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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30화 (130/150)

130화

“네 아버지는 진짜….”

분노에 제멋대로 열리려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그에 한우주가 멀뚱한 표정을 하곤 이어 말했다.

“유아독존. 구제 불능. 몹쓸 놈에다가 쓰레기라고?”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려고 한 건 아닌데. 수위만 조금 낮을 뿐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하려고 했던 터라 곧장 부정하지 못했다. 한우주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뭐,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야.”

“…정말?”

“워낙에 성정이 못된 인간이라, 반항해도 양심에 걸리질 않거든.”

“그걸 지금 좋은 점이라고 얘기하는 거야?”

“왜? 난 진심이야.”

그 말에 내가 작게 웃자 한우주는 표정을 한층 더 누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튼… 그 인간들도 얼른 치워 버려야겠네.”

나는 기꺼이 그 손을 맞잡았다.

“치워? 그 인간들?”

그 인간‘들’이라니…? 한우주가 뭘 하려는 거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불안해하는 게 겉으로 표가 난 것일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앞으로 또 이런 일은 없을 거야.”

“한우주. 내가 걱정하는 건 오늘 같은 일이 아니라….”

“뭐든 간에. 나쁜 일은 없도록 할게.”

…어떻게? 또 무슨 일을 할 건데?

한우주의 속을 캐묻고 싶었다. 한우주는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길을 재촉했다.

“얼른 들어가자. 더 늦었다가 윤태현 귀에 괜한 말이라도 들어가면 안 되잖아.”

‘그 인간이 널 부를 명분을 만들기는 싫다.’라고, 한우주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속내를 말해 줄 생각은 없나 봐. 한숨이 얕게 나왔다.

“우주야.”

“응.”

“네가 곤란해질 만한 일은 하지 말아 줘. 알았지?”

“응. 알았어.”

남의 속이 타들어 가는 걸 알긴 하는지. 한우주는 내가 건넨 걱정이 흡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네가 속상한 건 나도 싫어.”

웃는 얼굴도, 호선을 그린 입술이 담은 말도 예뻤다. 하여간에 한우주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시와 때를 가리지 못하고 들뜨고 만다.

그 때문일까. 나는 조심성 없게도,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 버린 모양이다. 시스템이 ‘경고’한 것은 이까짓 작은 사건이 아니었는데도 방심을 해 버렸다. 덕분에 우리에게 따라붙은 끈적한 인기척을, 나도 한우주도 눈치채지 못했다.

***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감각이 둔했다. 그 때문에 내가 처한 상황을 기민하게 눈치챌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시야가 온통 검은 것이 이상했다. 게다가 몸에 힘이 쭉 빠져, 멋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공포감이 몰려왔다.

한우주?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을 부르려 해 봤지만, 메마른 기침 소리만이 의미 없이 울려 퍼졌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몸을 움직이려 들자 손목과 발목에 압박감이 들었다. 살에 낯선 물체가 거칠게 쓸리는 감각이 더없이 불쾌했다.

잠깐만, 이거 뭐야.

나 지금 묶인 건가? 눈앞이 온통 컴컴한 것도… 눈이 가려져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여긴 도대체 어디야?

순식간에 온몸이 서늘해졌다.

“아, 아무도 없어요?”

목소리가 크게 울려 메아리로 돌아올 뿐, 다른 대답은 없었다. 불안감에 거칠어지는 숨을 가까스로 가누었다. 사람이 극적인 상황에 부닥치면 되레 침착해진다고 하였던가. 본능적으로 생존할 길을 찾기 시작했다.

‘망할, 단단히도 묶었네.’

고개를 몇 번이고 세차게 흔들자 시야를 가린 헝겊이 조금 헐거워졌다. 절반 이상이 가려진 시야에 수상할 정도로 텅 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난생처음 보는 공간에 불안감이 더욱 솟구쳤다.

여길 나가야 한다. 그런 생각에 손과 발을 최대한 움직여 보았지만, 꼼짝도 하질 않았다. 나는 공포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내가 왜, 어쩌다 이런 곳에 있게 됐지?’

이대로라면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못 할 것이 뻔했다. 나는 애써 차분히 숨을 내쉬며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상기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는 말인가?

‘오전에 윤태현과 일이 있었고, 바로 그 뒤에 한우주와 대화를 나누고, 또….’

그 뒤에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다. 신경 쓰였던 일을 굳이 꼽자면 허지훈이 내게 어색하게 군 것쯤 되겠다. 허지훈은 윤태현과의 일에서 한우주가 나를 감싸고 도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뒤로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혼자 생각에 빠져들어선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흐릿한 과거의 일이 차츰차츰 떠올랐다.

점심은 어김없이 서연준과 한우주, 그리고 나. 셋이서 먹었다. 서연준은 놀라울 정도로 평소와 다름없이 굴었다. 놀이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의식하는 건 아무래도 나뿐인 것 같았다. 나 역시 의연하게 굴어 보려 노력했지만 내가 좋다는 사람과 또 지금 사귀는 사람 사이에 껴 있는 기분이란, 말로 표현 못할 만큼 미묘했다

-현우야. 왜 그래? 밥맛 없어?

-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서연준 네가 얘 밥맛을 왜 신경을 써?

-응? 당연히 신경 쓰지. 친군데.

요즈음 한우주는 서연준과 있을 때 유독 날카롭게 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멀지 않은 과거에 서연준과 한우주가 사귀길 바랐던 나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나마 오늘은 한우주가 투덜거리는 정도가 덜했다. 핸드폰을 붙들고 있느라 말이 거의 없었으니까.

도대체 뭘 한다고 핸드폰을 그렇게 들여다보는 것인지. 누구랑 연락이라도 주고받는 건지. 나랑 대화하는 것보다 핸드폰이 더 좋냐 하는 유치한 추궁의 말들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참아냈다. 한우주에게 있어 속 좁은 애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크고 작은 일들을 뒤로 하고 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죽 흘러갔다. 이날은 시간표에 수학이 없어서, 종례 때가 되어서야 윤태현과 다시 마주쳤다. 몇 가지 안내와 상투적인 인사말. 내용은 별거 없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담임 표정 왜 저렇게 썩었냐?

종례가 끝난 뒤 반 아이들이 윤태현의 안색에 대해 한두 마디씩 말을 얹어 댔다. 평소 표정 관리만큼은 잘하던 윤태현이 어쩐 일로 저렇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

‘아니, 모를 일인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한우주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티가 날 듯 말 듯, 미미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아, 한우주가 뭔 일을 하긴 했나 보다.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한우주의 입이 열렸다.

-아직 별거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고?

그 말엔 여우처럼 입을 다물고 두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요즘 들어 한우주가 끼를 부리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아 곤란하다. 넘어가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넘어가면 안 되나? 예쁘니까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해 버리는 내게도 책임이 일부 있을 것이다.

나는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상정한 최악의 일은, 윤태현이 홧김에 한우주와 인하성에 대한 일을 떠벌여 한우주가 곤란에 처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머지않아 바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

떠올랐다.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가 어떤 게임인가?

공략 캐릭터들의 행동에 인간의 도덕성을 의심케 하는 게임이지. 폭력, 납치, 감금이 난무하는 미친 BL게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실제로 겪은 서연준과 임도윤이 내 생각보다 멀쩡했던 걸 떠올리며 나의 허술함을 변명해 본다. 망할,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생각보다 더 최악인’ 인간도 있는 모양이다.

하늘이 푸른색에서 주홍으로 물들어 갈 시간 즈음, 일은 벌어졌다.

은근슬쩍 함께 내 자취방 쪽으로 향하던 한우주는 본가에서 온 전화를 받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자꾸만 머뭇거리는 한우주를 재촉해서 겨우 보낸 뒤, 좁은 골목길을 혼자서 걸었다.

「WARNING」

그리고 또다시 나타난 붉은 글자.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WARNING’이라는 문구가 끊임없이 깜빡이며 존재감을 요란하게 뿜어냈다. 이어 ‘도망치세요.’라는 문구가 떠올랐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침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첫 번째로 경고 문자가 떠올랐을 때, 운 좋게 허지훈이 나타나 별일 없이 지나갔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경고 문자가 나타났을 때는 윤태현이 등장해 나를 협박하지 않았던가?

나는 앞선 상황에서 내게 크나큰 행운이 따라 주었다는 걸 이어진 불행을 통해 깨달았다. 이번 경고를 통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모를 일이다.

-혼자서 괜찮겠어? 데려다줄까?

-뭘, 됐어. 그보다 한우주 너 핸드폰. 누구한테 연락 왔는데?

헤어지는 순간까지, 좀처럼 발길을 떼지 못했던 한우주가 떠올랐다. 동시에 한우주가 내게 건넨 걱정을 그저 웃어넘긴 걸 후회했다. 적어도 오늘은 혼자 있지 말 걸 그랬어.

길게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폐가 아프도록 숨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바쁘게 주변을 훑으며 누군가가 있기를 바랐다.

혹은 나를 뒤쫓아 달려오는 저 걸음 소리가 멀어지기를, 붙잡히기 전에 자취방에 도달할 수 있기를.

‘망할 몸뚱이.’

그러나 도저히 몸이 버텨 주질 않았다. 다리에 힘이 점차 풀려 갔다.

더는 안 되겠다.

-여기 좀 도와…!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 짜내 비명이라도 지를 요량이었다. 발소리가 바로 뒤까지 바짝 다가왔다.

이내 입과 코가 거친 천에 틀어막혔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켜자 정신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애써 눈꺼풀에 힘을 줘 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내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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