 속으로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바빴다. 덕분에 허지훈이 한참 동안 나를 흘끔대고 있던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야.”
허지훈이 나를 부름과 동시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는 ‘응?’ 하고 짧게 대답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우리 우주: 언제 와?」
어, 한우주 벌써 학교 도착했나?
「지금 가는 중. 10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우리 우주: 응. 천천히 와.」
이따 봐. 그렇게 답장을 보내려던 때에, 메시지가 한 통 더 왔다.
「우리 우주: 너무 천천히 오지는 마.」
“풉.”
“…갑자기 왜 이렇게 쪼개? 혼자 재밌는 거 보냐?”
허지훈이 핸드폰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당황해 곧장 핸드폰을 뒤로 빼며 화면을 꺼 버렸다.
“…….”
“…….”
“왜, 왜… 갑자기 남의 핸드폰을….”
보고 그러냐…. 장난처럼 웃으며 말하려고 했다. 허지훈이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우리 우주?”
“어, 음. 허지훈 너 동체 시력 좋다.”
“우리 우주?”
같은 말을 무려 두 번이나 반복하다니. 사람 불안하게.
“아니, 이건 오해가 조금….”
그러니까 이게 한우주 형 핸드폰인데 얘가 자기 동생을 ‘미친놈’이라고 저장해 놨더라고. 좀 골려 줄까 싶어서 ‘우리 우주’로 바꿔 놨을 뿐이야. 아, 내가 왜 한우주 형 핸드폰을 가지고 있냐면…. 망할. 내가 들어도 변명 같은 진실이 속에서만 맴돌았다. 결국, 나는 허지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허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앞장서 걸었다.
“그래.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했어.”
“…무슨 얘기?”
“너 요즘 한우주랑 사이 좋아 보인다고.”
“아…….”
“너….”
허지훈은 내게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무거웠다.
아니, 그야 사이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학교에서 허지훈과 통 대화를 못 했다. 돌이켜 보면 허지훈은 내게 한우주와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었는데 마땅한 타이밍을 잡지 못해 그런 건 아니었을까 싶다.
……와, 허지훈 눈에 내가 얼마나 답 없어 보일까. 스토킹 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나서도 한우주와 붙어 있는 꼴이라니.
“그 일은… 해결됐어….”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허지훈 눈치 보인다고 한우주랑 떨어져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해결됐다고?”
“응.”
“어떻게?”
“…어떻게든.”
“야, 조현우.”
허지훈이 자리에 멈춰 섰다. 아, 미치겠네. 물론 허지훈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끔찍이 챙기던 친구 녀석이 스토킹하질 않나, 갑자기 기억을 잃지를 않나. 모든 걸 알린 뒤에도 스토킹 상대랑 붙어 다니고…. 그렇지만 그건 다 조현우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란 말이야. 머리가 아파 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우주 그놈이 역시 널 엿 먹이려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나 한우주한테 다 얘기했어.”
“뭐?”
“다 얘기했다고. 기억… 얘기랑, 스…, 스토킹 일이랑.”
“뭐?!”
“……무슨 심정인지는 알겠는데, 이거 밖에서 얘기하기엔 좀….”
누가 누굴 좋아하고, 스토킹하고, 엿을 먹이고. 모두 등굣길 대화로는 적절치 못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이 대화를 듣기라도 할까 겁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면 허지훈은 그런 건 눈에 뵈지도 않을 만큼 기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아니, 하. 잠깐, 그럼 뭐야. 너 설마 한우주랑….”
“야, 야! 미안한데 이따가 좀 얘기하자. 지금 말고!”
이따가 도대체 뭘 어떻게 얘기해 줘야 할지, 허지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지만 일단 당장은 허지훈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허지훈은 진정한 건지, 넋이 나간 건지 모를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교실에 거의 다다랐을 때 즈음에야 말을 꺼냈다.
“야. 제발 병원 좀 가자.”
“뭐?”
“너 기억만 돌아와 봐. 백 퍼센트 후회해. 네가 또 후회할 짓 저지르는 걸 두고 봐야겠냐?”
그렇게 말하는 허지훈은 너무나 진지해 보여서 섣불리 대꾸할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7월에 갈게. 그때까지 기억 안 돌아오면.”
“야. 어차피 갈 거면 빨리 가는 게….”
“너도 내 사정 알잖아. 이번 달 말까지 이 상태면 꼭 갈게.”
당장은 그냥 두고 지켜봐 주라, 제발. 거의 애원하는 말에 허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침부터 벌어진 실랑이에 기운이 쭉 빠져 얼른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조금 씁쓸한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7월….’
급하게 둘러댄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변명이었다. 그때 난 이곳에 없을 테니까.
***
「Wed 6/4│뉴비│D-20」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런데도 심란함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처음 여기 들어온 게 4월 1일…. 벌써 두 달은 지났네.’
퀘스트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러니 못해도 20일 뒤에는 엔딩을 보게 될 테고….
…한우주랑 있을 날이 고작 20일 남은 건가? 그런 거지?
‘7월에 나는 이곳에 없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입 밖에 내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말이다.
예전의 나라면 마냥 좋아했을 텐데. 아니, 지금도 싫은 건 아닌데…. 모르겠다. 한우주를 이렇게나 좋아하게 될 줄, 이별이 아쉬워질 줄 누가 알았나.
‘정신 차려. 어떻게 되든 최선을 다하기로 했잖아.’
허지훈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뭐라고 말하든 허지훈 입장에선 황당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적당히 둘러대고…. 또…….
‘뭐가 한우주를 위한 일일까.’
아무 말 없이 게임 종료를 해 버리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난 한우주가 이대로 죽,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곁에 있든 없든 말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에는 당연히도 한우주와의 이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20일 안에는 한우주에게 내 입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한다. 와, 뭐 이딴 게…. 솔직히 말해서, 내가 한우주라면 무슨 소리를 들어도 빡칠 거 같은데….
화내는 한우주를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했다. 나는 세면대를 짚고 서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때, 귓가에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평소보다 유독 소란해서, 처음엔 누가 장난으로 소화전 비상벨이라도 누른 줄 알았다.
눈앞에 붉은 글씨가 나타났다.
「WARNING」
“아씨, 뭐야 또….”
아침에도 이러더니 또야. 이게 진짜 맛이 갔나?
「도망가십시오.」
신경질적으로 경고 창을 끈 뒤 화장실을 나섰다. 그래, 덕분에 고민하던 게 싹 날아가긴 했네. 슬슬 1교시 수업 종이 칠 것이었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반 앞에 다다르고, 참 재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윤태현과 마주쳐 버린 것이다. 앞문을 통해 복도로 나온 윤태현은, 나를 보자마자 반색했다.
“아, 현우야.”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금 조례 마친 참인데. 어디에 있었니?”
“죄송해요. 화장실 가 있었어요.”
적당히 대꾸하고 교실에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윤태현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현우야.”
“네?”
“잠깐 선생님 좀 볼까?”
“곧 수업 시작할 텐데요…?”
윤태현이 빙긋 웃어 보였다.
“잠깐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