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모든 걸 떠올리고 나자 더더욱 막막해졌다. 이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음은 물론이고, 범인의 실체 또한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한 꼴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일을 직접 겪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구속된 상태에서 도대체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주의 ‘help’ 기능은 저번에 써 버리고 말았다. 가진 것, 의지할 것 하나 없이 정말로 오롯이 나뿐이라는 게 피부로 다가왔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범람했다.
난 이제 어떻게 될까? 누가, 왜 이랬을까?
설마… 여기서 죽게 되나?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의 베드 엔딩에선 주인공이… 한우주가 죽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까.
‘한우주. 우주는 괜찮을까?’
설마 한우주도 비슷한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괜찮을 거야. 경고는 나를 향한 거였잖아.’
경고가 떴을 때 적어도 한우주가 위험해진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 모든 위험은 나를 향해 있다. 한우주와는 관련 없을 것이다. 우주는 무사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아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심호흡하며 복잡한 속을 하나하나, 겨우 정리해 갔다.
……정신 차려야 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목적은 무엇인지에 관한 건 탈출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나는 반쯤 가려진 시야로 다시 한번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코끝으로 눅눅한 공기가 불쾌하게 내려앉았다. 작은 소음도 크게 울려 퍼지는 널찍한 공간. 곳곳에 있는 투박한 철근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구석에는 건축물의 자재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공사가 중단된 창고 공간 같기도 했다. 은은히 퍼지는 곰팡내와 구석구석 철이 녹슨 흔적들이, 방치된 지 오래된 건물임을 증명했다.
‘우연히 누군가 찾아올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은데….’
이쯤 되니 한숨도 나오질 않았다. 나는 그나마 가까운 곳에 우뚝 선 철 기둥을 바라보며 가늠했다. 저걸 이용하면 묶인 손발을 조금이나마 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위치가…, 의자를 끌고 조금만 뒤로 갈 수 있다면….
끼익- 끼이익…. 발끝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의자를 뒤로 밀어 냈다. 툭, 등이 차가운 철 기둥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목을 사각기둥의 모서리에 갖다 댔다. 그리고 위아래로 마찰하기 시작했다. 슥, 스윽, 스윽. 밧줄이 쓸리는 소리가 생경하게 들렸다. 피부가 미치도록 쓰라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효과가 있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은 뭐가 없더라도, 밤새 긁어 대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일단 하고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열중했다. 몸은 곧 땀범벅이 되었다. 손목에선 피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헐거워질 거야. 그렇게 나 자신을 북돋고 달래야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허, 이것 보게.”
“헉.”
헛숨을 삼켰다.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히 열중한 나머지 낯선 발걸음이 다가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상대는 혀를 차며 내가 묶인 의자에 발길질했다.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쿵-!
“윽….”
나는 저항 한번 못 하고 의자와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나마 아까보다 나은 점을 꼽자면, 눈을 가린 헝겊이 거의 풀렸다는 점일까. 다행히 거리가 가까워 캄캄한 와중에도 바로 앞의 사람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덕분에 나는 이 망할 자식을, 아마도 납치범일 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은 퀭한 얼굴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제 안경을 벗고, 액정을 소매로 두어 번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구나. 당최 얌전히 있질 않으니….”
‘혹시나’가 사실이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기운이 빠졌다.
“윤태현….”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윤태현이었다. 윤태현의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
“어디까지 뻔뻔해질 생각이에요?”
“하하. 뻔뻔하다고? 내가? 이런 상황에도 입은 뚫려선, 잘만 얘기하는구나.”
윤태현이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시선을 내게 맞추었다.
“미안하다, 현우야. 이런 식으로 난폭하게 구는 건 내 성향에 안 맞는데 말이야…. 나도 사정이란 게 있어서.”
선생님 행세를 하던 평소의 가식은 모두 벗어던진 얼굴이었다. 지금의 윤태현은 그저 변태에다가 미친 새끼에 불과했다. 그보다 적합한 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게 진작에 얌전히 굴었으면 얼마나 좋아. 응?”
“…….”
“분명 훨씬 나았을 거야. 말했잖니. 이렇게 구는 건 내 성향에 안 맞는다고. 좀 더 예뻐해 줄 수 있었는데.”
“역겨운 새끼.”
“…한우주. 그래, 우주와 어울린 뒤로 점점 이상해졌지. 이전에는 이렇게 거친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응?”
“더러운 입으로 한우주 부르지 마.”
윤태현이 재밌다는 듯이 낄낄대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윤태현의 모든 것이 불쾌하기만 했다.
“아… 현우야. 네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 머리가 안 돌아가니?”
“윤태현 당신 때문에 이 꼴 됐지.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이러세요?”
윤태현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뜨였다. 윤태현은 내 멱살을 그러잡고는 손바닥으로 뺨을 내리쳤다. 짜악-! 마찰음이 창고에 울려 퍼졌다. 귀가 먹먹하고, 뺨이 화끈거렸다.
“이게 어떻게 내 탓이야?”
표정에 광기가 어려 있었다.
“어? 씨이발, 나는 이런 거 안 맞는다고. 몇 번을 말해? 이게 다 한우주랑 그 애비 때문이 아니겠어. 조현우. 현우야, 네가 사람을 잘못 고른 거야. 분수에 안 맞게 구니까…. 응?”
짜악-!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코에서 인중을 타고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래서,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이 튄 거 아니야. 하하….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너랑 한우주 때문이라고 선생님이 말하잖아. 알아들었어?”
대답하지 않았다. 이 자식은 단단히 미쳤다. 더 자극해서 맞았다가 정신이라도 잃으면 골치 아파진다. 흥분한 윤태현의 숨소리마저 잦아들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선생님이 미안하다.”
말을 안 하면 윤태현도 좀 닥칠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많이 아프지? 응. 정말, 선생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미안하다, 현우야. 선생님은 정말 현우에게 잘해 주고 싶었어.”
윤태현은 계속해서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다. 저가 넘어트린 의자와 나를 일으켜 세우고, 곳곳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주머니에서 웬 손수건을 꺼내 코피를 닦아 주기까지 했다. 그 모든 손길이 소름 끼치기만 했다. 역시 제정신은 아닌가 보다.
나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윤태현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최대한 얌전히 물었다.
“한우주 아버지가 시켰어요?”
윤태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윤태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목이 말라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 그래요? 이게 다 한우주 때문이에요?”
“그래. 그렇다고 했잖니, 내가. 한우주랑 그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겠어.”
“그러면요. 이제 난 어떻게 돼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표정을 보였다간 내가 윤태현을 역겨워하는 티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글쎄….”
영 곤란하다는 목소리였다. 순간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한우주의 아버지도 참 쓸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미친놈에게 일을 다 시키고. 말도 많고, 비집고 들어갈 틈도 많고.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현우야.”
“그러네요. 선생님 말씀이 다 맞아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선생님, 저 죽기 싫어요.”
“아니야, 아니야. 현우야. 죽기는 누가 죽어.”
윤태현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도닥이는 손길이 꼭 벌레가 몸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죽지 않을 거야. 그냥, 나는… 한우주와 널 떼어 놓으려고. 처음엔 협박하면 되겠지 싶었어. 그런데 한우주 그 자식이….”
윤태현은 자꾸만 나를 달래며 횡설수설했다. 그 안에는 나에 대한 사과와 한우주에 대한 분노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같은 말을 반복한 끝에 윤태현은 실토했다.
“그냥 조금 멀리 갈 뿐이야. 정말 그뿐이란다.”
“멀리 간다고요…?”
“그래.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잖니? 그냥… 응? 어쩌다 알게 된 곳일 뿐인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현우야. 너무 겁먹지 말아라. 가서 얌전히만 잘 굴면…. 죽는 일은 없을 거야.”
이 미친놈이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추측건대, 윤태현은 날 어딘가에 넘기려고 하고 있다. 멀리 보낸다고? 말을 잘 들으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이 미친 새끼, 지금 인신매매라도 하려는 건가? 그러고 보면 윤태현은 아까부터 자꾸만 시계를 확인했다. 꼭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미친. ‘조금 멀리’는 도대체 얼마나 멀리인데? 어디에, 뭐 하는 곳에 보내려는 속셈이지? 캐물어 보려 했지만, 윤태현은 정말로 ‘잘 모르는’ 눈치였다. 날 얼른 치워 버릴 생각만 가득해 보였다.
일이 생각보다 더 복잡해졌다. 그냥 버티고 캐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시간이 가도록 내버려 뒀다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서, 선생님. 윤태현 선생님.”
어느 순간부턴가 윤태현은 대답조차 드문드문했다. ‘자신은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니다.’라고 반복해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 하는 일이 익숙하진 않은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마른침을 삼켰다.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손과 발은 여전히 묶여 있고. 이용할 만한 것은….
‘윤태현.’
그래.
윤태현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