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윤태현은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의 공략 캐릭터 중에서도 비중은 가장 적었지만 비밀이 많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윤태현이 선생님 신분으로 학생에게 음흉한 감정을 품으며 희롱을 일삼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라는 것이다.
‘그것도 의지할 구석이 없는 사정 안 좋은 학생들만 골라서는.’
게임 속에서 윤태현이 ‘특별히 여기는 학생’ 중에는 한우주 역시 들어갔다. 여기서 윤태현을 잘 구슬리면 윤태현 루트를 타게 된다. 반대로 일찍이 밀어 내면 무사히 윤태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또 말이 쉽지, 무조건 꺼지라고 난리를 피웠다간 더 큰 화를 입는 수가 있다.
처음 플레이할 적에는 윤태현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지냈다가, ‘윤태현의 비밀’ 즉, 학생들을 상대로 희롱을 저지른 일을 알게 되자마자 망설임 없이 ‘신고한다.’라는 선택지를 눌렀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살해당했다.
윤태현은 한우주가 저를 신고하려 든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한우주를 살해했다.
공략 캐릭터 중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인물이 딱 둘 있는데, 그게 인하성과 윤태현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즉 한우주를 죽이는 인물은 윤태현밖에 없다.
제 욕망 따라 더러운 짓을 저지르면서도 그게 세간에 밝혀지는 것만은 절대 참지 못하는 놈. 비밀이 밝혀질 위험에 처하면 살인이라도 저지르는 쓰레기가 바로 윤태현이다. 평소에는 실컷 상식적인 인물인 양 구는 주제에 수틀리면 제대로 돌아 버리니 이래저래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식인 셈이다.
‘한우주에게 집적거리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이번에는 원작과는 다르게 한우주 아닌 조현우가 윤태현의 눈에 들어 버린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사건을 떠올려 보면, 윤태현이 조현우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몇 번이고 수상하게 굴기에 멀어지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나 보다. 나는 여태껏 밀어 낸다고 밀어 냈는데도 윤태현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걸까?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나는 원작에서의 한우주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는 거지.
내게 호감을 품고 있는 변태를 눈앞에 두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최악의 상황에 말이다.
‘한우주라면 어떻게 했을까.’
윤태현이 어떤 인간이든 간에, 죽기 싫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윤태현 루트에서의 한우주를 떠올렸다.
…게임 속 한우주가 이 미친 자식을 어떻게 구슬렸더라?
“알아요.”
헛숨을 들이 삼키며 이어 말했다.
“선생님이 원래 이런 짓 저지를 분 아니시라는 거, 알아요.”
일단 비위를 맞추며 반응을 살핀다. 앞서 거칠게 반응했던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다.
“협박당하신 거잖아요. 그렇죠?”
“…….”
대답이 없다. 안 통하나? 진작에 얌전히 굴었어야 했나? 윤태현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창고 입구 쪽을 살피며 자꾸만 안절부절못했다. 계속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내 말에 반응조차 안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디링-.
막막함에 앞이 캄캄해졌을 때,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System: 미니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윤태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십시오.」
「퀘스트 진행을 위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윤태현의 감정 <분노>」
「윤태현의 감정, <분노> 수치가 100에 다다를 시 윤태현에게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건 또 뭐야? 의아한 내용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윤태현을 열받게 만들면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거야?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시스템의 개입은 반가웠다. 나 홀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들던 차에 목표가 주어진 것 아닌가.
「윤태현, <분노:60/100>」
…그래도 60이면 해 볼 만한가?
하, 그래. 윤태현을 구슬리는 것보다야 열받게 하는 게 쉽지.
한 번.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서하늘, 인서안”
“……뭐?”
윤태현이 드디어 이쪽을 돌아봤다.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성태 일도 있었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인제 와서 발뺌하시려고요? 선생님.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하셨어요?”
눈앞에 떠올라 있던 창의 수치가 변화했다.
「윤태현, <분노:66/100>」
좋아, 순조롭게 올라가고 있다.
“설마 이 일로 협박당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언젠가는 전부 드러날 일 때문에 이러고 계신 거면….”
“아니야.”
윤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언젠가는 전부 드러날 일이라니? 이제 현우 너만 사라지면 되는 일 아니니.”
“그건… 저만 아는 일도 아닌걸요.”
윤태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잠깐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간에, 선생님이 망한 건 변하지 않을 거라고요.”
“하하… 뭐?”
「윤태현, <분노 78/100>」
윤태현이 굳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입 안이 마르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지만, 꿋꿋이 눈을 마주친 채로 도발했다.
“윤태현 선생님. 당신 좆 됐다고.”
「윤태현, <분노 82/100>」
“이대로 모두가 침묵할 것 같아요? 한우주 아버지가 이걸로 협박한 거죠? 제가 사라진 뒤에는요. 그 사람이 영원히 당신 비밀 지켜 줄 거 같아?”
“닥쳐.”
“꼭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요. 윤태현 선생님한테 당한 피해자들은요.”
“피해자라니? 말을 웃기게 하는구나.”
“피해자죠, 그럼 뭐예요? 그 애들이 정말 선생님을 좋아해서 장단 맞춰 줬겠어요?”
「윤태현, <분노 88/100>」
순조롭게 올라가는 분노 수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탈출할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양감, 윤태현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끼쳐 왔다.
“선생님은 걔들이 언제까지고 힘없는 학생일 거 같죠?”
목이 말라 기침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잇새로 웃음이 흘렀다. 말하면 할수록 윤태현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런데 아니거든요. 선생님은 벌 받을 거예요. 선생님이 저지른 일 때문에. 나도, 선생님이 깔보고 제멋대로 대한 학생들도 바보가 아니니까요. 당신이 한 일들. 전부 기억할 거거든.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할 수밖에 없거든요.”
쉽다, 쉬워. 그저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 진실을 말하면 된다. 웃긴 일이다. 범죄자인 저 인간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쉽게 분노해 버린다.
「윤태현, <분노 91/100>」
“알았어요? 다시 말해 줘? 당신은 당신이 뿌린 씨앗으로 인해 망할 거야.”
“조현우.”
“이거 다 헛짓거리라고. 나 하나 사라지면 다라고? 희망 회로도 적당히 돌려야지. 모든 게 밝혀질 때를, 선생님이 망할 시기를 조금 미룰 수는 있겠네요.”
“조현우, 닥쳐!”
「윤태현, <분노 97/100>」
의자에 등을 푹 기대었다. 손과 발이 묶여 있는데도 모든 게 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불쌍한 새끼….”
마지막 남은 수치가 차올랐다.
“조현우!”
「윤태현, <분노 100/100>」
디링-.
「System: 미니 퀘스트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윤태현의 분노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내가…, 내가 닥치라고 했지!”
윤태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외침이 어찌나 크던지, 창고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분노에 흥분한 윤태현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벗어날 기회’가 주어진다는 시스템의 말을 믿을 뿐이다.
그 순간, 윤태현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열기 오른 양손이 나의 목을 감쌌다. 이어 숨이 턱 막혔다.
“컥….”
쿵! 등 뒤의 철 기둥에 뒤통수가 부딪혔다. 산소가 부족한 탓인지, 철 기둥에 부딪힌 탓인지 머리가 핑 돌아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들었다. 점차 시야가 흐려졌다. 이 와중에 보이는 것이라곤 독기에 가득 찬 윤태현의 얼굴뿐이었다. 구속된 상태라 저항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다.
‘나 여기서 죽나?’
탈출할 기회를 준다더니. 육신에서 탈출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던 건가?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지?’
그냥… 이대로 정말 영영 끝나 버리면 어떡하지? 엄마와 누나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고3 앞둔 아들놈이 BL 게임을 하다가 조연에 빙의돼서 연애하더니… 여차여차해서 죽게 생겼다는 걸 가족들이 알면….
‘……미친. 이렇게는 죽기 싫어!’
죽더라도 내 몸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다. 아니, 아니다. 그냥 죽기 싫다! 아직 성인도 못 됐는데!
윤태현 이 망할 새끼야…!
시스템 자식아. 말한 건 지켜. 살아날 기회를 달라고!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속으로 간절히 외쳤을 때였다.
“혀, 현우야?”
‘뭐야?’
목을 감싼 손에 힘이 빠지고, 윤태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 아니… 아니야. 이럴 리 없어. 이건 아니야….”
어깨가 잡혀 사정없이 흔들렸다. 윤태현이 하는 행동도, 몸에 닿는 감촉도 전부 느껴지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젠장… 젠장! 이런 건 안 돼. 안 된다고! 응? 현우야… 일어나야지?”
윤태현이 소름 끼치게 다정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윤태현의 손길이 다급히 나의 손목을 향했다. 그는 나를 묶은 줄을 전부 풀어내고, 손목에 맥을 짚었다.
“아, 안 돼. 현우야.”
윤태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젠장, 젠장…. 여기서 네가 죽어 버리면 안 된다고. 이대로는 내가 진짜 좆 된다고!”
……뭐?
내가 죽었다고?