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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29화 (129/150)

129화

“가지가지 하는구나, 너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윤태현은 한숨을 내쉬며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짧은 순간 많은 고민이 오갔다. 도와 달라고 소리쳐야 하나? 그랬다가 윤태현이 보복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한우주에 대한 걸 누설하기라도 하면? 섣불리 반항하기에는 윤태현이 가진 정보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안에 있냐?!”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인물은 다름 아닌 허지훈이었다. 이어 허지훈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짜증스러운 말까지 들려왔다.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수업 시간인 거 몰라?”

“급한 일인데요!”

“무슨 급한 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반 수업에 방해될 거 생각 못 해? 너 몇 학년 몇 반이야!”

윤태현이 혀를 차며 내 손을 놓았다. 낮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짜증이 담겼다. 그러곤 내게 가만히 있으라 눈짓했다.

그때, 밖이 어수선해지더니 철컥하고 잠긴 문이 열렸다. 자연스레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한우주는 열쇠를 교실 앞자리 책상 위에 대충 내팽개치고는 다급히 내게 다가왔다.

“한우주?”

아직 바로 옆에 윤태현이 있는데도 한우주를 보니 긴장이 탁 풀렸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음이 놓이는 게 이상하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한우주는 놀란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

“어머, 윤태현 선생님? 왜 여기 계세요?”

“야, 조현우!”

순식간에 교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밖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선생님은 의외의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 떴고, 허지훈은 내게 다가오다가 한우주를 보곤 콧잔등을 찡그리며 걸음을 멈췄다. 윤태현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하하, 웬 소란인지… 죄송합니다. 지연 선생님. 잠시 학생이랑 상담 중이었어요.”

“상담?”

한우주의 목소리엔 분노가 억눌려있었다.

“상담하는데 학생 손목을 잡아요? 자국이 남을 정도로?”

“미친, 뭐?”

거리를 두고 주뼛거리던 허지훈이 표정을 와락 구기며 내게 가까이 다가서려고 했다. 와중에 한우주는 그걸 막았다. 허지훈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싫은 소리 없이 팔짱을 끼며 윤태현을 노려봤다.

“윤태현 선생님.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음… 정말 상담 중이었을 뿐입니다. 신경 쓰이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교실에 들어선 선생님도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업 중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는지, 윤태현에게 ‘상담은 그쯤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수업 마치고 잠깐 뵙죠.’라고 하며 주의를 주곤 교실로 돌아갔다.

“내가 감정이 조금 격했던 모양이야. 미안하구나, 현우야.”

윤태현은 평소의 가식적인 모습으로 돌아와선 노트북을 정리하려 들었다. 그때, 한우주가 윤태현의 손을 벌레처럼 쳐내곤 노트북을 확인했다. 화면을 본 허지훈의 안색은 새파래졌고, 윤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런, 이건 내가 보여 주려고 한 게 아니라….”

“이거 때문에 상담인지 뭔지 한 거예요?”

“그래. 학생의 범죄 행위를 두고 볼 수는 없잖니.”

“뭐가 범죄인데요?”

즐겁다는 듯 이야기하던 윤태현이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한우주는 더 볼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무신경하게 굴었다. 한우주의 시선이 다시금 내 손목에 닿았다.

“그냥 절 부르지 그러셨어요. 현우 데려다가 뭘 하시려고?”

“……한우주.”

“네.”

“이거 전부 조현우가 한 짓이야. 현우가 네 사진을 찍었다고. 너 몰래.”

“아… 네. 몰래 한 거 아닌데요.”

“뭐?”

“몰래 찍은 적 없다고요. 제가 찍으라고 했어요.”

윤태현이 헛웃음을 뱉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다시 말씀드릴게요. 동의해서 찍은 사진이고, 현우는 잘못 없어요. 애먼 사람 데려다가 상담인지, 협박인지 모를 일을 벌인 건 선생님이고.”

“협박이라니. 우주야. 선생님이 현우를 협박해서 뭐 하겠니.”

“글쎄요. 재밌으신가? 협박이 취미라도 되시나 보죠.”

불안했다. 지금 윤태현을 도발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지금 나는 사진보다도 윤태현이 인하성을 언급한 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사진은 정 안되면 내가 책임을 물면 된다. 그러나 인하성의 일은 다르다. 밝혀지는 순간 한우주에게 타격이 갈 것이 분명했다.

윤태현이 도대체 어떤 경로로 이 모든 걸 알게 되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괜히 여기서 더 위험성을 키우기는 싫다. 인제 그만하자. 그런 뜻에서 한우주의 손을 살짝 쥐었다. 한우주는 못마땅해 보였지만,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윤태현은 퍽 당황스러워 보였다. 아마 한우주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겠지. 그렇다고 따지고 들기엔 지금 이곳엔 나와 한우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윤태현은 허지훈의 눈치를 흘끔 살피곤 애써 웃어 보였다. 낡은 핸드폰은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노트북만을 챙기며 말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자. 너희는 도대체 왜 나온 거니? 수업 들어야지.”

윤태현이 뒤늦게 선생님다운 꾸중을 했다. 그렇게 대화는 일단락되었지만 나는 머지않아 윤태현이 더 큰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 직감했다.

***

“그게 어딜 봐서 동의하고 찍은 사진이야…. 너 그 사진 싫어하잖아.”

괜히 사진을 보게 해선 싫은 기억을 되새기게 한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한우주는 아주 말짱한 얼굴로 대꾸했다.

“조현우랑 선생 때문에 네가 곤란한 게 더 싫어.”

그래서 정말 괜찮냐고, 한우주는 거듭해서 물었다. 아까부터 내 걱정만 하고 윤태현이 제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군다. 그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이제는 아지트처럼 느껴지는 옥상 문 앞을 찾았다. 윤태현과 헤어진 직후, 허지훈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선생님께 대충 핑계 대 줄 테니 이야기 나누고 오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덕분에 한우주와 둘이서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늦어서 미안.”

“한우주 네가 왜 미안해.”

“…안 무서웠어?”

무서웠던가? 내내 불안정했던 것 같긴 하다. 한우주가 잘못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한우주와 함께 있자 신기할 정도로 금방 괜찮아졌다. 다만 윤태현에 대한 불쾌감만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우주야.”

“응, 태원아.”

문득 윤태현이 허리를 감싸려 들었던 게 떠올랐다.

…말하면 화내겠지. 분명히.

한껏 털어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정말 해야 할 말도 못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나 좀 안아 주라.”

이 정도 어리광은 피워도 괜찮지 않을까?

한우주의 눈이 사랑스럽게 접혔다. 한우주는 기꺼이 두 팔을 벌렸다. 품에 기대어 안기자,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날 선 신경이 부드럽게 풀리고, 경직된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나는 조금 나른한 기분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그냥…. 네가 안 들어오고 복도에서 목소리만 들리길래. 실은 거의 바로 쫓아 나갔는데 수학이 문을 잠가서.”

“허지훈은? 같이 온 거야?”

“음…, 응. 멋대로 따라 나오던데.”

“그랬구나.”

허지훈한테도 나중에 고맙다고 얘기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한우주가 내 어깨를 잡고 거리를 조금 벌리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다른 사람 생각해?”

“와, 어떻게 알았어. 너 귀신이야?”

“태원아.”

“미안. 근데 너 질투하는 거 되게 귀엽다.”

“태원.”

“미안, 미안해.”

참아온 웃음이 기어코 터져 버렸다. 한우주는 정말로 귀엽다. 방금까지 쌓여 있던 화가 전부 녹아내려 버릴 정도로 말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가 한우주에게 가볍게 입 맞췄다.

“잠깐….”

분명 가볍게 한 번 하고 말 생각이었는데. 한우주는 내 팔을 제 목에 두르게 하고는, 깊게 껴안으며 입술을 맞물렸다. 아니, 좋은데. 나도 하고 싶긴 한데. 좋다고 정신 놓을 때가 아니잖아. 나는 한우주의 어깨를 살짝 밀어 내며 말했다.

“지, 진짜로 잠깐만. 우주야. 이럴 때가 아니라.”

“……왜?”

이럴 때가 아니면 뭐 할 때인데. 마치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윤태현이 인하성에 대해 알아.”

“…….”

놀랍게도 한우주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아니, 네 일이잖아. 이거 큰일이지 않냐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한우주에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걸 상기시켜야 할 것 같다. 나는 한우주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진지하게 말했다.

“윤태현이… 네가 인하성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것 같았어. 도대체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인하성이 얘기한 걸까? 하고 묻자, 한우주는 어두운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깊은 한숨이 덤으로 따라붙었다.

“아닐걸. 혹시나 했는데 걔가 그것까지 알고 있었어?”

혹시나 했다고? 한우주는 무언가 짐작하는 게 있는 것처럼 말했다.

“아버지가 한 것 같아.”

“뭐?”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랑 집안사람들 몇 명뿐이니까.”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네 아버지가 윤태현한테…?”

“응.”

“어떻게 그래?”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자기 아들한테 위협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그렇게 막 넘긴다고? 윤태현은 그걸 이용해서 날 협박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최 이해가 가는 게 하나도 없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야. 내가 자기 뜻대로 굴질 않으니까.”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협박 선에서 끝나면 가장 좋고, 밝혀져 한우주가 곤란에 처하더라도 제게 빌어 도움을 청하면 그때 수습해도 늦지 않다. 아마 그런 생각으로 일을 꾸몄을 것이라고, 한우주는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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