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28화 (128/150)

128화

뭐야, 이따가 보면 될 걸 가지고 왜 자꾸 이래.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설마 시스템이 경고한 게 이 상황인가? 윤태현이 짜증 나게 집적거릴 거라고? 원래도 몇 번 있던 일인데 새삼스레 경고까지 해 준다는 사실이 또 이상했다.

…아니면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른가? 윤태현이 무언가 꾸미고 있어서, 그래서 주의를 준 거라면? 아무튼 경고까지 받은 상황에서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만큼 찝찝한 짓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역시 지금은 조금….”

그러니 나는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윤태현의 손목을 떼어 내며 이야기하려던 때였다.

“현우야, 인생 망치기는 싫지?”

“…네?”

“일 크게 벌이고 싶지 않으면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윤태현이 웃는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어안이 벙벙했다.

“윤 선생님? 거기서 뭐 하십니까?”

“아, 영현 선생님.”

1교시 담당인 선생님이 교실 문 앞에 멈추어 서선 윤태현과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윤태현이 능청스레 말했다.

“여기 조현우 학생과 급히 상담할 게 있는데, 제가 지금 아니면 시간이 안 되어서요.”

“아~ 그래요? 급한 일이라는데 어떡하나. 출석 체크해 둘 테니까 편하게 상담 보고 와요.”

“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친 윤태현이 나의 팔을 잡아끌며 길을 재촉했다.

“이거 놔 주세요.”

재수 없는 윤태현은 내 쪽을 한 번 돌아보고 웃으며 팔을 놓아주곤 가던 길을 향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걷는 내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들기에 이래? 어디 들어나 보자.’ 하는 오기와 ‘내가 왜 이런 인간의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해?’ 하는 억울함 섞인 생각이 충돌했다. 시스템의 경고까지 아른거리자 슬슬 불안했다.

‘어차피 학교 안인데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어.’

초조함을 내몰기 위한 체념, 그것이 자신에게 건넬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

“…교무실에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러기엔 현우, 네 개인사가 섞인 문제라.”

“상담실은요?”

“사람이 있어. 이번 시간 내내 상담 일정이 잡혀 있더구나.”

그러면 그냥 다른 시간에 보면 되잖아요. 이 미친놈아. 윤태현과 함께 있으면 속에서 욕이 마를 날이 없다.

윤태현은 이동 수업 때나 드물게 사용하는 빈 교실을 굳이 찾아갔다. 빈 교실을 찾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윤태현은 수많은 교실 중에서도 하필 복도 쪽에 창이 나 있지 않은, 가장 외진 장소를 골랐다. 우연인지 계략인지는 몰라도 윤태현과 단둘이 이런 곳에 있기는 죽어도 싫었다. 나는 교실 문턱을 쉬이 넘지 못하고 주뼛거렸다.

“현우야, 왜 그러니.”

“네?”

“꼭 잘못한 게 있는 것처럼 굴잖아.”

“……그런 거 없어요.”

“그럼 어서 들어오렴. 얼른 마치고 수업 들어가야지.”

윤태현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기분은 바닥을 찍었다.

이대로 윤태현의 뜻에 말려들어서 내게 좋을 거 하나 없을 것이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윤태현은 눈치가 더럽게 좋았다. 미소와 회유가 통하지 않자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곤 낮게 말했다.

“자꾸 이러면 선생님 기분이 상하는데.”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

“…저 돌아가 볼게요. 몸이 좀 안 좋아서.”

“우주까지 곤란하게 만들기는 싫을 거잖니.”

“네?”

“우주 말이야. 현우 네가 싫다면 선생님은 우주랑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거든….”

이 새끼가 진짜?

한우주까지 들먹이자 분노가 치솟았지만, 태도는 되레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윤태현이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이든 간에 한우주가 연관되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한우주가 윤태현한테 데는 꼴 보느니 내가 좀 곤란하고 만 것이 나았다. 앞장선 윤태현의 눈을 피해 핸드폰 녹음을 켜 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악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태현과 한 교실에 들어섰다. 윤태현은 교실 문을 잠그기까지 했다. 그러곤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이어 제 옆자리를 툭, 치며 말했다.

“앉아.”

소름이 끼쳤다. 아무래도 윤태현은 작위적인 상냥함을 거두기로 한 모양이다. 내가 마지못해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윤태현은 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현우야. 그동안 재미 좀 본 모양이야?”

“…뭐가요.”

윤태현은 말하며 노트북을 내 쪽으로 틀어 보였다. 화면이 거뭇해 처음엔 그게 뭔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 이 씹.”

욕이 절로 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미 본 적 있는 것들이었다. 이걸 윤태현이 왜,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지우세요.”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노트북 터치패드에 간신히 닿으려던 나의 손은 윤태현에게 가볍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진심이니?”

‘기껏 고생해서 찍어 놓고.’ 하며, 윤태현은 나를 비웃었다. 그에 화가 치밀어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윤태현의 노트북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한우주의 사진이었다. 조현우가 찍은 그 역겨운 사진들 말이다. 나는 숨을 고르며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

“이런 걸 왜 저한테 보여 주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하, 모른 척하겠다는 거야?”

“모른 척이 아니라,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윤태현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곤 책상 위에 익숙한 물건을 올려 두었다. 낡은 핸드폰. 조현우의 것이었다. 저건… 한우주의 오피스텔에서 임 회장과 마주쳤을 때 떨어트리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윤태현의 손에 있을 물건은 아니었다. 윤태현은 손끝으로 낡은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전부 이 안에서 나온 사진이야.”

그래, 있을 만도 하지. 잠겨 있어 끝내 열지 못했던 앨범을 윤태현이 어떻게 들여다봤는지는 모를 일이고.

“선생님은 네게 기회를 주려고 한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따로 불러낸 게 아니겠니.”

“기회요?”

“그래.”

“기회… 무슨 기회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 기회. 조용히 반성하고 끝낼 기회 말이야.”

“…….”

“얌전히 선생님 말만 잘 들으면….”

윤태현은 다시 상냥한 어투로 말하며 은근슬쩍 허리를 감싸려 들었다.

“이 미친.”

나는 윤태현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뭐? 지금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윤태현 선생님 아닌가요?”

더는 못 참아 주겠다. 이런 쓰레기를 상대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윤태현이 허탈하게 웃으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현우가 언제 이렇게 뻔뻔해졌을까. 우주가 이 사실을 알아도 괜찮니?”

“네. 말하세요. 말하고 이 사진들 다 지워 버리라고요. 필요하시면 지금 가서 우주 데려올까요?”

윤태현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만 일그러트렸다.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한우주의 사진이 저 인간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고작 조현우를 협박하기 위해 한우주가 찍힌 사진이 쓰이다니. 애초에 협박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신고해 버렸으면 이렇게까지 열을 받진 않았을 거다. 한우주를, 자신의 담당 학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음흉한 욕망을 충족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게 훤히 보였다. 분노에 치가 떨렸다.

“…선생님 말씀만 들으면 저 혼자 반성하고 끝낼 기회를 주겠다고요.”

“……조현우.”

“선생님 말씀, 어떤 거요? 뭘 시키시려고요?”

윤태현이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하…, 이런 식으로 굴어서 좋을 게 없어. 네게도, 우주에게도.”

끝까지 협박이라니.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 저 입에서 한우주 이름이 나오는 것도 더는 참기 힘들었다.

“자꾸 우주 들먹이지 마세요. 걘 잘못한 거 없잖아요.”

피로감이 몰려왔다. 일단 윤태현에게서 벗어나야 감정이든 생각이든 차분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 봐야겠어요.”

지친 숨을 내쉬며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윤태현은 날 보낼 생각이 없다는 듯이 급히 손목을 붙잡았다. 뿌리치려 했지만 붙든 힘만 더욱 세질 뿐이었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자, 윤태현이 웃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 현우를 어쩌면 좋을까. 틈만 나면 우주, 우주… 거리니. 우주가 좋긴 한가 봐. 있는 잘못도 없다고 말하니.”

“…뭐요?”

“순진하기도 하지. 인하성 때의 일을 정말 아무도 모르게 넘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인하성.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 들었다. 그러자 윤태현이 더 크게 웃었다.

“현우야. 선생님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너희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어때, 이제 좀 얌전하게 굴 생각이 들어? 그렇게 묻는 윤태현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메마른 입술이 달라붙은 듯했다.

“그나저나 이상하구나.”

“…….”

“이상해…. 현우 네가 원래 이렇게 예민했던가?”

“…선생님.”

“내가 뭘 했다고 자꾸 이럴까. 왜 항상 그렇게 질린다는 듯이 나를 쳐다볼까. 응? 현우야.”

아귀힘이 점점 더 세졌다.

“꼭 이번 일이 아니어도, 줄곧 이상하다고. 그렇게 생각은 했는데.”

“잠깐 놓고 얘기를 좀.”

“뭐가 이렇게 항상 당당한지….”

“놔 달라고요.”

윤태현은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냥 웃기만 했다.

또라이. 단단히 맛이 간 게 틀림없다.

시스템이 보내온 경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 상황을 피하라는 이야기였나? 애초에 오늘은 학교에 와선 안 되었던 걸까? 망할, 이 몸으로 발버둥 쳐 봤자 윤태현에게 생채기 하나 못 낼 것이 뻔했다. 조현우의 몸이 오늘 유독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좀, 놔요!”

마지막 발악이었다. 손목을 비틀어 보았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윤태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쿵.

누군가가 밖에서 교실 문을 거세게 내리쳤다. 묵직한 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윤태현의 가라앉은 시선이 교실 문 쪽을 향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